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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김도연·최순주 “미 연준에 무료 컨설팅” 의기투합

1949년 봄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트루먼 대통령을 예방한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기독교 신자). 뒷줄에 서있는 사람은 장면 주미대사(왼쪽, 가톨릭 신자)와 백악관 출입 목사(오른쪽)다. 미국이 한국의 장래에 무관심하다고 생각한 이승만 대통령은 한편으로는 저항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까지 끌어들여 미국의 관심을 호소했다. [사진 트루먼대통령 기념관]


인간 사회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다. 남들의 갈등관계를 이용하면 나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도 있다. 이를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한다. 상해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 선생이 1945년 11월 환국(還國)했을 때 존 하지 미군 사령관이 “김구는 남한의 정치 상황에서 국을 끓이는 데 소금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하지의 이이제이다. 이승만과 김구를 경쟁시켜 자기 입맛대로 국정을 요리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반도에서 미군 철수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전 중인 중국이 공산화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뉴욕의 한 민간연구소가 이이제이 전략을 제안하면서부터다. 일본에 대한 전쟁배상 요구를 줄여 일본이 다시 중국과 경쟁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스트라이크 보고서’, 48년 2월).


그러자 미국 정부가 윌리엄 드레이퍼 육군부 차관을 일본으로 파견했다. 은행 임원 출신인 드레이퍼는 현지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서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드레이퍼 보고서’, 48년 3월). 일본 경제의 부흥을 통해 아시아 경제를 부흥시켜야 한다는 그 보고서의 결론에 따라 대일 배상요구액이 대폭 축소됐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아시아 전략은 한일 국교정상화를 통해 두 나라의 이해를 하나로 묶고 중국을 공동 견제토록 하되 한반도에서 소련과 직접적인 군비경쟁은 피한다는 쪽으로 수정됐다. 49년 4월 트루먼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를 승인했다(‘NSC-8 보고서’). 훗날 김일성을 오판하게 만든 비극의 단초였다.


이승만은 이런 흐름이 못마땅했다. 주한미군 철수는 대한민국의 생존과 직결된다. 또한 일본을 산업화하는 데 역점을 두면서 한국과 대만을 일본의 단순 공산품 시장으로 육성하려는 미국의 전략은 과거 일본이 꿈꿨던 대동아공영권의 부활에 불과하다. 그래서 몽니를 부렸다. 미 군정청이 물려준 조선환금은행을 49년 2월 단숨에 해체하고 조선은행에 흡수시킨 것이 한 예였다.


 

김도연 재무장관이 연준 의장에게 보낸 편지. 오늘날 한국은행 설립의 출발점이지만, 궁색한 국내 실정을 장황하게 설명하며 공짜 컨설팅을 구걸하는 눈물겨운 기록이다. [사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번즈, 이 대통령의 산업부흥계획 지지이승만이 보기에는 물가안정보다 경제재건과 자립경제 건설이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48년 정부 수립 때부터 장기 발전계획을 담당하는 기획처를 만들고 49년에는 ‘산업부흥 5개년계획’도 수립했다.


하지만 트루먼 행정부가 보기에는 농업이 경제의 거의 전부인 한국이 산업화를 추구하는 것은 과욕이었다. 그로 인해 재정적자가 확대되면, 결국 돈을 찍어 해결하게 되면서 인플레이션이 고착된다. 일제 말기부터 이미 만성적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의 악순환은 계속되고 있었다. 경제협력처(ECA)는 50년 재정긴축과 통화축소에 초점을 맞춘 ‘경제안정 15원칙’을 요구했다. 가장 가난한 나라에게 ‘축소지향적 균형’을 처방한 것이다. 49년 초 현대식 중앙은행 설립 제안도 같은 맥락이었다.


당시 ECA 한국지부장이었던 아서 번스(Arthur C. Bunce)는 미 연방준비제도(Fed) 국제부 직원이었다. 그는 20년대 말 기독교청년회(YMCA)의 초청으로 선교를 위해 조선에 들어와 6년 간 함흥 지역에서 처참한 농촌 상황을 목격했다. 해방 후 미 재무부는 그를 ECA 남한 책임자로 임명했다. 번스는 존 하지 중장과 생각이 크게 달랐다. 모든 문제를 냉전논리로 파악하려는 하지 사령관은 공산주의자들의 선동 때문에 남한이 혼란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 실정을 잘 아는 번스는 그것이 일제 때부터 누적된 사회경제적 모순의 결과라고 파악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책들을 제안했다. 오늘날 우리 헌법(제119조 제2항)에 명시된 ‘경제민주화’ 정신이었다.


