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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이야기 해줄까 #3. 미묘 - 어둠 속 목소리 (3)

꿈인 듯 묘의 차가운 감각 사이로 미의 손길이 느껴졌다.
온기 어린 손가락들이 머리 위로 다가왔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여기 있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있다.”
 
어둠 속에서 미의 목소리가 들려왔기에 묘는 조금은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호수를 휘도는 바람 소리가 멀리 들렸다.
묘는 잠시 자기가 의식을 잃었음을 깨달았다. 두 팔이 얼음판에 단단하게 달라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손만 뻗으면 된다 했으니, 미는 분명 어둠 어딘가에 있을 거였다. 그와 다정하게 마주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 내어 미를 부르지 않아도 그의 반경을 알 듯했다. 거칠게 내뱉는 뜨거운 숨, 얼음판 위로 얇게 쌓인 눈을 밟으며 움직이는 발자국 소리, 불안의 그림자가 어린 두 개의 눈동자 같은 것으로 미는 구멍 주위를 맴돌고 있겠지. 밤의 정령처럼 빠르고 은밀하고 정확하게 어둠을 오가며 평소 미답지 않은, 이제까지는 묘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미로서. 그런 생각을 하며 묘는 어둠 속 어딘가의 미를 그리워했다.
 
눈발 섞인 찬바람이 묘의 부어오른 눈으로 불어왔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귀가 예민해졌다. 인간의 몸은 신기해서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하나가 일어섰다. 바람 속을 떠다니는 것들의 소리가 또렷하고 섬세해졌다. 묘는 얼음판 위로 포갠 두 팔에 턱을 올리고 어둠의 어느 한 곳만을 바라본다. 작은 그림자들이 생겨나고, 그림자는 이내 음표 모양이 되어 허공을 떠돈다.
묘는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달의 빛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눈바람이 휘몰아쳐도 어딜 가나 달은 아직 하늘에 걸려있고, 달은 낮이 되어도 지는 일이 없다. 이렇게 밤 같은 깜깜함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달은 그 밤의 중간, 혹은 어둠의 뒤편에 떠 있을 것이다. 그는 절박했지만 어쩐지 편안한 마음이었다.
이제, 묘는 물의 결을 따라 구멍 속으로 완전하게 빨려들었다.
무엇도 상상할 수 없었다. 감각이란 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빠르게 흐르는 물결 사이로 온통 떠다니는 음표들만 가득했다. 달빛과 깜깜한 밤과 얼어붙은 호수와 눈발 섞인 바람의 장면 같은 것들이 모두 음표가 되었다.
갑자기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억센 손아귀의 힘이 느껴졌다.
우악스럽네. 희미하게, 묘는 생각했다. 조금만 부드럽게.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한 것도 같다. 이제 그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여겼다. 무언가를 놓는다는 게 이렇게 쉬운 것인가 싶어 그동안 붙잡고 있었던 것들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었다. 시간이라는 것이 형체가 있다면 아마 저렇게 수천 개의 떠도는 음표들로 조각나 있지 않을까.
 
“살아야지. 살아서 이 호수를 건너야지.”
 
미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웅웅거리며 울리긴 했어도 분명한 단어들이 묘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은 귀로써 듣는 말들이 아닌 어떤 감각으로 전해지는 느낌 같은 거였다.
묘는 머리카락을 그러잡은 손가락들을 따라 얼음판으로 조금씩 올라왔다. 몸이 어딘가로 통째로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어느 곳도 움직일 수 없었다. 손가락이나 발가락 어디쯤이 툭툭 튀어 오른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솟아나고 튀어 오르기도 하겠지.
 
“얼마든지. 이 호수에서라면….”
 
묘의 입에서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괜찮아? 괜찮아?”
 
미가 묘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묘는 금방 죽을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입에서 침이 섞인 진득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머릿속으로 미의 목소리만 가득 찼다. 눈이 심하게 따끔거려 이리저리 찌푸려 봐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얼굴을 감싸는 미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벌겋게 부어오른 눈 주변을 함부로 쓸어내렸다. 입에서 흘러내리는 진득한 침을 핥아 먹기라도 할 것처럼 얼굴을 비벼댔다. 묘는 바들거리는 자신을 끌어안는 미를 느꼈다. 마치 무언가를 자기 안으로 밀어 넣는 듯한 깊은 포옹이었다.
 
“나뭇가지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사방으로 뛰었다. 묘인 네가 없는데도 미인 나는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내달렸다. 그래서 이 모양이 되었다. 너를 저 검은 구멍 속에서 어떻게 건져냈는지 나도 알 수가 없다. 나는 줄곧 기어와 네 머리카락을 그러쥐었다. 얼음판 위인데도 미끄러지지 않고 뒤로, 이렇게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그건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는 힘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너 없이 얼음판 위를 혼자 뛰었으니 나는 이제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너를 향해 이곳까지 기어 왔다. 네가 그리워 죽을 것만 같았다.”
 
미가 알 수 없는 말들을 쉬지 않고 그러나 느릿느릿 쏟아냈다.
 
“플, 플래시는?”
 
“응?”
 
“네가 내게 비췄던 플래시 말이다.”

