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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귀로 악보를 읽는 연주자…1곡당 1000번은 들었죠, CD가 못 쓰게 되더군요

하모니카 20년 ‘한국의 스티비 원더’ 전제덕
전제덕씨의 선글라스에 하모니카를 비쳤다. 한 뼘 남짓한 하모니카가 그의 눈으로 쏙 들어갔다. 그는 디지털 기기로 음악작업을 한다. “장애인도 비장애인 못지않게 디지털 기기를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해준 스티브 잡스를 형님으로 모시고 있다”고 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전제덕씨의 선글라스에 하모니카를 비쳤다. 한 뼘 남짓한 하모니카가 그의 눈으로 쏙 들어갔다. 그는 디지털 기기로 음악작업을 한다. “장애인도 비장애인 못지않게 디지털 기기를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해준 스티브 잡스를 형님으로 모시고 있다”고 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하모니카 입에 물면 내 가슴엔 별이 뜨고 외로운 소리 위로 꽃이 핀다네. 내 맘속 숨겨둔 많은 얘기 저 바람은 알고 있을까’.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42)의 1집 앨범 ‘우리 젊은 날’(2004)에 실린 ‘나의 하모니카’ 가사 일부다. 전씨가 직접 노래도 불렀다. 그 ‘내 맘속 숨겨둔 많은 얘기’를 들으러 그와 마주 앉았다. 무슨 사연이 그리 많기에 그는 ‘나의 길 아직도 먼데 어디서 쉴 수 있나’라고 소망했을까. 마침 전씨가 30일 서울 성수아트홀에서 그의 음악적 스승을 기리는 헌정공연을 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태어난 지 보름 만에 시력 잃어
눈과 하모니카 바꿀수 있다면 당장에
내 얼굴·어머니 모습 가장 보고 싶어
전제덕씨가 2004년 방한한 투츠 틸레망과 자리를 함께했다.

전제덕씨가 2004년 방한한 투츠 틸레망과 자리를 함께했다.

‘한국의 스티비 원더’로 불린다.
“시각장애 때문일 것이다. 알려진 대로 태어난 지 보름 만에 열병으로 시력을 잃었다. 특수학교인 인천혜광학교에서 초·중·고를 마쳤다.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학교 선생님들의 열정으로 음악을 할 수 있었다.”
운이 좋다니, 역설적으로 들리는데.
“그때만 해도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는 건 안마사뿐이었다. 저도 고교 졸업 후 생계 때문에 잠깐 안마사를 한 적이 있다. 요즘에는 뮤지션도 되고, 작가도 되고 장애인과 일반인의 경계가 조금씩 엷어지고 있다. 물론 외국에 비해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처음은 사물놀이였다.
“중1 때 장구채를 처음 잡았다. 역사선생님이 국악을 전공해 아는 사람이 많았다. 제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물적·심적으로 아낌없는 지원을 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원일(전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씨의 장구 솜씨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세계사물놀이 한마당’ 대상도 받았는데.
“고교 졸업 후 이듬해였다. 개인적으로 MVP를 수상했다. 그게 인연이 돼 김덕수 사물놀이패에 들어갔다. 흔히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큰 행운이었다. 최고의 팀에서 활동을 하게 됐다.”
왜 사물놀이를 계속하지 않았나.
“1990년대에는 사물놀이팀이 많았다. 경쟁이 뜨거웠다. 우리 팀은 결정적 약점이 있었다. 앞이 안 보이기에 앉아서 해야 하는데 그런 상태에서 상모를 자유롭게 돌릴 수 있겠나. 발버둥을 치며 노력했지만 퍼포먼스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택시 안에서 들은 하모니카에 매료
하루 8~9시간 입술 틀 정도 연습
한 달에 한 개꼴, 200개 망가뜨려

