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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예술 - 문학] 삶에는 일순간이 있다

배수아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소설을 왜 읽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때그때 달라지는데 최근에는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누구도 두 번 살 수는 없다. 이 삶 이후에 다른 삶이 또 있지 않다면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을 두 번째 삶으로 만들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미 한 번 살았던 것이니까.” 당신이 직장 상사 중 한 명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괴로울 때 언젠가 읽은 소설의 캐릭터 중 하나를 떠올려 보는 일은 유용하다.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나 자신일 때는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겠다. 나는 지금 어떤 소설의 누구를 살고 있는가?

이런 도움을 주는 소설일 수 있으려면 인상적인 전형성을 갖고 있는 캐릭터가 많이 나오고 매력적인 보편성을 갖는 사건들이 벌어져야 하리라. 그런데 제인 오스틴이라면 모르겠으나 배수아의 소설이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소설에서 ‘전형적 인물’이나 ‘보편적 상황’을 찾기란 힘들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배수아의 소설은 대체 불가능한 나름의 매력을 품는다. 언젠가 말한 적 있거니와 “그 어떤 흥미진진한 서사보다도 더 매혹적인 것은 자기 자신을 단호하게 주장하는 매력적인 내면성 그 자체임을 입증하는 하나의 사례”가 바로 배수아의 소설이다.
한 독립영화 감독의 하루를 섬세하고 감각적인 필체로 그려낸 소설가 배수아. [중앙포토]

한 독립영화 감독의 하루를 섬세하고 감각적인 필체로 그려낸 소설가 배수아. [중앙포토]

경기문화재단 지원사업의 결과로 출간된 작은 소설집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테오리아, 2016)에 실려 있는 표제작에서도 배수아 읽기의 특별한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의 경우 언제나 그렇듯 줄거리를 요약하는 일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다. 독립 영화감독 험윤이 최근 카프카의 책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며 자신이 카프카 소설의 누구처럼 자신을 낯설어하는 순간이 곧 올 거라는 막연한 예감을 느끼다가 마치 카프카가 밀레나를 그렇게 만났듯, 일 관계로 처음 만난 어느 여자에게서 자신을 험난한 촬영지에 데려가 달라는 뜻밖의 강경한 부탁을 받는다는 이야기.

왜 시간 낭비를 하려 하느냐는 물음에 여자는 자신에게는 그런 물음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는 어차피 시간이 없으니까요. 원래 의미의 시간은 나에게 처음부터 부여되지 않았어요. 내 시간은 그냥 밤뿐이니까요. 바로 지금처럼요. 오래오래 계속되는 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 이것은 매혹적이지만 물론 당혹스러운 요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가 내처 “나를 데려가 주신다면 나는 황홀할 거예요”라고, 혹은 “기나긴 여행이 될 거라고 말했나요? 나는 황홀할 거예요”라고 말하기에 이르면 험윤과 마찬가지로 독자는 조금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중고서점에서 구입해 최근 탐독 중인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의 속표지에 ‘황홀한 밀레나’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 우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독자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험윤이 막연히 예감했던 ‘그 순간’이 이제 막 도착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는 듯이 다음 문장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삶에는 일순간이 있다.” 이처럼 배수아의 소설을 읽는 일은 그 특유의 아름다운 문장의 인도를 받아 어떤 신비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일인데, 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우리 문학에는 많지 않으므로, 나는 배수아가 몇 명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신 형 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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