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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온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였던 것을

가지 묘목을 밭에 심고있는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한여름에는 하루 5~6시간을 잡초 뽑는 데 보낸다고 한다.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연세대(정외과)를 졸업했다.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를 지냈고 김영삼·노무현 정부에서 두 차례 교육부 수장을 지냈다. 교육부 직원들로부터 역대 가장 존경받는 장관에 뽑혔다. 정년 후 아무 연고도 없는 강원도 고성 땅에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실천하는 우리 시대 흔치 않은 선비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에 자리한 안 전 부총리의 자택 전경.



다들 그랬다. 부총리에 장관까지 하신 분이 아무 연고도 없는 강원도 땅 그것도 휴전선 턱밑 고성에 가서 산다고 하니 얼마나 갈까 했다. 길어야 2~3년, 아니 나이를 고려한다면 1년 이내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도록 소식도 없다. 그러기를 어언 10년, 그는 철저하게 시골 사람이 되어 있었다.



[김동률의 심쿵 인터뷰] 고성서 시골살이 10년,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이쯤 하면 아는 사람은 안다. 안병영(75) 선생이다. 올해로 강원도 땅에 똬리를 튼 지 10년이다. 정말 어렵게 만났다. 서울과 인연을 끊고 사는 분을 모시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이정민 중앙SUNDAY 국장과 나는 문안 인사 겸 들렀다는 변명 아래 기습 방문했다. 정치 얘기는 않는다는 조건 아래 간신히 인터뷰에 성공했다.?



노부부의 고집을 꺾는 일이 고목나무에 꽃피우기를 도모하는 것보다 훨씬 지난했다. 그리고 선생과 나의 30년 우정이 한몫했다.



 

1 친구인 정현종 시인의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 서재 벽에 걸려 있다.



-10년이 다 됐다. 고향이 이북이신가? 하필이면 휴전선 접경 고성 땅에 터를 잡으셨나? “서울 토박이다. 아내가 개성 출신이지만 고성과는 거리가 있다. 정년이 가까워오면서 서울 탈출을 꿈꾸었다. 서귀포·남해 등 따뜻한 남쪽을 고려했다. 그런데 나보다 일찍 은퇴해 속초에 살고 있던 친구가 속초를 ‘강추’했다. 처음에는 속초시내 작은 아파트를 빌려 살았다. 설악이 내 맘을 강렬하게 끌어당겼다.”



-산이 좋으신가? “산에 가면 심신이 즐겁다. 산에서는 세상만사가 부질없게 여겨지고 온갖 시름이 순간 사라진다. 좌절·분노·우울·낭패감 등 어두운 그림자들이 사그라지고 희망과 자신감이 솟는다. 산은 평등하다. 부자와 빈자, 잘난 이와 못난 이가 따로 없다. 서울에 살 때도 누가 산에 가자고 연락 오면 만사를 뒤로 미루고 산행에 나섰다. 아니 산에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심쿵심쿵’이다.”

2 뒷마당에 옹기종기 놓여 있는 장독대의 풍경이 정겹다.



-그런데 지금은 시내 아파트가 아니라 단독주택이다. “아파트에 살다 보니 가끔 서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완벽한 촌사람이었다. 그래서 값싼 고성에 땅을 구입해 집을 지었다. 설악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내가 건축가 못잖은 내공을 지녔다. 우리 내외가 정성을 다해 집을 지었다. 대처에서 건축자재도 직접 구입했다. 집이 자식 같다. 창밖을 봐라. 울산바위의 웅자(雄姿)가 손에 잡힐 듯하다.”



-왜 내려오셨나? “내가 내 생활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돌이켜 보면 서울에서 늘 사회적 약속에 허덕이며 살았고, 스케줄에 쫓겨 살았다. 체면 때문에, 남과 척지지 않으려고 싫은 일도 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인 적이 많지 않았다. 여기서는 다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마음에 내키는 일을 내 의지대로 하고 산다. 체면이나 하찮은 명예는 상관할 필요가 없고, 뿌리 깊은 연고의 늪에서도 해방된 느낌이다. 나의 유일한 취미인 산행도 하고 농사도 짓고. 서울에 산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을까. 물리적 거리는 심리적 거리를 만든다. 서울에 있으면 ‘정치’도 너무 가깝게 보이고 그래서 가끔 앙앙불락했다. 얼마간 떨어져서 보면 조금은 ‘저 너머 동네 일’처럼 느껴진다.”