전씨는 “그때만큼 절실한 때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전환점이 왔다. 96년 경기도 수원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재즈 하모니카의 대부로 꼽히는 벨기에 출신 투츠 틸레망의 연주를 라디오로 듣게 된다. 문방구에서나 파는 악기, 다른 주요 악기의 ‘조연’에 그쳤던 하모니카의 새로운 매력에 빠져들었다. “차갑게만 생각했던 작은 악기에서 말할 수 없는 따듯함을 느꼈다”고 했다.
전씨가 30여 년 애용한 점자시계와 낡아 망가진 하모니카들. 그는 “ ‘시각장애인이 무슨 패션시계’라는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전씨가 30여 년 애용한 점자시계와 낡아 망가진 하모니카들. 그는 “ ‘시각장애인이 무슨 패션시계’라는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틸레망이 지난 8월 94세로 타계했다.
“처음 들었던 그의 연주 곡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발라드였던 것 같다. 하모니카에서 저렇게 풍부한 음이 나오다니, 무척 신기했다. ‘아마 악기 값이 비싸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일단 용산 음반가게에 가서 그의 음반을 구입했다. 종류가 의외로 많아 깜짝 놀랐다.”
앨범을 1000번가량 들었다는데.
“악보가 없으니 청음으로 연습할 수밖에 없었다. CD를 틀고 트니 CD플레이어에서 음을 읽어내는 장치가 망가졌고, 그다음엔 CD를 못 쓰게 됐다. 정확히 세진 않았지만 곡당 1000번은 들었을 것이다.”
절대음감을 갖고 있나 보다.
“뮤지션이라면 기본이다. 그렇다고 외워서 되는 게 음악은 아니다. 지금 돌아보니 틸레망, 그리고 주변 엔지니어들이 그런 음을 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는지 알 것 같다.”
그런데 왜 틸레망인가.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분이다. 2004년 방한했을 때 만난 적도 있다. 제겐 음악의 멘토 같은 분이다. 그의 연주는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다.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도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재즈의 정신을 구현했다.”
하모니카도 많이 망가뜨렸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개 정도 새로 샀다. 하루 8~9시간씩 입술이 부르틀 정도로 연습했다. 들숨과 날숨을 받아들여 음을 진동시키는 리드(reed) 부분의 종이판이 자주 찢어졌다. 지금까지 200개 정도 나간 것 같다. 지금처럼 악기를 잘 다루지 못했던 때였다.”
헌정공연은 어떻게 꾸미나.
“틸레망의 대표곡인 ‘블루제트(Bluesette)’ ‘이프 유 고 어웨이(If you go away)’ ‘더 데이스 오브 와인 앤드 로즈(The days of wine and roses)’ 등과 함께 다양한 재즈와 팝음악을 준비할 예정이다. 하모니카 20년을 되짚어보는, 마치 처음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스승의 절반도 살지 않았는데.
“지난 20년은 저만의 하모니카를 확립하는 기간이었다. 큰 그림을 그렸다고나 할까. 음악이 좋은 게 은퇴가 없다는 점이다. 죽는 순간까지 연주할 것이다. 기력이 떨어지면 떨어진 대로의 맛이 있다. 최근 유튜브에서 아흔이 넘은 틸레망의 무대를 본 적이 있는데 연주 중간에 처음의 음을 찾지 못해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뭐야, 저게’라며 실망할 일도 아니었다.”

30일 음악적 스승 기리는 헌정공연
한국인 첫 독일 ‘호너 아티스트’ 선정
틸레망처럼 늙어서도 무대 서고 싶어

전씨는 올해 경사를 맞았다. 세계적 하모니카 제조업체인 독일 호너 사가 선정한 ‘호너 아티스트’에 한국인 최초로 뽑혔다. 틸레망을 비롯해 팝스타 밥 딜런, 존 레넌 등이 거쳐간 영예다. 2004년 이후 지금까지 넉 장의 정규 앨범을 내며 한국에 하모니카 연주자도 당당한 뮤지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공적 덕분이다. 가냘픈 듯 폭발하고, 여린 듯 휘몰아치는 하모니카를 재발견했다는 평을 받았다.
 
