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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35. 꼭두각시놀음

“일곱 살이니 내가 너무 어렸지. 그래서 아빠가 재혼을 서둘렀다는데 새엄마가 나한테 정말 잘해주셨어. 친엄마가 살아계셨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하긴 힘들었을 거야.”
 
그는 스스로 엄마의 부재로 인해 비어있는 자리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며 씩씩하게 자랐다고 했다.
 
“그런데 누나를 만나면서 알게 된 게 있어. 잘해주려고 노력하는 감정과 저절로 우러나오는 감정이 다르다는 것. 내게 엄마의 빈자리가 없었던 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며 살았던 거였어.”
 
썬은 그런 자신의 감정 때문에 새어머니에게 죄송했다며 잠시 목이 잠겼다.
 
그동안 어떤 때도 그의 밝고 유쾌한 웃음이 지워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 이야기에선 어쩔 수 없이 어린 소년의 표정이 살아나왔다.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는 누나 못 보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닌 거지? 복잡한 일 정리되면 다시 연락할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쩌면 나도 썬도 다시는 못 볼 거라는 걸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1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고 우리는 깊게 정 들어 있었다.
 
“나도 누나 몰래 다른 여자애들 사귄 적 있어, 미팅도 하고 소개팅도 많이 했어. 어떻게 보면 내가 더 나쁠 수 있어.”
 
택시 정류장 앞에서 썬이 말했었다. 훤칠한 큰 키에 하얀 츄리닝을 입고 있던 1년 전의 모습이 떠올라 한참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학교에서 처음 너 봤을 때 일찍 태어난 게 원망스러운 생각이 들었지. 너처럼 멋진 애랑 같이 못 다닌 게 너무 아쉬워서... 우리 땐 책만 끼고 다니는, 뿔테 안경 범생이들만 있었거든.”
 
썬이 큰 소리로 웃었다. 웃음소리가 차가운 공기 속으로 경쾌하게 퍼져 나갔다. 썬의 유쾌한 웃음이 마음의 짐을 한결 가볍게 해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헤어질 수 있어 다행이야... 할 수만 있다면 썬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여자 만나지 말고 귀엽고 발랄한 비슷한 또래를 만나. 넌 멋지잖아... 금세 예쁜 여친이 생길거야.”
 
“나 아직 괜찮은 청년이야. 아무데나 떠넘길 생각하지 마라...”
 
택시에 오르자 기분 좋은 웃음으로 손을 번쩍 들어주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택시가 멀어질 때 까지 그가 거기에 서 있을 거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다시는 우리가 만나지 못할 거란 걸 그가 알고 있듯이...
 
썬은 여자들을 만나며 자신도 모르게 그들에게서 엄마의 따뜻함을 느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나 역시 남자들을 통해 내 속에 부재였던 아빠를 찾고 있었는지도.
 
내가 아빠를 미워한 이유는 엄마를 버려서라고 생각했다. 아빠의 외도가 우리 가정과 가족을 위태롭게 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배후엔 늘 나 자신, 내 개인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아빠를 뺏기는 게 싫었던 거였다. 내가 차지해야할 지분을 그 여자와 나누는 게 싫었던 거였다.
 
그러고 보면 아빠를 증오한 건 순전히 내 이기적인 상실감 때문이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나는 뼈 속까지 이기적인 사람이었던 거다. 엄마를 위해서라고 정의에 불타는 것처럼 굴었지만 결국 나를 위한 것이었던 거다.
 
썬은 나를 통해 엄마의 부재를 발견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빠의 부재를 발견하지 못했고 환부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치유도 불가능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기주의자였다.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빠를 내 마음의 단두대에 올려놓고, 그걸 빌미삼아 스스로에겐 면죄부를 씌워놓은 지독한 이기주의자.
 
썬은 헤어지기 전에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집에 돌아왔지만 이마에 닿았던 그의 입술 느낌이 선연했다. 썬과의 마지막 입맞춤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연락이 잘 안되니 걱정돼서 했어. 시간 날 때 전화 줘.’
 
