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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머금은 땅 진한 햇살로 키운 쌀을 마시다


니가타(新潟)현은 사케로 특히 유명한 곳이다. 일본의 현 중에서 사케 양조장 수가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고급 사케인 긴죠슈(吟?酒) 생산량에서 일본 1위를 자랑한다. 이곳에서는 일 년에 한 번 거의 모든 사케 양조장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들의 술을 홍보하기 위한 축제를 개최한다. ‘사케노진(酒の陣)’이다. 일본 전역에서 유일하다. 500여 종류가 넘는 니가타 사케를 한 자리에서 마음껏 시음할 수 있으니 애주가에게는 꿈의 축제다. 12일과 13일 이틀에 걸쳐 니가타시 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된 이 축제에는 일본 전역에서 12만명이 넘게 모여들었다.


 

사케노진 행사장 입구.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찬 사람들로 붐볐다. 홍보에 나선 ‘미스 사케’ 사케 축제 행사장에선 다양한 부대 행사들이 펼쳐진다.(위부터)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쓴 소설 『설국(雪國)』의 첫 구절이다. 이 소설의 무대가 된 눈의 고장, 설국으로 불린 이곳은 바로 일본의 니가타현이다.


우리나라의 동해와 맞닿아 있는 해안을 끼고 있는 이 고장에는 바다를 건너오면서 습기를 잔뜩 머금은 편서풍이 불어온다. 이 바람이 겨울철이면 현의 경계에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2000m급 고산 산맥에 부딪히면서 눈을 많이 뿌린다. 그래서 일본에서 가장 눈이 많이 오는 지역 중 하나다.


눈이 많이 오는 곳에선 좋은 쌀이 난다. 겨울에 풍부하게 내린 눈이 지하로 스며들면서 벼가 자라는데 충분한 수분을 공급해주는 좋은 토양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니가타현은 여기에 더해, 봄부터 가을까지의 일조량이 일본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다. 더 좋은 쌀이 생산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그래서 일본 전역에서도 품질 좋은 쌀로 유명하다. 황실에 헌납되는 최고 품질의 ‘고시히까리(越光)’도 니가타현 미나미우오누마(南漁沼)에서 생산되는 쌀이다.


좋은 쌀이 생산된다면? 그렇다. 좋은 사케가 만들어진다. 니가타현에는 일본의 현 단위 지역 중에서 가장 많은 사케 양조장이 있다. 모두 90여 곳이다. 이 양조장들은 특히 고급 사케를 생산한다.


사케를 빚을 때는 쌀알의 표면을 깎아내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쌀 표면에 많이 분포한 단백질을 제거해 잡미가 없는 깔끔한 맛을 얻기 위한 것이다. 고급 사케일수록 쌀 표면을 더 많이 깎아낸다. 일본 주조(酒造)조합에서는 쌀알의 40% 이상을 깎아내고 빚은 사케를 공식적으로 ‘긴죠슈(吟?酒)’라고 부른다. 고급 사케의 대명사 격이다. 일본 전체에서 생산되는 ‘긴죠슈’ 중 니가타현 사케의 점유율은 20%로 뚜렷한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니가타현을 일본 고급 사케의 본 고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 행사는 니가타 주조조합이 2004년 처음 시작했다. 조합에 가맹된 85개 양조장이 사케 500여 종을 소비자들에게 선보이고 시음, 홍보 행사를 펼치는 자리다. 시음 티켓을 한 장 구입하면(달랑 2500엔·약 2만6000원) 그 많은 니가타 사케를 마음껏 시음할 수 있다.

니가타현에서 생산되는 주요 사케들


소설 『설국』의 배경이 된 곳 … 최고급 쌀로 유명12일 오전, 행사장에는 입장 시작 전부터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줄을 서느라 피곤할 만도 한데 모두 밝은 얼굴이다. 다들 기대감으로 살짝 흥분한 듯 했다(물론 내 마음도 그랬다). 행사장 입구에는 이런저런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시끌벅쩍하게 호객을 하면서 입장객과 그들의 지갑을 반기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신나 보였던 것은 숙취 해소제를 파는 사람들이었다. 매상도 많이 오르는 것 같았다. 남의 잔치에 묻어가면서 홍보도 하고 매출도 짭짤하게 올리니, 신이 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주 적절한 타이밍을 파고든 마케팅 아이디어가 그럴듯했다.


