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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들에게 내가 번 돈 내가 다 쓰고 간다고 했다

최정동 기자


한 사나이가 있다. 성장기를 어렵게 보냈다. 지방의 명문중을 졸업했으나 기울어진 집안 사정으로 진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 상경했다. 갖은 고생 끝에 매출 4000억원(지난해 기준)에 국내외 종업원 5000명의 중견기업 오너가 됐다. 이른바 ‘스몰 자이언트’다. 그의 사업은 사람들이 꺼리는 재질이다. 누구는 인류의 역사를 바꾼 발명품이라고 치켜세우지만 적잖은 사람이 하찮게 본다. 플라스틱이다. 그는 오랜 세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플라스틱과 씨름해 세계적인 기업을 일궜다. 그런 그가 이제 새로운 일을 벌이고 있다. 굳이 따진다면 인공적이고 화학적인 플라스틱과는 대조적인 일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투자다. 그는 최근 사재 20억원을 들여 공익법인 아시아발전재단을 출범시켰다. 연차적으로 500억원 규모로 확대한다고 한다. 중견기업으로서는 놀라운 규모다. 그는 이 재단을 통해 아시아적인 그 무엇을 함께 고민하고 나아가 인간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일도 해 보겠다고 나섰다. 김준일(64·사진) 락앤락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많은 사람이 김 회장을 두고 특별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묘한 기업인으로 알고 있더라. “그런가. 나는 늘 내면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왜 태어났는가 등등 궁금한 게 많았다. 정말 귀중한 것은 무엇일까. 인류가 놓치고 있는 것은 또 무엇일까. 지난 20년간 껴안고 온 화두였다.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숫자 3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사람들은 대개 이분법적(dichotomous)으로 생각한다. 나와 남, 적과 동지, 남과 여, 위와 아래, 음과 양 등…. 그러나 나는 제3의 그 무엇에 대해 관심이 크다. 나와 남을 비교하는 데서부터 인류가 망가진다. 3이란 숫자가 그래서 중요하다. 진선미·지덕체·천지인·색향미 등 3의 비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이 세상에 제3의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초(超)지성적인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젊을 때는 강원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갈까 고민도 많이 했다. 가족들이 말려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저잣거리에도 진리는 있다는 말로 스스로 위로해 가며 살고 있다. 이런 생각을 계속하다 보니 노장사상에 마음이 끌리더라. 『도덕경』을 많이 읽고 단전호흡·기수련도 열심히 했다. 심지어 『천부경』도 끌어안고 고민해 봤다. 그러나 아직도 뭐가 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듣는 사람도 이해가 안 간다. 화제를 옮겨 보자. 아시아발전재단, 중견기업이 떠맡아하기에는 타이틀이 너무 거창하다. 엄청난 아시아를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듣고 보니 좀 거창한 것 같다. 아시아라고는 했지만 동북·동남아시아권을 얘기한 것이다. 러시아·중국·일본·한국 등 동북아시아권의 다양한 교류를 통해 뭔가 공통적인 그 무엇을 찾아보자는 목적이 있다. 둘째는 동남아시아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서로 도와가며 상생하자는 것이다. 셋째는 국내 다문화가정에 대한 정성스러운 지원을 꿈꾸고 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나. “어렵게 사업을 해 왔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플라스틱을 껴안고 평생을 씨름해 왔다. 그리고 사업의 많은 부분을 베트남·미얀마·라오스 등 아시아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성공은 어렵다. 또 동북아시아 4개국은 늘 아웅다웅해 왔다.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미래를 함께 도모하자는 것이다. 덧붙여 국내 다문화가정에 대한 이슈는 모두 공감한다. 이 문제를 간과하면 북핵 못지않은 엄청난 위험이 된다. 그들로 하여금 이 땅이 그들의 자랑스러운 모국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아시아에 왜 그리 집착하는가. “우리 경제의 앞날은 아시아권에 달려 있다. 베트남에서 재기를 꿈꾸고 있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늘 강조하는 얘기다. 성장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아시아권과의 협력관계를 통해 우리 경제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높여야 한다. 그래서 재단은 이 지역의 전문가를 양성하려는 구체적인 안을 갖고 있다. 아시아 전문가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 정도로 상상하면 되겠다. 예전에 삼성그룹이 대거 배출했던 지역전문가(local expert)와 비슷한 그림이 된다.”