튜즈는 전화를 받지 않자 문자를 남겨놓았었다. 집으로 돌아와서야 튜즈의 문자에 집으로 돌아와 답을 했다.
 
‘급하게 정리해야할 일이 좀 있어. 이틀정도 후 연락할게. 만나서 이야기 해’
 
그러겠다고, 정리 잘 하라고, 기다렸다는 듯 금세 튜즈의 답이 날아왔다.
 
어쩌면 한정현이 튜즈에게도 접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에프가 남긴 파일들을 확인 하는 일이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니까.
 
샤워를 마치고 태블릿을 켜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늦은 저녁시간에 미리 연락하지 않고 나를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디오 폰의 모니터 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오비서관이었다.
 
“무슨 일이예요?”
 
오랜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부 인사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미주씨.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요. 잠깐이면 돼요.”
 
“오피스텔 1층에 카페가 있어요. 거기서 뵈어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오비서관이 다급하게 말했다.
 
“사람들 눈에 띄면 안되는 일이라... 저 아시잖아요. 들어가서 말씀드릴게요. 잠깐이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띄면 안되는 사람들, 이란 의미가 한정현을 말할 수도 있겠다 싶어 일단 기다리라고 해놓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오비서관 이라는 사람 자체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쥬디에게 문자를 했다. 공항까지 뒤따라갔던 문제의 그 오비서관이 지금 내 집을 방문했다고.
 
쥬디는 문자로 캠 프로그램하나를 보내왔다.
 
‘검색해서 노트북에 이 프로그램을 깔고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내게 보내 줘. 노트북을 켜놓기만 하면 내 핸드폰으로 실시간 볼 수 있어.’
 
쥬디가 시키는 대로 세팅을 해서 거실테이블에 노트북을 열어놓고 문을 열었다. 오비서관은 급하게 현관으로 뛰어들었다. 쫒기는 사람처럼 조심스레 슬쩍 뒤를 한번 살피고는 얼른 문을 닫았다.
 
“놀라셨죠, 미주씨.”
 
뭔가에 놀란 듯 보이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오비서관이었다. 얼굴은 창백해 있었고 눈은 겁에 질린 듯 보였다.
 
노트북의 캠 렌즈가 열려있는 방향으로 오비서관의 자리를 안내했다. 오비서관은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소파에 덜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곤 앞에 놓인 주스 한 컵을 단숨에 비웠다.
 
“이야기하세요...”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제가 오피스텔에 있던 컴퓨터랑 집기들을 한회장님께 갖다 드렸거든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는 내가 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의원님이 무슨 이윤지 오피스텔에 몰래카메라 같은 걸 설치해두셨던가 봐요. 그 녹화된 파일이 컴퓨터에 있는지도 모르고 제가 그걸 한회장님께 드렸나봐요...”
 
“거기엔 제 영상도 있다는 말이네요..”
 
“그러니까요. 미주씨하고 의원님하고 대화하고 하던 게 그대로 있었던가 봐요.”
 
“그래서요?”
 
내가 너무나 초연하게 물어선지 뭔가 이야기하려던 오비서관이 갑자기 말문이 막힌 듯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한정현이 나를 설득하라고 하던가요?”
 
“아니, 아니에요. 그 분이 시키서 온 게 아니에요.”
 
“시키지 않았다고 해도 결국 제게 원하는 건 같은 거겠죠?”
 
오비서관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일일이 마음 쓰는 걸 좋아하던 그였는데 그의 눈빛이 예전 같지 않았다.
 
“미주씨.. 멈추세요...”
 
“한정현이 그러라고 해요?”
 
“제가 스스로 왔어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죠?”
 
“내가 미주씨 아끼니까요.”
 
“저를 왜 아껴요? 오비서관님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오비서관이 나를 아끼다니. 뜬금없는 개그 같았다.
 
“의원님이 아끼셨던 분이니까요...”
 
내가 아는 오비서관은 착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챙기기보단 남을 위해주는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주변을 배려하고 사랑하려 애쓰던 사람이었다.
과거에 알았던 그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고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정현한테 말해요. 내가 가진 파일 다 오픈 할 거고... 의원님 그렇게 된 거 내가 모두 밝혀낼 거라고.”
 