어렵사리 입장을 하고 시음 티켓을 샀다. 작은 사케 잔 하나와 ‘천하 무적 황금 팔찌’(사실은 노란색 종이 팔찌지만 내 마음속으론 그렇게 보였다)를 건네 받았다. 이 팔찌만 내밀면 원하는 모든 사케를 시음할 수 있으니 요술 방망이가 따로 없다. 서둘러 ‘장착’하고 미리 점 찍어 놓은 사케 부스를 향해 돌진했다. 종류가 워낙 많고 내 주량은 한정돼 있으니 취사 선택을 하기로 하고 미리 마셔보고 싶은 유명 사케들을 정해 놓았었다.


그런데 사람 머리 쓰는 것은 다 비슷한 모양이다(사실 당연하다). 이미 그 부스들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발 디딜 틈도 찾기 어려워서 느긋하게 시음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그저 경쟁하듯 손을 뻗어 얻어 마셔야 하는 상황이었다. 작전 변경이다.


일단 사람들이 많지 않은 부스를 먼저 찾기로 했다. 이 기회에 몰랐던 사케를 새롭게 알 수도 있으니 어쩌면 더 현명한 방법이다. 천천히 행사장을 돌아보니 그런 부스들이 눈에 띄었다. 느긋하게 대접받는 기분으로 한 군데씩 방문했다. 생각보다 따라주는 양이 많지 않아서(약간 감질날 정도) 취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일단 맛을 보고 마음에 든다 싶으면 설명도 읽어보고 하면서 둘러보는데, 역시 맛있는 사케가 많았다. 눈 속에 집어넣고 오랫동안 숙성시켜 부드러운 맛이 난다는 사케, 자연 농법으로 키운 쌀에 태양광 에너지를 이용해 빚는다는 자연주의 사케 등등 아주 귀한 사케들도 새롭게 알게 됐다. 일본 사케의 세계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실감이 되었다. 그 동안 나름 사케를 마셔봤다고 생각했는데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이었고,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이틀간 12만명이 즐겨 … 이외로 젊은 세대도 관심시간이 지나 이제 사람들의 흥분이 좀 가라앉았는지(아니면 벌써 다들 취했는지) 원래 맛보려고 했던 유명 사케 부스들도 많이 붐비지 않았다. 한군데씩 찾아다니며 맛을 보는데, 이번에 많은 사케를 맛보면서 미각의 시야가 넓어진 때문인지 예전만큼 느낌이 강하지 않고 감동이 덜했다. 그저 니가타의 많은 고급 사케 중 몇 가지였을 뿐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우리나라에서는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가격이 비싼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수입할 때 부과되는 주세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실제 일본에서의 가격은 훨씬 쌌다.


사케가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술이기는 하지만 올드한 이미지 때문에 근래에는 젊은 세대들에게 좀 외면 받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 축제 행사장을 가득 메운 입장객들의 태반이 젊은 사람들이었다. 이런 대형 축제를 통해 개별 브랜드 홍보는 물론이고, 사케에 대한 다음 세대의 관심을 끌어 모음으로써 전통술이 계속 발전해 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축제 참가를 위해 외지에서 니가타를 방문한 사람들이 5만명이 넘는다고 하니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하는 셈이다. 자신들의 사케도 홍보하고, 사케가 계속 성장해 갈수 있는 기반도 마련하고,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되니 일석 삼조다.


반짝 인기를 얻다가 사그라지고 있는 우리 막걸리 생각이 났다. 여러 지자체에서 다투듯이 막걸리 축제를 열기도 했지만 효과는 별로 크지 않았다. 문제는 체계적인 기획력과 지속성이다. 니가타의 사케 축제도 처음부터 이렇게 성과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민관이 힘을 합쳐 10년이 넘도록 꾸준하게 행사를 계속 해오면서 이런 훌륭한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실적 위주의 단발성 보여주기식 행사에만 의존해서는 이런 결과를 이룰 수 없다. 우리가 배울 점이 참 많다. ●


 


 


니가타(일본) 글·사진 주영욱 음식평론가 yeongjyw@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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