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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 앞세운 마오쩌둥, 문화혁명 일으켜 권력 싹쓸이

1 1966년 천안문광장의 홍위병 집회에서의 마오쩌둥.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인, 1966년 5월 16일 중국에서는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이 시작됐다. 부르주아 반동을 폭로하고 비판해 문화의 영도권을 탈취하자는 내용의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 이른바 ‘5·16통지’가 발표된 것이다.



[세상을 바꾼 전략] 대중과 권력의 연대

문혁은 1962년 ‘사회주의 교육 운동’의 개시, 1964년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 어록 『소홍서(小紅書)』의 발간, 1965년 마오쩌둥을 간접적으로 비평한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에 대한 비난 등에서 이미 시작됐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권력 1인자가 기획한 운동이라는 문혁의 특성을 고려하면 문혁은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이 주도한 중국 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공식 출범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에 실패해 권력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었고 이를 틈타 다른 엘리트 세력들이 마오쩌둥의 권력을 대체하려는 듯한 형국이었다. 이러한 권력 교체 시도 움직임에 대한 마오쩌둥의 대응은 대중과의 연대였다. 대중 가운데에서도 지도자와 일체감을 갖고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군중과의 연대였다. 폭도적 군중인 홍위병(紅衛兵)을 통해 마오쩌둥은 정치적 경쟁 세력을 숙청했다. 홍위병은 마오쩌둥의 지원과 지도 아래 자본주의와 관련된 것들을 하나씩 척결해나갔다. 문혁은 지도자 개인의 권력 장악을 위한 성공적인 한 수였던 반면, 국가적 차원에서는 10년 이상 발전을 저해시킨 나쁜 수였다.

2 1933년 독일 도르트문트의 나치돌격대 집회에서 연설하는 히틀러. [중앙포토]



대표적 권력-군중 연대인 홍위병 권력과 시장 간의 관계에서 군중이 늘 권력을 편드는 것은 아니다. 권력·시장·군중의 3자 간 연대의 양태는 다양하다. 먼저, 시장-군중 간의 비(非)정부 연대다. 이 연대는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저항일 때도 있고 무정부주의처럼 극단적일 때도 있다. 다음, 권력-시장 간의 비(非)대중 연대다. 정경유착은 권력이 공익 대신 영리를 추구하는 부정적인 엘리트 연대의 예다. 끝으로, 권력-군중 간의 비(非)영리 연대다. 이는 민관(民官) 거버넌스와 같은 긍정적인 기제로 작동하기도 하고, 반대로 위선적 비영리를 내세워 자율적 시장을 파괴하기도 한다. 중국의 홍위병은 권력과 연대한 군중이 시장적 가치를 훼손한 부정적 사례다.



권력자가 엘리트 지배 연합 대신에 맹목적 충성도가 여전한 군중과 손잡는 전략은 독재 강화의 단계에서 자주 관찰된다. 일찍이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대중적 인기를 누린 권력자들이 자주 활용했다.



근·현대 한국 정치에서도 관찰된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토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국회에서 재선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51년 11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는 1952년 1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부결시키고 대신 4월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5월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개헌안을 수정해 다시 제출했고 기존 개헌안에서 발췌해 만든,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만들도록 했다. 관제 데모를 동원해 국회를 압박했고, 7월 국회는 기립 표결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새로운 헌법에 따라 8월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선거로 재선되었다. 엘리트 집단 대신 국민을 동원해 대통령직을 유지한 것이다.



엘리트 집단에 의존하다 결국 권력 유지에 실패한 역사적 사례도 있다. 조선 말 고종이 일찌감치 개화파나 농민세력과 손을 잡았더라면 왕위를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배계급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 친일파 엘리트에 둘러싸인 고종은 1907년 강제 퇴위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 침체 노린 독일 나치의 선동정치마오를 위한, 마오에 의한, 마오의 문혁은 엘리트 집단 내부의 경쟁에서 밀린 지도자가 대중을 동원해 거꾸로 지배 엘리트를 물갈이한 사건이다. 권력 1인자의 교체를 가져다 준 다른 혁명들과 달리, 문혁은 오히려 1인자의 권력 강화를 위해 나온 것이었다. 오랜 기간 대규모로 동원된 군중 폭력은 권력자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데, 독일 나치즘 정도만이 문혁에 겨우 비견될 정도다. 마오쩌둥은 한 세대 위인 블라디미르 레닌뿐 아니라 같은 세대인 아돌프 히틀러의 군중 동원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오쩌둥과 히틀러의 군중 동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고대 그리스부터 언급돼 온 선동은 오늘날 뇌과학에선 전전두엽피질(PreFrontal Cortex)의 기능이 퇴화하면 쉽게 선동된다는 식으로 설명되고 있다. 또 여러 사회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자기 몫이 크지만 남이 몫이 더 커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상황보다, 자기 몫이 작더라도 남의 몫이 더 작아 상대적 박탈감을 주지 않는 상황을 선호했다. 남의 고통(schaden)을 나의 기쁨(freude)으로 여기는 샤덴프로이데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는 것이다.