예를 들어 번스는 평년 소출액의 30%를 농지 매각대금으로 하고 농민들이 15년에 걸쳐 정부에 상환토록 하는 농지개혁안을 제안했다. 하지 중장은 이를 북한식 무상분배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고 ‘번스의 바보짓’이라며 무시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부담스럽기는 했다. 그러나 하지와 갈등을 빚는 번스의 농지개혁안을 경청하고, 50년 결국 그의 제안대로 실행했다. 중앙은행 설립 제안에도 호감을 보였다. 그것이 이승만의 이이제이였다.


 


재무부·조선은행 한국은행법 마련 나서굳이 ECA의 권고가 아니더라도 일제가 만든 조선은행 체제를 극복하고 현대적 중앙은행을 세우는 것은 시급한 과제였다. 47년 1월 남조선과도정부가 출범할 때 재무부 이재국에 중앙은행과를 신설하고 중앙은행법 연구에 착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공무원 정원 3분의 1 감축 계획 때문에 지연되고 있었다.


현대식 중앙은행 설립이 늦어져 가장 조바심이 난 것은 조선은행이었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 조선은행이 해체되는 꼴을 보았기 때문이다. 조선은행은 자신이 주인공이 된다는 가정 하에 정부·금융기관·민간이 공동출자해 ‘국립조선중앙준비은행’이라는 중앙은행을 세우고, 주주에게 연 6%의 배당을 지급하는 시나리오를 제안했다(‘신조선중앙은행 시론’, 조선은행월보 47년 5월호). 여기에 자극을 받은 과도정부 재무부 직원들은 즉각 ‘금융법규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중앙은행법 제정을 서둘렀다. 그래서 나온 것이 ‘금융법규대강안’이라는 보고서였다.


 

2·8 독립선언을 주도했던 조선청년독립단과 김도연(가운데 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그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대학교(석사)와 아메리칸대학교(박사)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거의 모든 점에서 지향점이 반대였던 조선은행과 재무부의 경쟁은 훗날 지독하게 이어질 한국은행법 논쟁의 시발점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취임한 김도연 재무장관은 재무부 보고서를 읽고 혀를 찼다.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히틀러를 흉내내 42년 개정한 일본은행법을 모델로 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그 법은 49년 6월 폐기되었다) 김도연은 일본 유학시절 ‘2·8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했다가 옥살이를 마친 뒤 이를 악물고 다시 미국 유학을 떠났던 독립운동가다. 그런데 새 나라의 재무부 부하직원들은 군국주의의 유물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는 것 아닌가.


그런 실망은 최순주 조선은행 총재도 마찬가지였다. 48년 10월 취임 직후부터 ‘특명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중앙은행법 연구를 촉구했으나 부진했다. 여기 저기서 입수한 자료를 참고해서 미국과 영국의 중앙은행 제도를 베꼈지만 굉장히 어설펐다.


 


맥케이브 의장에 “직원 파견해 달라” 편지김도연과 최순주는 연희전문학교 경제학과에서 동료 교수였다. 유학 시절에도 워싱턴(김도연, 아메리칸대학교)과 뉴욕(최순주, 뉴욕대학교)을 오가면서 자주 어울렸다. 절친했던 두 사람은 제대로 된 중앙은행을 만들려면 결국 외국 전문가를 불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재무부 이재국에 중앙은행과를 설치하고 조선은행 직원을 투입키로 했다. 조선은행에는 일본 유학을 마친 고급인력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합의에 따라 조선은행의 한상원 검사역(훗날 한은 수석부총재)이 차출되어 중앙은행과장으로 임명됐다.


남은 문제는 외국인 초빙이었으나, 용역비 지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외환사정이 워낙 열악하여 미화 500달러를 넘는 경비는 대통령이 직접 승인하던 시절이었다. 고민하던 김도연은 1년 전 만났던 타마그나(Frank M. Tamagna) 박사의 말을 떠올렸다. 김도연과는 아메리칸대학교 동문이었던 그는 자신이 공무원 신분이라서 일본이나 한국을 가더라도 용역비를 못 받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Fed 직원을 부르면 되지 않는가. 내친 김에 연준 직원들의 교통비는 ECA의 번스에게 부탁했다. 한국 체류기간 중 숙식비는 조선은행의 최순주 총재에게 맡겼다. 대한민국 정부 최초의 컨설팅 사업을 공짜로 진행하게 된 김도연은 Fed 의장에게 보낼 편지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대통령을 찾았다.


대통령에게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이승만은 프린스턴대학교 박사고, Fed는 그 대학 총장 출신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세운 기관이다. 이승만의 논문 지도교수 에드워드 엘리어트(Edward Elliott)는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FRB) 설립 당시 초대 사외이사였다. 대통령은 편지를 쓱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 2명만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는 김도연의 편지는 얼마 후 Fed에 도착했다. 맥케이브(Thomas B. McCabe) 의장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었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hyeonjin.cha@b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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