“하지말라고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비서관이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를 쳤다. 그리곤 자신의 소리에 놀라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뭘 하지말구요?”
 
“둘 다... ”
 
“....”
 
“파일 오픈 하는 거... 그리고 의원님 그렇게 되신 거... 둘 다 하지마요. 미주씨는 몰라요.. 그 사람이 뭘 계획하는지... 지금 미주씨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 멈춰서... 그가 하고자하는 일을 순조롭게 하도록 내버려 둘까요? 그렇게 하면 저는 안전한가요? 안전하게 길게 그렇게 살아볼까요?”
 
“미주씨. 현명하게 판단하세요. 저들이 가진 영상이 먼저 언론 쪽으로 넘어가면 의원님은 두 번 죽게 되는 것과 같아요....”
 
‘장현수 국회의원 내연녀가 알고 보니 정치부 기자와도 애인사이... 이런 기사가 대문 짝 만하게 실리는 날이 오면...’
 
한정현이 에프에게 했던 협박과 똑 같은 말을 지금 오비서관이 하고 있었다.
 
“결국 미주씨는 지저분한 로비스트나 불륜녀로 낙인 될 거예요. 의원님이 그걸 원했을까요? 의원님이 그렇게 되신 건 미주씨한테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으려하시다 그렇게 되신...”
 
“그게 무슨 말이에요? ”
 
그는 말을 멈추고 스스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 때문이라는 말이 무슨 말씀이죠?
 
“아.. 미주씨.. 제가 말을 잘못 했네요. 그런 뜻이 아닌데.... 저기... 미안한데 차가운 물 한 잔만 주시겠어요?”
 
한정현이 에프를 협박하는데 나를 도구로 쓴 것 까지는 나도 영상을 통해 본 것이었다. 하지만 에프의 죽음과 내가 직접적으로 무슨 연관이 있다는 듯한 말의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오비서관은 머그잔에 가득 받아온 물을 단숨에 마셨다. 그가 내 집에 온 게 스스로 온 것이든 한정현이 시켜서 온 것이든 내 집에 발은 들인 이유는 분명했다. 태블릿에 있는 파일을 공개하지 말라는 것.
 
스스로 판단해서 온 거라면 나를 위해 조언하려는 것이겠지만 한정현이 시킨 거라면 협박을 하러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짧은 시간동안 폭삭 늙어진 것 같았다. 몸집은 전체적으론 별 차이 없어 보였지만 전에 없이 얼굴 볼 살이 움푹 패어있었다. 한정현의 하수 노릇이 쉬울 리 없을 거란 생각이 들자 그가 측은해보였다.
 
“미주씨... 정말 위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멈추셔야 해요.”
 
“제가 가진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저는 의원님 죽음에 대한 진실 밝혀낼 거예요. 분명 한정현이 죽인 거예요. 그가 실토하도록 만들 거예요.”
 
오비서관은 테이블로 바싹 다가앉았다.
 
“안돼요, 미주씨... 위험해요..”
 
어떻게든 나를 막아야한다는 생각이 앞섰는지 정말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다급한 목소리였다.
 
“마주씨는 몰라요. 한회장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이 어떤 일을 꾸미고 있는지... ”
 
어떻게든 나를 설득해보려는 오비서관의 몸짓과 절박한 눈빛이 내게 고스란히 읽혀졌다.
 
“그래요, 저를 죽이려고 하겠죠. 제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제가 복사해 놓은 파일들은 순식간에 언론사로 보내질 거예요. 그러라고 해요. 의원님도 죽였는데 저 하나 죽이는 게 문제겠어요?”
 
“의원님은... 의원님은 그렇게 죽은 게 아니에요. 실수로, 협박하다 실수로 그들이 죽인 거예요.”
 
오비서관이 울음을 터뜨리며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였다.
배터리가 다 됐는지 노트북에선 초록 불이 깜박이고 있었다.
 
<목요일에 계속됩니다>
그림=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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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