-삼성의 지역전문가 프로그램이 미국 대학의 MBA 과정에서 단골로 소개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떤 방식으로 하겠다는 것인가. “관심 있고 야망 있는 한국 청년들을 리크루팅해 베트남·라오스·미얀마 현지 유명 대학과 공동으로 해당 국가에 전문가 과정을 세우고 인력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이다. 당연히 무료다.


-돈이 많이 들 텐데 중견기업으로서 부담이 되지 않을까. “부담이 된다. 그러나 아들 3명에게 일찍이 단 한 푼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미리 동의까지 받아 뒀다. 지난달 20억원을 출연했고 내년 50억원 등 차례로 증액해 500억원 규모의 재단을 꾸려 갈 예정이다.”


-기업 규모로 봐서는 재단의 미래 모습에 입이 딱 벌어진다. 놀라운 생각이다. 거슬리는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많은 공익재단이 시작은 거창했으나 대개 용두사미 격으로 끝나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그래서 한국에 성공한 공익재단은 없다는 극단적인 말까지 나오고 있다. “맞는 말이다. 요란스럽게 시작했지만 슬그머니 없어지거나 유명무실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한국고등교육재단처럼 비교적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곳도 한두 곳 있다. 그래서 내가 죽기 전에 이 재단이 영속성을 가질 수 있게 든든한 대못을 박아 둘 작정이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흔들지 못하는 굳건한 장치를 마련해 둬 재단이 오랫동안 유지되도록 하겠다.”

김 회장은 ‘사무사’처럼 진정성 있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매출 4000억원의 기업치고는 회장실이 단출하고 수수하다. 벽면 액자의 휘갈겨진 문장(작은 사진)은 무엇인가. “지인이 선물한 액자다. 너무 갈겨 써 놓아 읽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래서 늘 설명을 해야 한다. ‘詩三百 一言而蔽之 曰思無邪(시삼백 일언이폐지 왈사무사)’. 『논어』에 나온다. 사무사(思無邪)란 ‘생각이 바르므로 사악함이 없다’는 의미다. 대입시험에 가끔 등장해 ‘사무사’는 많이들 알고 있더라. 깊은 뜻은 알기 어렵지만 그래도 참 좋은 말이다. 사무사처럼 진정성 있게 사는 게 내 삶의 모토다.”


-플라스틱은 분해가 쉽지 않은 대표적인 환경오염 물질이다. 게다가 싸구려라는 이미지까지 있다. “오해다.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 분해되게 생산해 낸다. 싸구려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없다고 한번 상상해 봐라.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 특히 한국에서는 특별하다. 플라스틱 오퍼레이션이 뭔가, 바로 성형수술 아닌가. 성형에는 실리콘 등 플라스틱 재질이 필수적이다. 성형 미인 대부분이 플라스틱 신세를 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플라스틱 제품뿐만 아니라 주방기기 등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생산하고 있다.”


김준일 회장은 대구 출신이다. 삼덕초등·경북중을 졸업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방통대를 나왔다. 1978년 수입상으로 출발해 글로벌 생활용품 기업인 락앤락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수년 전 한국의 자수성가한 400대 갑부 중 22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방통대 본관 1층 ‘락앤樂 카페’를 만들어 토론과 스터디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취미가 뭔가. 느낌에는 틈만 나면 면벽하고 도를 닦을 것 같다. “예전에 많이 했다. 그렇지만 참선해 봐도, 명상을 해도 답이 없더라. 요즘엔 틈나면 한 시간씩 뛴다. 음악도 듣고, 나나 무스쿠리의 음악을 좋아한다. 야니도 좋다. 느낌이 깊다. 나이답지 않게 뉴에이지 음악이 좋더라. 책도 읽는다. 하지만 끝까지 읽는 책은 드물다. 읽다가 느낌이 오면 곧바로 중단한다. 『삼국지』도 여러 번 읽었다. 그러나 한 번도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관우가 죽는 대목에서 끝났다. 그냥 끝내야 할 것 같았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 인생의 독서 편력은 관우의 죽음으로 완전히 끝났다.”


김 회장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얘기를 해 보면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마치 다른 세계를 주유하고 있는 느낌이다. 부드럽지만 내재된 카리스마가 만만치 않다. 그런 그가 이제 엄청 고상하고 또 고귀한 일을 꾸미고 있다. 그의 얘기를 듣고 나니 아시아가 먼 훗날 인류의 대안이 될 것이라는 새뮤얼 헌팅턴의 주장이 실감 났다.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교수?yule2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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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