3 부인 윤정자씨가 사모은 그림과 고가구들이 거실 한편을 장식하고 있다.



-다들 시골에 살면 외롭다고 한다. “많이 받는 질문이다. 외롭지 않으냐고. 또 밤낮 그 산, 그 바다를 보면 지루하지 않으냐고.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잘 지낸다. 현대인은 명동 한가운데서도 외롭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그런 실존적인 얘기가 아니다. 여기서도 나름 바쁘다. 산행 코스만 해도 끝이 없고, 알량한 전공 공부에 쫓겨 못 읽었던 소설과 시들도 그리 많을 줄 몰랐다. 사색하기, 음악 듣기, 자신과 대화하기에 바쁘다. 텃밭 농사도 장난이 아니다. 맞다. 가끔 외롭다. 그러나 그 외로움은 아련한 향수를 자아내기 때문에 오히려 감미롭더라. 나는 늘 검박한 삶, 그러면서 아름답고 품격 있는 삶을 갈구하며 살아 왔다. 이것들은 자연에 가까이 할 때만 가능하다. 대도시의 삶 속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 왔다.”



-서울은 자주 가시나? “어쩔 수 없이 가끔 간다. 가도 가능하면 일만 보고 돌아온다. 마치 자칫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갈 것 같아서 괜히 불안하다. 서울의 분답(紛沓) 속에서 나 자신을 잃으면 그때는 다시 나만의 행복한 시간으로 영영 되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이곳으로 내려온 후 가까운 친구가 많이 다녀갔다. 그러면 으레 자기들도 이런 데서 살고 싶다고 하고, 더러는 꼭 실행하겠다고 근처 땅값을 묻기도 한다. 그러나 돌아가서는 항상 똑같은 얘기다. ‘안 되겠어. 같이 내려가자니 마누라가 당장 이혼하자네. 그건 그렇고. 자네 그 외진 데서 어떻게 살아. 나는 사흘도 못 견뎌.’ 그러면 나도 장난기가 발동해서 정호승의 시 한 구절로 근사하게 대답한다. ‘외로우니까 사람이지. 외로운 게 얼마나 감미로운데.’”



-그러고 보니 탈 서울 10년, 이제 학자라기보다는 농사꾼의 느낌이 물씬 난다. “농사일 쉽지 않다. 사연이 많다. 집 앞 앵두나무는 제법 풍성한 수확도 거뒀는데 이태 전 태풍에 죽더라. 연전 양양 5일장에서 사온 감나무도 끝내 모진 겨울을 견디지 못했다. 나무마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멀쩡하던 나무가 죽으면 그와의 첫 인연까지 복기(復棋)되어 안타깝다. 그래서 모진 겨울을 나지 못하고 죽은 나무도 뽑아내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장난 삼아 혼자 ‘전사자 묘역’이라고 이름 붙이고 아침저녁 물 줄 때도 의례(儀禮)처럼 그놈들에게도 물길을 보낸다. 식품이 생산되어 식탁에 오르는 데 소요된 거리를 푸드마일리지(food mileage)라고 하더라. 그런데 내 경우 음식의 대부분이 텃밭에서 손수 재배한 싱싱한 야채와 과일이니 푸드마일리지는 제로에 가깝다. 흔히 계절과 지역의 특성에 맞는 에너지를 섭취하는 게 최고라고 한다. 식품을 제철에 텃밭에서 손수 가꾸어 먹으니 매우 행복하다. 사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육체노동의 역사였다. 나는 평생 책상머리에서 정신노동만 하며 살아 왔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 먹거리는 스스로 수확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 시골에 살면 적어도 여름에는 반자급자족 수준의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더구나 나 같은 연금생활자에게는 시골살이가 딱이다.”



-농사가 쉽지 않다고 들었다. “어렵다. 나훈아의 ‘잡초’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잡초가 골칫덩이다. 잡초가 맹위를 떨치는 여름 한철에는 적어도 하루 대여섯 시간은 잡초 뽑는 데 시간을 보낸다. 긴 가뭄 뒤에 비가 오면 반갑기 그지없으나, 비 온 후에 더 기승을 부릴 잡초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땡볕에 쭈그리고 앉아 잡초와 씨름하다 보면 내가 이 짓을 하려고 왔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2, 3일만 소홀히 해도 농토가 온통 잡초 천지이니 어쩔 수 없다. 그들과의 전투가 일상사가 되었다.



