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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본때 보이기

신용호 정치부 부데스크

신용호
정치부 부데스크

사전에 본때는 ‘본보기가 될 만한 행동’이라고 쓰여 있다. 대표적인 용례는 ‘본때를 보이다’다. 잘못을 다시는 저지르지 아니하거나 교훈이 되도록 따끔한 맛을 보인다는 뜻이다. 본때라는 말은 소설가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읽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젊은 시절 한국일보 기자를 했던 그는 50대 중반에 한겨레신문에서 사회부 기자(부국장 대우)로 일한다. 그가 당시 철도파업 현장을 다닌 모양이다. 노조는 24시간 맞교대 근무 방식을 1일 3교대로 바꾸자고 요구했고 사측은 “안 된다”고 버텼다. 결국 실력행사가 나왔다. 사흘간의 파업이었다. 사측은 파업을 겪고 나서야 3교대 방식을 수용했다. 김훈은 당시 감상을 이렇게 썼다.

“인간의 말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들이 어째서 한바탕 본때를 보이고 나면 비로소 말을 알아듣는 것일까. 기어이 본때를 보여줘야 명백히 그릇된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그 본때 보이기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 나아짐이 본때의 힘에 의해 이뤄지는 게 씁쓸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본때의 진수를 봤다. 역대급 본때였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에 대한 ‘촛불 본때’는 유례도 없고 가치를 매기기도 어렵다. 헌법의 가치를 자기 손으로 부정한 대통령에 대한 단죄였다. 성숙하기까지 했다. 유모차에 탄 아이와 학생을 포함한 남녀노소가 청와대 턱밑까지 나아갔지만 질서정연했다. 국민이 이번에 본때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권력은 어떤 음모를 꾀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물론 김훈이 겪은 본때와 촛불은 결이 다른 측면이 있다. 하지만 누군가 본때를 보이기 전에 부조리가 개선될 수는 없었던가에 대한 아쉬움은 같은 선상에 있다. 본때의 맛을 보고서야 나아지는 것 말이다.

촛불은 결국 새 대통령을 빨리 뽑는 일로 귀결될 전망이다. 두 달 동안 촛불이 대선주자들에게 미친 영향도 적지 않았다. 지지율 면에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문재인 전 대표가 딱히 재미를 못 봤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거친 발언으로 큰 덕을 봤다. 하지만 탄핵안 가결(9일) 이후 다시 문재인·반기문 양강 구도가 형성되며 이 시장은 뒤로 빠지려는 분위기다. 촛불 바람에 후보들의 발언은 거칠어졌다. 문 전 대표가 탄핵 기각 시에는 “혁명밖에 없다”(지난 16일)고 한 게 대표적이다. 혁명은 피를 부를 수도 있는 일이다. 그의 말은 기각 시 엄청난 본때를 보이겠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헌법재판소는 탄핵 심판 심리 중이다. 기다려야지 벌써 본때 운운할 즈음이 아니다.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마저 “광장의 분노와 불안에서 혼란과 불안으로 이어지면 안 된다”고 했을까. 벌써 옛 얘기가 된 ‘질서 있는 퇴진’도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문재인 전 대표 등이 먼저 주장했지만 없던 일로 됐다. 거세지는 촛불에 보조를 맞추다 보니 생긴 일이다. 여야가 합의만 잘했다면 헌재 결정이 언제 나올까를 두고 논란을 벌이는 일 없이 문제를 수월하게 풀 수 있었을 터다.

촛불 본때 같은 대수술은 앞으로 다시 받을 일이 없어야 한다. 이런 수술을 다시 받는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그만한 대수술을 하려면 얼마나 엄청난 질환이 있어야 할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을 미리 막을 수만 있었다면 지금 겪고 있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은 치르지 않아도 됐을 일이다. 그러니 최선의 방법은 아예 본때가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드는 거다. 본때가 작동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말이다. 매번 잘못된 것을 고치기 위해 손실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발전의 원리여선 안 된다.

정치권은 조기 대선 준비로 분주하다. 개헌을 고리로 한 정파 간 합종연횡과 탈당 얘기로 시끄럽다. 이번에야말로 대통령을 제대로 잘 뽑아야 한다. 권력이 한곳에 집중돼 있는 시스템도 개헌을 통해 바꿔야 한다. 좋은 대통령과 합리적인 시스템이 간절한 연말이다. 특히 대통령을 뽑아놓고 나중에 본때를 보여야 할 일은 정말 없어야 한다. 본때를 보일 필요가 없는 후보를 잘 골라내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현란한 포장이 만들어낸 후보의 실루엣을 보지 말고 본질을 제대로 보자. 이번엔 ‘잘못 바로잡기 본때’가 아닌 ‘대통령 잘 뽑기 본때’를 제대로 한번 보여주자.

신용호 정치부 부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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