나치와 문혁 모두 선동하기 쉬운 경제 상황 때 발생했다. 1차 대전 패전 후 다수의 독일인들은 의회민주주의와 같은 대의제가 독일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1921년 히틀러는 제대한 우파 군인을 중심으로 나치 돌격대(SturmAbteilung, SA)를 만들어 운영했다.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대량 발생하자 1933년 SA의 규모는 무려 200만 명에 달했다. 1차 대전 패전 후 법에 의해 10만 명을 넘지 못했던 독일 정규군을 압도하는 규모였다. 1922년 SA의 청소년 조직으로 출범하여 개편한 히틀러청소년단(HitlerJugend, HJ)도 80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였다. 나치는 독일 경제의 불황을 유대인 탓으로 돌려 유대인을 증오대상으로 만들었다. SA는 유대인 탄압을 행동으로 옮긴 돌격대였다. 일부 독일인들은 유대인 탄압에 환호했다.



 

3 1935년 중국 캠프에 참가 중인 히틀러청소년단.



1960년대 전반의 중국 역시 흉작과 경제정책 실패로 아사자가 증가했다. 분배할 경제적 재화가 충분하지 못하게 되자 이를 대신해서 함께 공유할 정서적 공공재가 더욱 필요한 상황이었다. 1963년부터는 중국이 외국과 직접 전쟁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공의 적으로 규정할 외부 대상도 뚜렷하지 않았다. 남의 불행을 고소하게 여겨 행복감을 느끼게 만드는 국내적 샤덴프로이데 말고는 당장 가능한 게 별로 없었다. 홍위병은 이를 노려 엘리트 집단을 공개 처단함으로써 한풀이 식의 순간적 희열을 공유했다.



군중 동원의 방식에 있어서도 나치와 문혁은 유사했다. 나치가 전 국민에게 라디오를 보급하면서 선전을 강화해 정권을 유지했듯이, 문혁도 1950년대 후반부터 전국에 보급된 라디오를 적극 활용했다. 분서갱유(焚書坑儒)식의 공개적 의식도 있었다. 1930년대 독일대학생협회 주도로 나치즘에 반(反)하는 서적을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분서 의식을 행했듯이, 홍위병은 명·청 시대의 유골과 서적을 공개적으로 훼손했다.



권력자가 군중 조직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그 조직이 자신을 위협한다면 바로 해체했다는 점 역시 유사하다. 독일 정규군으로 편입하려는 SA의 지도부를 히틀러가 1934년에 처형했듯이, 마오쩌둥도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1968년 홍위병을 해체해 농촌으로 보냈다. 1934년은 히틀러가 수권법을 통해 독재 체제를 구축한 해이듯이, 1968년은 마오쩌둥이 문혁으로 정치적 경쟁자 모두를 제거한 해였다.



 

4 3인의 어린 홍위병이 펜과 마오쩌둥 선집을 들고 있다.1971년 광시성 초등학교 교과서 표지.



‘남의 고통, 나의 기쁨’ 샤덴프로이데 이용대중과의 연대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대중과 전혀 소통하지 않는 것보다 민주주의에 더 부합한 행위다. 실제 나치와 문혁은 모두 초기에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나치의 군중 동원을 독일 국민의 적극적 참여로 보는 견해도 있었고, 문혁 역시 초기엔 바람직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실험이라고 언급됐다.



1968년 프랑스 ‘68혁명’ 때 학생들은 중국 홍위병처럼 마오쩌둥 어록을 갖고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장 폴 사르트르를 비롯한 유럽 지식인들 상당수는 스스로를 마오주의자로 칭하기도 했다. 문혁이 관료주의를 척결하고 만민평등을 실천한 진정한 시민혁명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한국 내에서도 문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1960년대 후반의 외국 문헌을 10년 지난 뒤 구해 읽고선 1970년대 후반과 1980년 전반에 걸쳐 문혁을 극찬해 소개했던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문혁이 끝난 이후의 평가는 ‘대혁명’이 아니라 ‘대소란’이었다는 게 중국과 국제 사회의 평가다. 중국에서는 문혁이 시작한 해(1966년)부터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4인방이 체포된 해(1976년)까지를 ‘십년동란(十年動亂)’으로 부르기도 한다.



다수 대중을 동원한 히틀러와 마오쩌둥의 방식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쪽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 말살하려 했기 때문에 반(反)민주적이었다고 평가된다. 다수 쪽이 진실·진리·도덕·선이고 소수 쪽은 그 반대라는 거짓 민주주의를 내세워 자신과 남을 선악으로 구분한 것이다. 이는 개방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줘 폐쇄적 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최근 중국에서 문혁 때가 좋았다는 목소리가 일부 나오기도 한다. 중국 내 빈부격차 증대와 부·학벌·당직의 세습이 그런 인식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반(反)엘리트주의는 일종의 포퓰리즘이다. 엘리트가 기득권층일 때도 있고 어떤 경우엔 포퓰리즘에 기반을 둔 권력자가 더 큰 정치적 기득권자일 때도 있다. 지배 엘리트 내의 경쟁에서 밀린 파벌이 대중을 끌어들이는 전략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민이 깨어 있어야 민주주의는 지속 가능하다.



 



김재한한림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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