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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위장된 축복

기자
김종윤 사진 김종윤
김종윤 경제부장

김종윤
경제부장

단아한 미소에 대쪽 같은 이미지는 강렬했다. 한국 산업 발전의 화신인 아버지의 후광도 그를 돋보이게 했다. 부모 모두 총탄에 숨진 가족사는 그를 비운의 정치인으로 성장시켰다. 거기까지였다. 거짓 드라마였다. 유권자는 탄식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격이 없었다.”

인간은 약육강식이 판치는 무질서한 자연을 통제하는 지혜가 있다. 외부의 침략에 맞서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범죄를 막는 도구가 필요했다. 자연이 준 권리를 법과 제도에 양보하고 통치체제를 구성했다. 이게 국가다. 자유주의 국가관이 확산하면서 국민은 주권을 가진 존재로 부상했다. 이들은 대표자를 뽑아 그에게 통치를 맡겼다.

대한민국 18대 대통령 박근혜는 그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 때 이렇게 선서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헌법 69조)

그는 헌법을 준수하지 않았다.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지도 못했다. 박 대통령은 권력을 최순실 부류에게 갖다 바쳤다. 국민은 참담하다. 지난 4년간 국민과 국가의 안전·안위를 꼭두각시에게 맡겼다는 말인가. 소름이 돋는다.

그 분노, 촛불이 돼 타올랐다. 6주간 641만 개의 불꽃이 어둠을 베었다. 장막 뒤에 가려졌던 ‘절망’을 비췄다.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절망은 ‘희망의 불꽃’으로 피어올랐다. 불꽃은 이렇게 외친다. “박근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한 위장된 축복이다.”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축복이라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로 정경유착의 음험한 뿌리를 자를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권력은 무소불위였다. 오랜 세월 권력은 법 위에 군림했다. 대기업의 돈을 뜯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을 만드는 과정도 그 연속선상이었다. 시장 상인에게서 자릿세를 뜯는 동네 깡패와 다를 바 없었다. 박 대통령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국민을 위협하는 데 썼다. 기업도 책임을 면치 못한다. 늘 피해자 코스프레를 펼쳤지만 뒷거래로 이권을 챙겼다는 의혹을 씻지 못한다. 정경유착이라는 고질적 악취의 뿌리, 이제 쓸어낼 기회가 왔다.

둘째로 공무원이 바로 설 수 있게 됐다. 청와대 근무는 출세 코스였다. 교수 출신이든, 관료 출신이든 승진이 보장됐고 장·차관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불합리한 지시에 저항하기 힘든 구조였다. 헌법 7조 1항에 공무원의 의무가 적시돼 있다.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청와대 비서실은 달랐다. 교수 출신 안종범 경제수석은 국민이 아닌 대통령에 대한 봉사자일 뿐이었다. 관료 출신 비서관 등도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이지 못했다.  자금을 출연하기로 한 기업 명단을 전경련에 전달하는 등 심부름꾼 노릇을 했다. 더는 엘리트 관료들이 헌정 파괴의 도구가 돼선 안 된다.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헌법이 보장한다(제7조 2항). 헌법이 바로 서야 한다. 이제 공무원은 불법·부당 지시를 거부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오직 국민만 바라보고 봉사하면 된다.

셋째로 법치(法治)의 구현이다.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법치를 거역하면 국민은 정부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상은 이미 18세기에 정립됐다(장 자크 루소). 동양에서도 맹자는 물(백성)은 배(군주)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집기도 한다고 말했다. 대의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대표자로 선출되는 건 아니다. 자질이 부족한 인물이 대표자가 될 수 있다. 이럴 때 국민은 대표자를 법에 따라 내칠 수 있다. 국회는 헌법에 따라 곧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에 들어간다. 우리는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법에 따라 끌어내리는 새 역사를 쓰고 있다.

넷째로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헌법 제1조 2항). 이 당연한 진리를 우리는 그동안 잊고 살았다. 총칼을 앞세워 불법으로 집권한 이는 물론이고 유권자가 선출한 대통령도 국민 위에 군림했다. 그들은 제왕이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통치를 받는 존재에 그치지 않는다. 국민은 대표자를 선출하는 주권자다. 국민은 모든 권력의 원천이다. 이 진리를 우리는 촛불을 치켜들고서야 알게 됐다.

대한민국호는 지금 역사적인 항해를 하는 중이다.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가 국회 문턱을 넘더라도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까지는 갈 길이 멀다. 마음속 촛불을 끝까지 꺼서는 안 되는 이유다.

더 중요한 건 탄핵 이후의 대한민국이다. 위장된 축복에 만족해선 안 된다. 주인이 종을 내쳤다고 박수 칠 일은 아니다. 앞으로의 항해는 더 험할 수 있다. 권력이 아닌 국민만 바라보는 공복(公僕)을 골라내는 밝은 눈, 꼭 필요하다.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목적지는 아직 멀었다.


김 종 윤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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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