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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 오른 앙투아네트 동정, 도망친 루이 나폴레옹엔 조롱



성탄절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아니면 종교적 이유로 대신 ‘해피 홀리데이즈’라는 인사말을 주고받는 날이다. 대체로 사랑과 축복이 가득한 때로 여겨지는데, 간혹 증오와 저주로 얼룩진 때도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27년 전이 그런 날이었다. 1989년 12월 25일 오후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 인근 군부대에서는 1시간짜리 특별군사재판이 열렸다. 여기서 대통령이자 공산당서기장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그의 부인은 사형을 선고 받았다. 곧 약 120발의 총탄이 차우셰스쿠 부부에게 퍼부어졌는데, 수많은 총알 가운데 일부는 촬영을 위해 부부의 시신에 다시 쏜 것들이었다. 차우셰스쿠 총살 이후 루마니아에서는 사형제가 폐지됐다.



차우셰스쿠는 1965년 루마니아노동당 서기장으로 선출된 이래 24년 동안 루마니아를 통치했다. 그는 북한의 주체사상과 중국의 문화혁명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김일성과 마오쩌둥(毛澤東)을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주체사상에 관한 서적을 루마니아어로 번역해 루마니아 전역에 배포했고, ‘미니 문화혁명’으로 불리는 운동을 전개했으며, 무엇보다 김일성 개인숭배를 벤치마킹했다. 그러나 차우셰스쿠의 개인숭배 정책은 주변의 민주국가 사례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루마니아 국민에게 잘 통하지 않았다.



 

[차우셰스쿠 처형 20년 후 여론 바뀌어]

1989년 동유럽에 몰아친 혁명의 물결은 1인 독재의 루마니아에서 더욱 거세게 불었다. 다수의 국민이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반(反)차우셰스쿠 대열은 쉽게 집결했다. 그 대열에는 정규군·경찰·공산당도 포함됐다. 심지어 차우셰스쿠 부부 재판에 선임된 국선변호인조차 차우셰스쿠를 변론하지 않고 사형 선고를 종용했다.



차우셰스쿠는 군사재판부 구성과 사형 선고가 모두 헌법에 위배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재판에서 차우셰스쿠의 혐의에 대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은 채 당시 언론에 보도된 의혹만을 갖고 사형이 선고됐다. 당시 법령이 사형 선고 후 10일 이내의 형 집행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은 즉각적인 총살로 집행되었다. 친(親)차우셰스쿠 세력의 반격을 우려하여 처형을 서둘렀을 것이다.



당시 루마니아 국민들은 차우셰스쿠의 처형이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오늘날은 반대로 말하는 국민도 있다. 예컨대 2010년에 실시된 루마니아평가전략연구소(IRES)의 조사에서, 차우셰스쿠가 대통령에 출마했다면 지지했을 것이라는 응답자 비율은 41%였다. 차우셰스쿠 시절 때의 삶이 조사 당시인 2010년보다 더 나았다고 응답한 비율 그리고 더 못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각각 63%와 23%였다. 2014년 IRES 조사에서는 차우셰스쿠를 지지한다는 비율이 46%에 이르렀다.



1989년 루마니아 국민의 저항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독재자가 20년 후 다소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는 그가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는 점이다. 잘못을 저지른 자이더라도 그의 처단이 비극적이었다면 세월이 지난 후 일반 대중은 동정심을 갖게 된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 문제와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는 프랑스의 두 인물을 예로 들어 지도자에 대한 대중의 감정을 좀 더 살펴보자.



먼저,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다.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후 같은 해 10월에 남편의 뒤를 따라 처형된 인물이다. 정치적 권력 획득 또는 경제적 빈곤 해결 등 각기 다른 이유에서 당시 프랑스 사회의 다수는 루이 16세 개인 또는 왕정 체제를 붕괴시키려는 분위기였다. 루이 16세는 이런 시대적 요구에 적극 대응하는 개혁을 해내지 못했다. 특히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대중과 잘 소통하지 못했는데,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가 프랑스혁명의 추진 동력으로 작동했다. 한국에서조차 이름을 ‘마리 안통아넷(말이 안 통하네)’이라고 발음하면서 불통(不通)의 인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마리 안통아넷’ 발음되는 불통의 인물]

그런데 앙투아네트가 발언해 프랑스 시민을 격노시켰다고 알려진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될 것 아니냐”는 발언은 실제로 있었다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 근거로 종종 인용되는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 구절은 앙투아네트가 15세의 나이로 프랑스 태자와 결혼한 1770년 이전에 집필됐기 때문이다. 보석 치장과 남성 편력 등 각종 소문도 실제 그가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오늘날에는 앙투아네트를 프랑스혁명 와중의 희생자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고, 여러 문학예술 작품에서 그를 추모하기도 한다. 이런 추모 정서는 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사실에서 일부 연유한다.



