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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어떤 타임머신을 탈 것인가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

최장집 교수의 책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이렇게 시작한다. 2002년 이 책이 나올 때만 해도 이 문장에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가 아닌가. 30년에 가까운 군사독재의 굴레를 벗고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확립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데 나빠졌다니.

하지만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 책을 다시 들춰보며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처럼 사람들이 화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30년 가정을 지켜온 주부들이 삼삼오오 광화문으로 달려간다. 금융회사나 외국계 기업 임원처럼 보통사람의 눈으론 기득권에 속하는 대학 동기들도 마찬가지다. 서울 강남 아파트에 사는 공무원조차 신분증을 집에 두고 아이 손을 잡고 집회에 참여했다고 했다. 정유라의 특혜 입학은 미래를 꿈꾸는 중·고·대학생의 ‘분노 게이지’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기이하기까지 한 최순실의 행적은 이 땅의 부모와 평범한 갑남을녀가 믿었거나 믿고 싶어 했던 최소한의 상식과 정의를 무너뜨렸다. 집무실보다 관저를 사랑했던 대통령은 최순실 지인의 민원까지 살뜰하게 챙겼다. 그를 보좌하는 공직자들은 공사를 분간하지 못했다. 둘이 충돌할 땐 오히려 사를 앞세웠다. 그래도 최소한의 공적 시스템은 살아 있으리라는 국민의 희망은 허탈감만큼 큰 자괴감으로 배신당했다.

평범하기만 한 이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지금이 1970년대냐.” 국정 농단의 결과와 과정이 모두 기가 막혀서다. 정체불명의 재단에 대기업 뭉칫돈이 쏟아져 들어가고, 비선 실세의 호통 앞에 엘리트 공직자의 원칙과 자존심이 무력하게 스러졌다. 고인이 된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은 색깔론과 공작정치로 점철된 청와대 운영방식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오죽하면 청문회에 불려 나온 손경식 CJ그룹 회장이 이미경 전 부회장에 대한 청와대의 사퇴 압력을 두고 “군부정권 때 이런 경우가 있었다”고 했을까. 국정 농단의 실상이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지난 4년간 대한민국이 1970년대행 타임머신을 타고 있었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나이와 이념, 지역을 초월해 광장에 모인 연인원 600만 명의 함성은 “이런 퇴보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경고일 것이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밝혀진 게 다행이다. 미수에 그친 행각들이 현실화됐다면 대한민국과 국민은 얼마나 더 불행해졌을까.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하지만 위대한 국민은 ‘온 우주의 기운’을 끌어모아 기어코 ‘극단적 비정상의 정상화’를 실현했다. 탄핵 가결 여부와 무관하게 박근혜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 적어도 새로운 미래를 그려볼 한 번의 기회를 국민 스스로 만들어냈다.

국민의 최소한의 요구는 적어도 70년대에서는 벗어나자는 것이다. 기왕이면 21세기에 어울릴 리더십과 시스템 업데이트이면 좋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정치체제는 시대를 앞서가지 못한다. 기껏해야 시대와의 간극을 최소한으로 좁힐 수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소국이 아니었던 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이행하는 데에는 적게 잡아도 60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왕정과 과두정, 참주정치를 거치며 수백 년 만에 만들어졌다.

SF영화엔 타임머신이 종종 등장한다. ‘백 투 더 퓨처’에서부터 ‘인터스텔라’까지 그랬다. 물리학은 이론적으론 시간여행이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론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한다. 하지만 2016년 12월 대한민국에선 그게 가능하다. 70년대로 뒷걸음질쳤던 시스템을 현재와 가까운 시기로 업데이트할 기회가 열렸다. 무한대로 터져나온 국민의 에너지는 그걸 현실화할 타임머신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부응할 성능 좋은 타임머신을 만들어낼 이는 과연 누구일까. 그 답은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자신이 가진 얕은 지식과 기술을 버리고, 국민의 요구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점이다. 조만간 각 정당과 대선후보들이 ‘대한민국을 21세기로 복구시킬 타임머신’을 국민 앞에 내놓을 것이다. 광장을 달궜던 열기가 가짜 혹은 불량 타임머신을 가려내는 냉정한 집단지성으로 승화되길 기원한다.


나 현 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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