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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부탁 받고, 유력자에게 모른척 져준 슈사쿠

1682년 명인 도사쿠가 류우큐우의 소년 기사 페에틴하마히카(親雲上濱比賀)에게 2단을 인정하면서 발행한 최초의 국제 면장(免狀). [사진 일본기원]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보는 삼국시대 오나라 손책(孫策)과 여범(呂範)이 두었다는 바둑이다. 삼국시대는 2세기 말∼3세기 초 위-촉-오의 시대. 여범(?~228)은 손책(175~200)의 막료. 자그마치 2000년 전이다.


일본은 어떤가. 1253년 정월 마쓰바야(松葉谷) 소안(草庵)에서 두어졌다는 바둑이 있다. 니치렌 쇼닌(日蓮上人, 1222~1282)과 그의 제자 요시죠 마루(吉祥丸)가 두었다.


당연히 의심이 간다. 두 기보 모두 위작이 아닌가하고. 하지만 문제가 있다. 무엇을 증거로 해서 위작이라고 할 것인가. 누구나 제시하는 반론은 대국 시간과 기보가 등장한 시간 사이에 큰 간격이 있다는 것이다. 손책의 기보는 둔 다음 1000년이나 지나서 나왔다. 12세기 초 북송(北宋) 휘종(徽宗 재위 1100~1125) 때 이일민(李逸民)이 편집한 『망우청락집(忘憂淸樂集)』에 처음 등장한다. 일본의 기보는 1828년 발간된 10쪽짜리 목판본 『고키(古棋)』에 등장한다. 575년이 지난 다음이다.


먼저 일본의 기보(아래)부터 보자. 내용을 훑어보니 두 대국자의 실력이 적어도 아마 6단은 되겠다. 아니다. 그 이상이다. 흑1,3이 절묘한 수순이다. 다음 흑A-백B-흑C를 남겨둔다. 흑1을 3에 먼저 끊으면 백은 백C 흑1 백a로 양보할 것이다. 놀랍게도 대국자 실력은 차이가 없다. 그런데 대국 당시의 나이는 니치렌은 32살이고 제자는 9살.


가마쿠라(鎌倉) 불교의 대표자로서 굴곡 많은 인생을 보낸 니치렌은 12살에 절에 들어가서 16살에 출가했다. 문제의 1253년, 포교에 나아가면서 그가 던진 첫마디는, “법화경이야말로 말법에 있어서 절대적인 구원”이라는 확신에 찬 정토교 비판이었다. 포교에 열성이었고 배타성이 강했던 그가 바둑 배울 시간이나 있었을까. 분명히 후세의 위작(僞作)이다.


일본의 혼인보(本因坊)와 이노우에(井上)는 니치렌종(日蓮宗) 승적(僧籍)에 연원을 둔 바둑 가문이다. 니치렌종의 종조(宗祖)가 바로 니치렌이다. 이 때문에 이노우에 가문이 기보를 만들었으리라는 설도 있다.


 


중국 가장 오래된 기보는 위작중국의 기보는 초반만 남아 있는데 수순이 질서정연하다. 너무나 모범적이다. 실제 우리는 바둑을 그리 두지 않는다. 반상은 너와 나의 싸움터.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손책의 기보 또한 위작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에 손책의 기보는 중국의 바둑에 대해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12세기 당시는 포석을 그렇게 했으리라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매우 사랑스러운 위작이다.


위작 여부만이 아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하더라도 기보를 보면 어떤 관념으로 두었는지도 알 수 있다. 몇 년 전 한국기원은 ‘한국바둑사’ 집필을 두 명의 역사학자에게 부탁했다. 기대와 달리 초고는 문제가 많아 도저히 자료로 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우왕좌왕한 수준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가 있었다. 바둑을 몰랐던 것이다. 예를 들어, 2000년대 들어와 한국의 바둑계가 어떤 분위기인가를 말할 수 있으려면 두 가지 종류의 데이터를 검토해야 한다. 하나는 기전이나 바둑 인구, 기사의 활동 같은 사회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보와 기사들의 개성과 기풍이다.


 

기보 흑1·흑3은 수준 높은 맥이다


기보만 생각하자. 만약 바둑계가 실제로 흥왕하고 있다면 바둑 내용은 활기찰 것이다. 논리는 이렇다. 바둑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높아지면 바둑 한 판에 대한 가치도 높아진다. 그러면 한 수 한 수에 대한 가치도 높아진다. 그러면 당연히 대국자는 한 수 한 수에 자신의 노력을 더한다. 활달한 기상도 신선한 착상도 더해진다. 아쉽게도 2000년대 들어와 한국의 바둑은 개성이 뚜렷하지 않고 침체된 인상을 많이 주고 있다.


기보는 중요하다. 사회적 자료는 자칫 선별하는 이해에 의해서 편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반상엔 편견이 통용되지 않는다. 기보는 시간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속기로 둔 바둑은 감정과 흥분이 수순 속에 살아있다. 수순을 따라가 보면 감정이 즉각적으로 전해진다.


프로의 수준이면 반상이 둥글게 보인다고 하겠다. 그 어느 부분에서도 수를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통제할 수 있다는 통제감-에서 전체가 한 눈에 잡히는 것이다. 반상을 통제할 수 있기에 프로에게 “정석이란 없다”고 할 수 있다.


흥미있는 일화가 있다. 20년 전 조남철 선생에게 들은 것인데, 1960년대 중반 정구영 공화당 의장과 조선일보에서 대담하던 중이었다. 조 선생이 “바둑에서 정석은 사회의 법률이랄 수 있는데, 사실 바둑에 정석이란 없다”고 하자 정구영 선생이 펄쩍 뛰면서 “이 사람, 큰 일 날 소리 하네” 하더라는 것이다.