박근혜 정권이 비유되는 또 다른 프랑스 인물은 나폴레옹 3세(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하 루이 나폴레옹)의 아버지는 나폴레옹 1세(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이자 홀랜드 초대 국왕을 지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다. 루이 나폴레옹의 어머니는 조제프 드 보아르네가 나폴레옹 1세와 결혼하기 전에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딸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다. 루이 나폴레옹의 부모는 1807년 첫째 아들이 죽자 별거 중에 임신하여 1808년 셋째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루이 나폴레옹이다.



1815년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면서 루이 나폴레옹은 여러 지역을 떠돌며 살았다. 형과 함께 이탈리아 비밀결사대 카르보나리 활동을 하다 도주하던 중인 1831년에 형이 홍역에 걸려 죽고 또 1832년 나폴레옹 1세의 와아들마저 죽자, 나폴레옹 1세를 계승할 혈통은 루이 나폴레옹이 유일하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1839년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이념』을 출간했다. 1848년 2월 혁명 발생 후 루이 나폴레옹은 우파 정당의 지지를 받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됐고, 1852년 국민투표로 제2제정을 도입하여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했다.



1870년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이른바 엠스 전보를 공개하자 프랑스에서는 프로이센을 전쟁으로 응징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이에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했고 우울증 등 여러 질환이 있음에도 스당에서 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그러나 정교하지 못한 군사작전을 연이어 펼치다가 프로이센군의 포화를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여 포로가 됐다. 이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황후는 “노! 황제는 포로가 될 수 없다. 왜 자결하지 않았나. 치욕임을 알지 못할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파리까지 점령해 프랑스가 자랑하는 베르사유궁전에서 독일제국 선포식을 열었다. 나폴레옹 3세는 영국으로 망명해 생을 마쳤는데 온갖 조롱을 들어야 했다.



 

[퇴진 모습의 차이에 따라 평가 엇갈려]

오늘날 박근혜 정권은 나폴레옹 혈통을 의미하는 보나파르티즘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대중에게 보나파르티즘은 혈통에 의한 후광 효과와 다름없다. 역설적이게도 나폴레옹 3세가 실제 나폴레옹 1세의 조카가 아니라는 주장이 오늘날 제기되어 있다. 남성 염색체의 Y-STR를 갖고 분석한 결과, 나폴레옹 3세와 그의 아들은 I2a2 하플로 집단인 반면, 그의 아버지와 큰아버지(나폴레옹 1세)는 E1b1b 하플로 집단인 것으로 조사되었기 때문에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 수 없었던 당시에는 나폴레옹 1세의 친조카라는 믿음이 제2제정의 출범과 나폴레옹 3세의 즉위를 가능하게 했음은 물론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루이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영어판 제목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서문에서, 역사는 반복되는데 한 번은 비극이고 다른 한 번은 웃음거리로 등장한다고 언급하면서 나폴레옹 1세를 비극으로, 나폴레옹 3세를 웃음거리로 규정한 바 있다. 어쩌면 박정희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그렇게 구분하는 해석도 등장할 것 같다.



오늘날 앙투아네트를 추모하는 프랑스 국민은 있는데, 나폴레옹 3세를 추모하는 국민은 별로 없다. 이는 퇴진 모습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온갖 증오와 경멸 속에서 나름대로 위엄을 지키면서 단두대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 왕비 그리고 프로이센에 치욕적으로 항복하여 목숨을 부지한 황제라는 차이다.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들의 인기 순위를 봐도, 비극적 죽음이 후세의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대통령 측근의 국정 농단 의혹과 관련해 특별검사팀의 수사, 법원의 재판,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리 등이 진행 중이다. 이 와중에 대통령의 처벌 수위에 대해 의견이 맞서고 있다. 대통령을 당장 체포해 구속시켜야 한다는 주장부터, 아무런 죄가 없기 때문에 임기를 보장해줘야 한다는 주장까지, 이런 상반된 의견은 또 다른 갈등의 요소가 되고 있다.



당나라 시절 최치원은 황소의 난을 일으킨 황소에게 춘추전을 인용하면서 경고한 다음의 문구를 남겼다. “세상이 착하지 않은 자를 돕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天地假助不善) 복을 내리는 게 아니고(非祚之也) 그 흉악을 더 크게 만들어 벌을 내리려 하기 위함이다(厚其凶惡而降之罰).” 지금 죗값을 치르지 않으면 후악강벌(厚惡降罰) 즉, 죄가 쌓여 더 크게 처벌될 수도 있는 것이다.



죄를 지었으면 법적이든 정치적이든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해결되지, 당장 처벌을 받지 않는다 해서 앞으로도 처벌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로 처단될 때 부활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부활은 육신이 짓밟힐수록 정신과 명예는 살아남음을 의미한다. 물론 막상 벌을 달게 받기란 누구라도 쉽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본래 벌이란 죄 지은 만큼만 주는 것이다. 처벌이 과한 것과 부족한 것 모두 미래를 위해선 바람직하지 않다. 특검·법원·헌재뿐 아니라 대통령과 국민도 잊지 말아야 한다.



 



 



김재한한림대 정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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