실제로 호미로 잡초 캐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앉았다 일어났다 계속 움직이며 잡초를 캐자면 무릎 관절과 허리에 적잖은 부담이 온다. 요사이 농촌에서는 밭 매는 아낙들이 엉덩이에 부착해서 움직일 때마다 덜렁덜렁 따라 이동하는 스티로폼 의자를 많이 사용한다. 보기엔 우스꽝스럽지만 매우 유용하다. 그런데 나는 다리통이 커서 간이의자로만 사용한다. 여름철 땀이 많이 나면 온갖 날벌레가 몰려들어 괴롭힌다. 언젠가 잡초를 뽑다가 벌에게 왼쪽 눈두덩을 제대로 쏘였다. 순식간에 눈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얻어터진 ‘록키’처럼 얼굴이 달라지니 우리 집 강아지까지 놀리며 마구 짖어댔다. 잡초도 세상 어디 또 누구에게는 꼭 필요한 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잡초를 꼭 뽑아야 할 경우 나름대로 얻은 교훈을 공유할까 한다.



첫째는 인내와 끈기로 임하자. 잡초 제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하면 그런대로 해 볼 만한 싸움이다. 방심과 게으름, 미루기는 금물이다. 매일 전사(戰士)처럼 결의에 찬 모습으로 싸움터로 나가자. 잡초가 뿌리를 깊게 내리기 전에 선제공격하자. 매일 하는 것, 하루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왕도다.



둘째,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농사를 그만두지 않는 한 잡초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 이왕 해야 할 것이면 즐겁게 일하는 게 상책이다. 누구는 잡초를 두고 ‘아직 약효가 검증되지 못한 약초’라며 옹호한다. 그래서 이제는 잡초와 친해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 친해지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숙제다.”



-와, 잡초 관련 책을 쓰셔도 되겠다. 상당히 철학적인 접근이다. 농사도 짓지만 본업은 학자가 아닌가?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사꾼으로 지낸다. 늦봄부터 여름, 초가을까지는 햇빛 때문에 새벽 농사일이 필수다. 새벽일을 마치고, 낮 시간에는 잠을 자거나 책을 보다가 저녁 무렵 다시 밭에 나간다. 300평이지만 두 노인이 하기에는 힘에 부칠 때가 많다. 긴 겨울에는 책을 보고 글을 쓴다. 여기 와서도 『왜 오스트리아 모델인가』 등 서너 권의 책을 냈다. 눈 내리는 겨울 밤, 글을 쓰며 벽난로의 장작 타는 소리를 듣는다. 사방이 적요해 내 숨소리까지 크게 울린다. 산골 사는 매력이다. 멀리서 여우 우는 소리라도 들리면 더욱 좋으련만.”



-다들 귀거래사를 꿈꾸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실제로 행하기를 두려워한다. “맞다. 그동안 많은 지인이 ‘시골살이’에 대해 내게 물어왔고, 또 더러는 직접 이곳을 찾아 살펴보고 가기도 했다. 적지 않은 관심을 피력했지만 주변에 ‘탈(脫)서울’을 감행한 사람은 없다. 내가 서울을 떠날 때 모두가 2년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올 것으로 짐작했다. 그런 그들도 이젠 내가 ‘이곳 사람’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많은 사람이 고독·외로움·소외감 등 심리적인 어려움도 걱정한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심각한 문제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서 세상 사는 재미를 찾은 이에게는, 황혼 무렵 서산에 걸린 저녁노을을 홀로 바라본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이가 자연과 교감하면서 내면적 충일(充溢)을 만끽한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탈 서울을 실제로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당장이라도 하고 싶은데 집사람이 절대 반대라서’가 가장 많더라. 그러면서 부인이 ‘늘그막에 영감 없이는 살아도 친구 없이는 못 산다’라든가 손자 재롱, 쇼핑 재미, 고급 문화에 대한 미련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서울 떠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아예 시골 가기를 포기하는 게 맞다. 어렵사리 부인을 설득하더라도 약발이 오래 가기 어렵다. 다음은 건강 및 의료 걱정이다. 지병이 있거나 잔병치레가 끊이지 않아서, 혹은 만약의 위급한 사태가 걱정돼 큰 병원이 있는 도시를 떠날 수 없다고 한다. 맞다. 건강 걱정을 머리에 달고 다니는 사람에게 시골행은 무리다. 그러나 이 경우 재고의 여지는 있다. 실제 의학적으로 검증된 장수(長壽)의 세 가지 요건은 운동과 음식, 그리고 조기 검진인데, 따지고 보면 시골은 운동과 음식 등 섭생에는 최적의 조건이고 조기 검진은 마음의 문제이지 거리의 문제가 아니다. 또 보안과 연관된 불안감이 자주 제기된다. 시골 외진 곳에 살면 범죄에 무방비가 아니냐는 얘기다. 당연한 걱정이라고 본다. 그러나 실제로 지방 소도시나 산촌의 경우 좀도둑은 있어도 강력범은 거의 없다. 보안업체 도움을 받으면 이 문제도 그리 심각하지 않다.”