 
묘는 희미하게 보였던 미의 플래시 불빛을 기억했다. 구멍 속에서 홀로 견뎌야 했던 극한의 시간들을 분명 기억했다. 구멍 속에 조금 더 있으라고, 몸이 얼어붙겠지만 늘 옆에 있다는 미의 말도 기억했다. 미는 말이 없고 울음 같은 바람 소리만 들려왔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플래시라니. 여기서 그런 게 어디 있겠냐.”
 
미가 대답했다. 묘는 젖은 몸으로 매서운 추위를 견디는 중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입을 다물고 싶었다. 묘는 미가 자기의 눈을 함부로 훑어내리고 더듬게 내버려 두었다. 환영 같은 걸 보고 듣고 느낀 건지도 모르지. 극한의 상황에서 눈이 무너지자 귀가 일어선 것처럼 의식이 멀어지면 악마 같은 환영이 파고들 수 있겠지.
얼마든지.
달이 뜨고 바람이 눈을 휘모는 이 호수에서라면 얼마든지. 그 모든 게 사실이든 아니든 옆에 미가 있다는 것, 그것이 지금 순간의 다였고 모든 것이었다. 그래서 크게 두렵지 않을 수 있었다. 호수를 건너는 일이든 그것이 이전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느껴지는 미이든.
 
“호수를 건너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곳곳에 너무 많다. 봐라, 그 얼음의 사람들 사지를 꺾어내고 가져온 옷들이다. 이 한 보따리 옷을 썰매처럼 밀며 너에게 기어 왔다, 내가.”
 
묘의 손에 미가 옷가지들을 쥐여 주었다. 감각 없는 손이라 묘는 외투를 떨어뜨렸다.
 
“사방으로 구멍도 너무 많다. 이렇게 두껍게 얼어붙은 호수에 구멍이라니 상상이나 했겠냐. 너도 몰랐지?”

 
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가 묘를 더 꼭 끌어안았다.
 
“나는 이제 죽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곧 잠이 들 수도 있겠지. 이렇게 추운데 자꾸 잠이 쏟아진다.”
 
묘가 치아들을 딱딱거리며 말했다.
 
“아니, 아니. 내가 여기에 있으니 너는 괜찮다. 잠들지 않을 수 있게 내가 언제라도 너를 깨워줄 것이다.”
 
묘는 미를 믿었다. 그의 말들을, 자기를 끌어안은 미의 손아귀 힘을.
 
 
*
 
 
“하지만 묘.”
 
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미의 말을 들었다. 바람은 여전한데도 서서히 몸의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걸을 수 없겠다.”
 
분명 이전과 달라진 미의 말투였다. 어딘가 모르게 힘이 실렸다. 묘는 그건 느낌일 뿐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분자들의 세계라 생각했다. 자신의 옷을 벗겨내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히는 미의 손길이 고맙기만 했다. 미가 있다면 호수를 건너는 일쯤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죽지 않고 얼음 위를 벗어나 건너편의 단단한 땅에 닿을 수도 있다. 살아오는 동안 묘는 미가 그렇게 간절했던 적이 없었다. 묘는 손가락을 오므리고 팔을 들어보았다. 감각이 돌아왔다. 몸이 그렇게 빨리 회복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눈을 만져보니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손끝이 닿을 때마다 눈두덩에 찌릿찌릿 통증이 일었다.
미가 묘의 머리에 털모자를 씌우고 머플러 같은 걸 둘러주었다. 묘는 얼음판 위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미를 만지고 싶어 손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어디 있어? 응?”
 
미는 대답이 없었다. 묘는 미를 찾아 얼음판 위를 기어 다니며 더듬었다.
 
“여기, 여기.”
 

손안으로 미의 손이 뱀이 스며들 듯 미끄럽게 들어왔다. 흠칫 놀란 묘는 미의 손이 이끄는 대로 쭈그려 앉았다.
 
“왜 이러고 있어. 왜 엎드려 있는 거야?”
 
“나는 더 이상 걸을 수 없겠다고 말했지 않냐.”

 
미가 말했다. 이어 사방으로 뛰어다녔던 자신의 여정을 들려주었다. 호수를 건너지 못하고 얼어 죽은 채 웅크린 자들을, 구멍 속에 다리가 빠져 그대로 굳은 자들을, 사방의 구멍들을 전해주었다. 묘는 계속 쪼그려 앉아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미의 말을 들었다.
 
“부메랑 같은 게 날아왔다.”
 
“부메랑?”

 
“칼날처럼 길고 날렵한 날이 달린 거였다. 그게 바람 속을 날아와 두 다리를 잘랐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내 다리를 자르고 바람 속 어딘가로 돌아가는 부메랑 칼날 말이다.”
 
“그래.”

 
묘는 놀랐지만 되도록 동요 없는 답을 해주고 싶었다. 흔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게 다였다.
 
“하지만 팔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사방이 구멍이고 죽은 자들이고 바람 속에서 언제 또 칼날이 날아올지 모른다. 우린 그런 호수 위로 내던져졌으니까.”
 
미가 말을 마치고 헤헤 웃었다.

작가 소개    
동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단편 『아칸소스테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창작소설집 『마리 오 정원』
테마소설집 『2012신예작가』
12월 테마소설집 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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