 

후대에 기성(棋聖)으로 추앙 받고 있는 슈사쿠(秀策)의 초상.


명인 죠와(丈和)는 유력자 세키야마 센다이우(關山仙太夫)와 지도 바둑을 두러 떠나는 제자 슈사쿠(秀策)에게 “세 판에 한 판은 져 드려라”고 당부했다. 센다이우는 슈사쿠에게 선(先)접히는 프로급이었다. 그러니 모른 척 져주는 것도 무지 어려운 일. 하지만 20국을 두어 슈사쿠는 13승 7패로 마무리했다. 그처럼 프로는 반상에 자신의 의도를 고의로 숨기기도 한다. 슈사쿠를 연구했던 이시다 요시오(石田芳夫) 9단은 “찾으려고 하면 슈사쿠가 어디서 져주었는지, 그 부분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일부러 남기는 경우도 있다. 1702년 도사쿠(道策)는 13살 도치(道知)를 혼인보(本因坊) 가문의 후계자로 정했다. 그리고 제자인 이노우에 가문의 인세키(因碩) 4세에게 당부했다. “내가 죽거든 너는 도치의 후견인이 되어 장차 명인이 되도록 키워주라. 너를 준명인(準名人·8단)으로 올린다. 대신 넌 명인은 되지 말라.” 인세키는 서약서를 썼다.


인세키는 유언을 충실히 따랐다. 이노우에 가문에서 나와 혼인보 가문에서 도치와 함께 지냈다. 도치도 재능이 있어 1706년엔 5단이 되었다. 도치가 독자적으로 앞길을 열어갈 실력이 되자 1707년 후견인에서 물러났다. 이노우에 가문으로 돌아갔다.


1710년 11월, 인세키는 규슈(九州)의 지방 영주로부터 서신을 받았다. “류우쿠우(琉球·지금의 오키나와(沖繩)로 당시엔 독립국)에서 온 사절단이 있다. 그 일행 중에 15살 소년 기사 야라노사토노시(屋良里之子)가 있는데 바둑을 두어보고 싶다 한다. 방문해 주겠는가.” 1682년 도사쿠도 류우큐우 기사 페에틴하마히카(親雲上濱比賀)와 3점 접바둑을 둔 전례가 있었다. 그래서, 당국의 허락을 받아 도치로 하여금 3점 접바둑을 두게 했다. 문제는 여기서. 소년이 귀국하면서 3단 면장(免狀)을 신청한 것이다. 하지만 면장 수여는 명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인세키는 다른 가문과 의논했다. “혼인보는 이제 7단. 갑자기 명인으로 뛰어오를 수는 없지요.”“나는 명인을 바라지 않네.”“하지만 서약서 당시와는 다르지 않습니까.”“실은 오늘도 당국이 말하기를, 국교(國交)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명인에 취임하라네.”“하시지요. 혼인보 도치가 명인을 청원하는 방식이 좋겠습니다.”


공은 도치에게 넘어갔다. 도치는 은애와 의리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지만 기꺼이 찬성했다. 약속은 있었다. “면장을 준 다음에는 곧 은퇴한다.” 인세키는 명인이 되고 면장을 발행했다. 그러곤… 1719년 죽을 때까지 10년을 명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혼인보 가문에서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도치는 참았다. 물론 인세키는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관록에서나 실력에서나. 인세키는 바둑 역사상 가장 어려운 책인 『발양론(發陽論)』을 비롯해 책도 7권이나 썼다. 『발양론』은 요즘도 프로가 되기 위해서는 꼭 통과해야만 하는 고전이다.


 


압력에 밀려 실력 발휘 자제인세키가 세상을 떠난 뒤 도치는 명인 추대의 약속을 기다렸다. 하지만 다른 세 가문은 도무지 말이 없었다. 마침내 도치는 한 마디 했다. “좋다. 나도 생각이 있다. 앞으로 어성기(御城碁, 장군의 면전에서 두는 최고의 공식 시합)에서 가차 없이 실력을 발휘하겠다.” 다들 떨었다. 실력이 드러나면 체면은 물론이고 은퇴까지 고려해야 했다. 세 가문은 얼른 항복했다. “우선 8단에 추천할 테니까… 승부는 예전처럼 해 달라.” 도치는 1720년 11월 8단으로 승단했고 1721년 4월 명인에 올랐다. 도치는 술회했다. “10년이 늦었구나.” 도치는 1727년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흥미로운 기보가 남아있다. 1720년 11월 17일 어성기에서 도치가 7단 인세키(因碩) 5세에게 236수만에 백으로 빅을 거둔 바둑이다. 도치는 예전처럼 담합해 세 가문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또 역사에 자신의 입장을 알리고자 했다. 바둑은 스승 도사쿠가 1697년 8월 12일 제자 쿠마가이 본세키(熊谷本碩)와 둔 연습 바둑(백 1집승 242 끝)을 빌려와 만들었다. 146수까지는 두 바둑이 똑 같은 수순을 밟았다. 그러곤 147수부터 다르게 두어 빅으로 만들었다. 이길 수 있는 바둑을 빅으로 했다는 것을 증거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정치와 마찬가지로 바둑에서도 승부는 경계를 어떻게 세우는가에 의해 좌우되곤 한다. 참여자의 범위가 좁을 때엔 담합이 보통이다. 국회 내 위원회가 그런 세계다. 도치의 시대엔 관(官)과 4대 가문 그리고 후원자가 바둑 세상의 전부였다. 좁은 세계라 압력이 강해 도치도 실력 발휘를 자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용직 객원기자·전 프로기사moon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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