하모니카의 매력을 꼽아본다면.
“누구든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10분 정도 연습하면 간단한 동요를 연주할 수 있다. 그다음부터는 시간과 노력이란 피나는 대가가 필요하다. 하모니카는 150여 종류가 있는데 제가 쓰는 것은 크로매틱 하모니카다. 12개 구멍에 각각 날숨과 들숨을 쉬고, 또 각 음의 반올림 기능을 하는 버튼(단추)이 있어 총 48개의 음을 낼 수 있다.”
‘영혼의 소리’를 연주한다고 한다.
“낯간지러운 평가지만 듣기에 나쁘지 않다. 하하하. 하모니카 하나로 하나하나 꿈을 이뤄왔다. 처음에는 음반 하나 냈으면, 그다음에는 단독 공연을 했으면, 그리고 다시 오케스트라와 협연했으면 바랐는데 모두 현실이 됐다. 혜성에서 시작해 큰 별은 아니지만 작은 별은 된 것 같다. 3년 전 제 나이에 맞지 않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도 받았으니….”
음악적 재능은 누구에게 물려받았나.
“어머니께선 노래를 못하셨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던 아버지께서 흥이 많으셨던 것 같다. 술 한 잔 하시면 꼭 한 곡조 뽑으셨다. 젓가락 장단에 밥상이 많이 망가졌다. 그런 까닭일까, 어린 시절 들었던 가수들이 좋다. 조용필 노래를 자주 흥얼거린다. 밴드 ‘사랑과 평화’도 좋아한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
“1집 앨범 녹음·믹싱을 마치고 마스터링(앨범 제작 직전 단계) 테이프를 들을 때 프로듀서가 뒤로 가서 혼자 울었다. “드디어 해냈구나’ 마음이 짠해졌다. 처음으로 낳은 자식이니까. 함께 있던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셨다. 스태프들에게 술과 고기를 돌리셨다.”
만약 눈과 하모니카를 바꿀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바꾸겠다. 사람은 눈을 뜨고 살아야 한다. 가장 먼저 제 얼굴을 보고 싶다. 그다음이 어머니다. 나를 알아야 남도 보이지 않겠는가. 여러 번 말했지만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받아들일 뿐이다. 체념, 혹은 절망하자는 게 아니다. 산목숨은 살아야 한다.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모니카의 길을 넓혀왔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S BOX] 무명 연주자를 TV에 출연시킨 ‘재즈의 은인’ 김광민 교수
청년 전제덕을 재즈의 길로 본격 안내한 이는 피아니스트 김광민(56·동덕여대 실용음악과 교수·사진)이다. 김 교수는 라이브 음악 프로로 주목을 받은 MBC ‘수요예술무대’(1992~2005)를 가수 이현우와 함께 진행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에 있을 때 많은 뮤지션과 만날 수 있었어요. 가수 자우림·노영심 등도 있었죠. 한 번은 휴식 시간에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데 김광민 교수가 와서 ‘너 생각보다 잘하네. 한번 같이 연주해 볼까’라고 했어요. 그냥 지나가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저를 무대에 세우는 거예요. 꽤나 당황했습니다. 2002년 ‘수요예술무대’에 출연시켰죠. 실제 공연에도 자주 부르고요.”

전제덕은 김 교수를 ‘재즈의 은인’으로 불렀다. 이론·실기 모든 면에서 자상한 지도를 받았다고 했다. “‘네 음악을 해라. 하고 싶은 대로 연주해라’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특유의 어눌하고 무뚝뚝한 말투로 혼내기도 했고요. 덕분에 재즈 명곡 수백 곡을 머릿속에 넣었고, 재즈의 기본 리듬인 스윙(swing)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자신감이 붙은 거죠. ”

김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명 연주자를 TV로 불러낸 건 모험이 아니었느냐고 물었다. “처음부터 실력을 알아챘습니다. 노래도 기가 막히게 잘했어요. 가수가 됐어도 성공했을 겁니다. 소질 있고 능력 있으면 당연히 초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처음부터 유명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글=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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