-시골살이의 실질적인 장점은 무엇인가. “경제적으로 매우 유리하다. 한국 노인 대다수가 ‘100세 시대’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채 노령기에 접어들었다. 물가가 비싸고 소비 수준이 높은 대도시에서 여생을 보낸다는 것은 무척 버겁다. 시골에 살면 의식주 부담은 확 줄어든다. 생활비를 낮추면서 삶의 조건을 크게 개선하고 만족도도 높일 수 있다. 또 자연의 혜택을 들 수 있다. 신선한 공기, 맑은 물, 흙은 우리 삶의 원초적 바탕을 건강하게 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최상의 먹거리, 볼거리, 일거리를 제공한다. 그뿐인가. 농촌에는 도시가 토해내는 소음과 공해, 갈등과 경쟁 대신 평온과 순리, 정신적 여유와 평화가 감돈다. 나는 ‘익명성’을 무척 좋아한다. 익명은 사람을 자유롭고 편안하게 만든다. 이런 외진 시골에 살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묻혀 살 수 있어 너무 좋다. 자연은 무엇보다 지식인이나 예술가에게는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도시에서 쫓기고 부대끼면서 마지못해 해야 하는 작업 속에서 우리는 ‘정석 풀이’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그런데 자연은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신비에 가까운 생명력을 선사한다. 관조와 명상, 상상력과 통찰력을 일깨우고 대안과 초월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시골에 살면서 매일매일 생각하는 방법을 새롭게 터득하고 있다.”

4 안 전 부총리가 거실 한가운데에서 포즈를 취했다. 유리창으로 덮은 천장이 흰 벽사이의 커다란 창들과 조화를 이룬다. 오상민 기자



-일생 동안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지나간 꿈이 되고 말았지만 ‘사상계’와 같은 지식인 잡지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1953년 창간되어 60년대 말까지 우리 민족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한 매거진이다. 나와 같은 4·19 세대에게는 정신적 젖줄이었다. 4·19는 ‘사상계의 아들’과 같다. 한국 사회의 난맥상은 ‘사상계’와 같은 지성지가 없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말씀드리기 그렇지만 선생께서도 이제 인생의 황혼기다. “황혼기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우리 세대는 모진 세월을 숨 가쁘게 꾸역꾸역 살아 왔다. 전형적인 농업사회에서 태어나 산업사회와 후기 산업사회를 겪었고, 일제와 건국의 소용돌이, 한국동란을 거치며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의 주역으로 뛰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환희와 좌절, 영욕이 교차했고 때로는 생사를 넘나드는 절체절명의 순간도 적지 않았다.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 친구의 글에 가까운 친구들이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 너무 많다고 했다. 그 글을 접하며 옛 친구들이 이제 이승과 저승에 고르게 포진해 있구나 생각했다. 이들 한 명 한 명의 생애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아마도 그들 개개인도 하나같이 굴곡진 시대와 거센 세파에 시달리며 실로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으리라. 이미 죽어간 친구들은 자신들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병석에 있는 친구들은 또 얼마나 외롭고 허전할까. 인생이 생로병사라는데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남은 것은 병(病)과 사(死)밖에 없다. 다만 병과 사의 틈 사이에서 쥐꼬리만큼 여생을 가치 있고 보람되게 좀 더 존엄하게 엮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끔 생각해 본다. 지나 온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였다고.”



선생과 나는 격동의 80년대 후반 처음 만났다. 스무 살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시대의 고민과 삶에 대해 얘기하고 가끔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면서 30년을 함께해 왔다. 나를 배웅해 주는 선생 내외분의 한층 더 하얘진 머리카락이 봄볕에 눈부시다. 목련꽃 피는 언덕에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어야 하는 박목월의 4월이 저만치 떠나가고 있다.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yule21@empas.com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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