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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창조경제와 갑질 문화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창조경제는 박근혜 정부의 오방낭이었다. 그 색깔만큼이나 말은 요란한데 실체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에서 나왔다고 하고 “창조적 산업”이란 말에서 빌려왔다고도 했다. 이제 보니 “(대기업) 찬조”나 “차(은택, 김)종”에서 “창조”로 바뀐 것 같기도 하다. 어원은 그렇다 치고 어떻게 창조경제를 만들 것인지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래도 정부 주도 프로젝트에, 심지어는 대학이 정부에 제출한 많은 연구·교육사업 신청서에도 “창조”라는 말이 수식어처럼 들어갔다. 말만 쓰면 “창조”가 되는 것처럼.

 분명해진 것은 창조경제는 그저 정책 슬로건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수직적 권위주의와 불통이라는 가장 비창조적인 방식으로 국가를 경영한 대통령이 풀어놓은 허상이었다. 그 허상의 단면은 창조경제를 논의하는 회의에서도 드러났었다. 참석한 장관이나 위원들이 대통령 말씀을 고스란히 받아 적는 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은 여기가 남한인지 북한인지 헷갈렸다. 대통령은 군대에서 스티브 잡스가 나올 수 있다고 착각했던 듯하다. 창조경제는 위에서 부르짖거나 정책으로 내건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 문화에서 나오는 것임을 몰랐던 까닭이다.

 대통령은 갑질 정치로 창조경제를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갑질과 창조경제는 완전한 상극이다. 그 때문에 창조경제는 피지도 못하고 싹부터 잘려나갔다. 공정한 규칙 없이 정치인과 공무원이 기업에 내릴 떡과 사약을 임의로 결정하면 기업은 혁신과 창의를 위해 노력하기보다 대정부 로비에 전력을 기울인다. 여기서 경제적 비효율성이 발생한다. 더 나아가 혁신보다는 정치와의 야합을 택해 달콤하고 안정적인 독과점 수입을 탐하게 된다. 그러면 경제는 거기서 멈추게 된다. 이것이 바로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에서 3만 달러에 도달하는 데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이 걸린 나라가 된 근본적 이유다. 런던정경대의 피터 와일즈(Peter Wiles)는 유명한 소련 경제 연구자였다. 1990년대 초 나를 만나자마자 정말 궁금한 질문이 있다며 물었다. “무시무시한 소련 정부마저도 기업이 마음대로 가격을 올리지 못하도록 통제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런데 한국은 목욕탕·이발소 요금까지도 정부가 확실히 통제한다고 들었다. 어떻게 소련이 하지 못했던 것을 시장경제 국가인 한국이 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답은 이랬다.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기업이 없도록 엄격한 법을 만든 다음, 어떤 기업을 봐 주고 봐 주지 않을지 대통령이 임의로 결정하면 기업들은 알아서 움직인다.”

 더 많은 투자와 노동력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경제성장이 가능할 때는 공익을 추구하는 독재자의 갑질로도 성공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기가 그랬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처럼 자원 동원에 의한 성장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때는 혁신 이외에 다른 성장 동력은 없다. 성장 동력이 동원에서 혁신으로 넘어가야 할 중요한 시기에 한국 정치와 정부는 과거 박정희 시대의 국가주의 모델을 답습하고 있다.
 혁신의 뿌리는 공정과 자율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이 생존하는 길이다. 시장경제가 성공한 이유도 ‘사람의, 사람에 의한 지배’라는 중세질서가 없어졌고 그 대신 시장에 팔 수 있는 좋은 물건을 열심히 만들면 잘살 수 있는 길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것이 혁신을 일으켰고 생산성을 증가시켰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경제성장 초기부터 수평적 시장경제가 수직적 국가주의와 혼합되었다. 유통기한이 지나도 한참 지난 이 수직적 국가주의를 내버리지 않으면 혁신과 창의를 바탕으로 한 경제성장은 난망하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서지도 못하고 여기서 성장을 멈춰야 할지도 모른다.

 리더십이 바뀌어야 한다. 관료와 전문가를 줄 세우고, 국무회의를 받아쓰기 학습장 정도로 여기는 대통령으로서는 이 나라에 소망이 없다. 공정함과 개방적 사고를 가진 사람, 충성과 이념의 잣대가 아니라 전문성을 기준으로 인선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돼야 한다. 창조경제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 자체가 수평적이며 소통하는 문화로 변해야 한다. 뉴욕대의 윌리엄 보몰(William Baumol)은 미국에서 창조적 기업가가 많은 이유로 미국의 초·중등학교가 공부를 잘 가르쳐서가 아니라 못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시험 성적만 올리려는 동아시아 국가와는 달리 미국 학교의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환경이 학생들의 창의적 사고에 기여했다는 의미다.

 바뀌어야 할 곳이 정치와 학교뿐일까. 기업과 정부 등 모든 조직에서 구성원은 서로 상대방이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공간을 열어주어야 한다. 창조경제는 이런 토양에서만 자라나는 희귀한 꽃이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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