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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는 나를 찾는 열쇠

유리 테이블 위에 놓인 금색의 장식품들은 뻬르푸뭄의 장은영 대표가 직접 고른 것들이다.


서울 도산공원 앞에 묘한 공간이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묵직한 빨강 커튼과 화려한 샹들리에가 눈에 띈다. 금빛 철제와 유리로 만들어진 테이블 위엔 역시나 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병들과 호사스러운 장식품이 놓여 있고, 그 앞에는 클래식한 분위기의 나른한 암 체어가 서 있다. 공작새 두 마리의 화려한 긴 꼬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면 한쪽 벽을 장식한 유리 룸 안에 정체 모를 시약병이 수두룩하다. 프랑스 어느 성의 비밀스러운 연회실을 연상시키는 이곳은 17일 새로 문을 연 향수 숍이자 연구실인 ‘뻬르푸뭄(PER+FVMVM·라틴어로 향수의 어원이 되는 단어)’이다. 진귀한 원료들을 이용해 극소수만을 위한 ‘레어(rare) 향수’를 만든다는 장은영(44·헬렌 장) 대표를 만났다.


 

장 대표가 만든 뻬르푸뭄 향수 5종류. 클래식한 시약병 디자인에 금실을 일일이 손으로 두르고 붉은 인장을 찍은 건 ‘특별한 향수’라는 정성의 표시다


장은영 대표의 커리어는 화려하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스위스 호텔학교를 졸업한 후 신라호텔에서 호텔리어로 근무했다. 90년대 레스토랑에 관심이 생겨 미국 코넬 호텔경영 대학원과 파리 요리학교 코르동블루에서 프렌치 셰프 과정을 공부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CJ ‘씨네 드 셰프’의 콘셉트부터 메뉴, 인테리어까지 모든 걸 작업했고 이후 영국계 부동산 회사에 근무하며 이케아 광명점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F&B,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걸쳐 두루 쌓은 공력이다.


40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마음을 끈 것은 바로 ‘향’이다. “유럽의 도시를 돌아다니다 보면 골목 허름한 곳에서 작은 향수 숍을 마주치게 되죠. 우연히 들른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향기를 맡았을 때 오래된 추억이 떠오르고, 나를 대면할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마치 저를 도와주는 친구를 만난 느낌이었어요. 이 매력적인 친구를 탐험해보자 생각했죠. 후각은 5감 중 가장 마지막이어서 궁극의 감각이라고들 하잖아요. 그 다음부터 육감이 작용한다고. 그 미지의 세계에서 참 좋은 친구를 찾고 싶었어요.”(웃음)


늘 가던 파리 로댕박물관의 정원이 새삼 다시 보였던 것도 이때부터다. “어릴 때 살던 우리 집 마당엔 장미넝쿨이 많았죠. 선생님 책상에 꽃을 가져다놓는 당번을 맡으면 어머니는 늘 그 장미를 꺾어 다발을 만들어주셨는데 그걸 안고 학교에 가는 날엔 내 몸에서 온통 장미향이 났어요.”


장 대표는 20대 때 스위스 작은 시골마을에서의 신기한 경험도 들려줬다. “향수 숍 여주인이 파란 보석이 얹힌 향수 하나를 추천하면서 ‘행운을 가져다주는 향수’라고 저를 꼬드겼죠. 실제로 그 향수를 산 날, 사랑에 빠졌어요. 문제는 그 향수가 줄어들수록 불안해졌다는 거죠.(웃음)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향수를 다 쓴 날, 사랑이 깨졌어요.” 향수 숍 주인이 말한 행운의 유통기한이 아쉽기는 하지만 예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향수가 ‘사랑의 묘약’으로 쓰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내 한쪽에는 시향과 조향을 위한 연구실이 준비돼 있다. 현관에 들어서기 전 작은 마당에는 마네킹과 장미로 꾸민 로즈가든이 있다.


그렇게 ‘향’에 끌려 생끼엠므썽스(Cinquieme Sence)에서 브랜드 오너들을 위해 개설한 프라이빗 섹션을 사사했다. 늦게 시작한 공부였지만 장 대표의 선천적인 감각은 스펀지처럼 향에 관한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홍시 맛이 나기에 홍시라고 말한 것일뿐”이라는 장금이처럼, 과제로 제시된 향수들을 똑같이 만들어냈다. 원료 공급자들과의 신뢰도 쌓았다. 지금 도산공원 뻬르푸뭄 매장에 차곡차곡 진열된 270여개의 진귀한 향료들에 대해 장 대표는 “향수 관련자라면 개인업자가 수입할 수 있는 원료라고는 믿기지 않을 것들”이라며 자부심을 표했다. 예를 들어 어떤 향료의 경우 500㎖ 우유 한 팩의 가격이 500만원이다.


최근 몇 년 간 향수 시장의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른 것은 ‘니치(Niche) 향수’다. 대중화된 브랜드의 대량생산과는 반대로 소수만을 위해 제작되는 럭셔리 향수. 장 대표가 만들고 싶은 것은 이보다 더 희귀한 ‘레어(rare) 향수’다. “공식적인 개념은 아닌데 정말 진귀한 최상급의 향료들만을 이용해 극소량만 만들기 때문에 향수 관계자들 사이에선 ‘괴물급 향수’라고 부르죠. 굳이 정의하자면 궁극의 희소가치를 지닌 향수에요.”


장 대표는 스스로를 ‘그랜드 크리에이터’라고 표현했다. 이 작은 공간에서 원료 공급부터 시향, 조향, 믹싱, 패키지, 판매까지 다 혼자 힘으로 작업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오래된 레어 향수 숍들이 그러는 것처럼. 작은 시약병처럼 생긴 병에 향수를 담고 금실을 정성스레 두른 다음 붉은 색 인장을 찍는 것도 ‘특별한 향수’를 상징하는 수작업의 전통 때문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상징적인 의미를 다 전달하고 싶어요. 이런 하나하나의 과정들이 모두 스토리를 만들어주니까요.”


뻬르푸뭄의 공간이 여느 향수 숍과 다르게 프라이빗 살롱 분위기로 꾸며진 것도 장 대표만의 특별한 콘셉트 때문이다. “런던에서 할머니 조향사 안젤라 플란더스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가 했던 ‘자기한테 맞는 향수를 찾는 게 어려운 이유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자신의 본질을 모르고 향수 브랜드가 홍보하는 마케팅 이미지에 끌려 자신과는 전혀 다른 향을 찾는 경우가 흔하죠. 요조숙녀가 요부가 쓸 만한 향을 찾기도 하고, 요부 같은 여자가 아주 청순한 향을 찾기도 하고. 그래서 향수를 그냥 시향지에 뿌려 향을 맡고 고르는 게 아니라 자신을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에게 맞는 향을 찾아내는 그 과정을 즐기는 공간을 마련하게 됐어요.”


뻬르푸뭄은 예약제로 운영될 예정이다. 시간을 갖고 천천히 향을 즐길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다고 ‘맞춤 향수’를 파는 건 아니다. 장 대표가 직접 만든 5가지의 향수를 우선으로 판매한다. “단순히 예쁘고 좋은 향이 아니에요. 제가 상상하는 어떤 사람의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만든 거라 향수 하나마다 이야기가 있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랑 가장 닮은 사람의 향기를 찾는 거죠.”


장 대표는 뻬르푸뭄이 ‘향에 취하고, 향에 홀리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유리벽 하나로 세상과는 잠시 떨어져 기억 속의 향기를 따라 사람·사랑·추억을 떠올리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즐겼으면 좋겠다고. ●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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