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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도 경영 참여, 시험대에 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일러스트 강일구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외환위기를 겪은 지 19년이 흘렀다. 많은 것이 변했다. 급격한 개방화와 세계화는 한국의 경제체제를 뒤흔들었다.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의 유입은 경제·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꿔놨다. 그러나 지금의 자본주의가 한국에 적합한지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는 주주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했다. 독일식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바꿔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실제로 많은 시도가 진행 중이다. 근로자가 경영에 참여하도록 한 서울시의 근로자이사제 시행을 계기로 한국의 자본주의 진로 논쟁을 짚어봤다.



외환위기, 그 후 19년 … 한국 자본주의 진로 논쟁

 

서울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산하 공공기관에 근로자이사제도를 도입해 12월 시행에 들어갔다. 지난 10월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근로자이사제도 조례 제정 기념 토크콘서트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 넷째)은 ?노사 공동 의사결정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서울시청]



“체제의 근본을 이해하고 접근하라.”



지난 5월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기자 브리핑에서 한 말이다. 서울시가 근로자이사제 도입을 추진하자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근로자이사제는 근로자 대표가 기업 이사회에 참여하는 제도다. 독일이나 북유럽에서는 오래전 자리를 잡았다. 이 장관의 반대에도 박원순 서울시장은 근로자이사제를 밀어붙였다. 지난 9월 관련 조례안이 서울시 의회를 통과해 공포됐고, 이달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박 시장은 지난 10월 17일 ‘근로자이사제 조례 제정 기념 토크 콘서트’에서 “한국 사회에서 처음 도입되는 제도”라며 “산업 평화와 경제 번영을 이루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장기적으로 독일 등 유럽에서 운영되는 경영협의회, 노사 공동 의사 결정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 시장의 뜻대로 연내에 한국에서는 근로자를 대표하는 첫 이사회 멤버가 나올 전망이다. 박진영 서울시 공기업담당관은 “근로자이사제를 의무 도입하는 서울시 산하 13개 공공기관의 정관 개정이 대부분 마무리됐다”며 “기관별로 선거를 통해 12월 중 근로이사를 뽑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은 지난달 29일 보고서를 내고 이를 비판하고 나섰다. 한경연은 “서울시가 모델로 삼은 독일식 근로자이사제는 오랜 시간 실험을 통해 누적된 노사 간 신뢰관계가 바탕이 돼 있다”며 “노사 간 신뢰가 구축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근로자이사제를 실험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를 쓴 이상희 한국산업기술대 지식융합학부 교수는 “근로자이사제 도입이 향후 국가 공기업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에 대해 중앙정부가 정책 수단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정부가 나서서 막으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 박진영 담당관은 “재계를 대변하는 한경연이 반발하는 것은 근로자이사제가 다른 지자체나 공공기관으로 확산하고 결국 민간기업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외환위기 이후 주주 자본주의 대거 유입]

‘최순실 사태’가 모든 이슈를 집어삼키고 있지만 서울시의 실험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향후 자본주의의 진로, 즉 ‘한국이 어떤 자본주의를 택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기권 장관이 말한 ‘체제의 근본’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 장관은 당시 “근로자이사제는 유럽과 상당히 다른 한국의 노사관계 체제에 맞지 않는 요소”라고 말했다. 이는 기업의 의사결정은 누가 하는가, 더 넓게는 ‘기업의 주인(Owner)은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연결된다. 누가 기업의 주인일까. 경영자인가, 주주인가, 노동자인가. 아니면, 모든 이해관계자인가.



정답은 없다. 선택의 문제다. 어떤 체제, 어떤 자본주의를 지향하는가에 따라 답이 갈린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를 지향하는 독일에서 노동자의 경영 참여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독일은 1920년 경영협의회법, 50년 공동결정법 등을 통해 노동자가 기업 경영에 개입하도록 법제화했다. 반면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을 받드는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주주 이익을 최우선 하는 주주 자본주의와 달리 경영자·주주·노동자·지역사회·거래기업 등 모든 이해 당사자의 경영 참여와 합의를 중시하는 개념이다. 서울시의 실험이 여기에 해당한다.



한국은 98년 외환위기 이후 IMF 주도 아래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를 수혈받았고 경제체제로 자리 잡았다. 이 장관이 말한 ‘체제’는 곧 주주 자본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주주 자본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특히 2003년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과 소버린 사태가 터지면서 자본주의 진로 논쟁이 본격화했다. 소버린 사태는 2003년 4월 헤지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이 SK의 지분을 대량 매입해 2대 주주로 등극하면서 경영진 퇴진 등을 요구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소버린은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이고 자본의 국적은 중요치 않다”는 논리로 SK그룹을 공격했다.



 

[근로자를 사외이사 추천 법 개정안 발의]

이를 두고 진보 성향의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와 대안연대가 대리전을 벌이기도 했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의 주도로 소액주주운동을 벌여온 참여연대는 SK그룹의 지배구조를 문제 삼으며 소버린을 옹호했다. 반면 이찬근 인천대 교수,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주도한 대안연대는 “주주 가치 극대화 원리에 입각한 기업 지배구조 개혁은 투기적 금융자본을 정당화하는 논리”라며 참여연대를 비판했다. 두 단체는 서로 ‘외국 자본의 들러리’ ‘극좌 민족주의자’라며 거세게 충돌했는데, 이는 곧 주주 자본주의(참여연대)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대안연대)의 충돌이었다.



이후에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한국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끊이지 않았다. 더욱이 이를 옹호한 것은 진보·좌파 학자들만이 아니었다. 2005년 5월 당시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은 전경련이 주최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지금은 주주만이 아닌 고객, 협력업체, 지역사회, 경쟁사들까지 가치 제고의 대상에 포함하는 이해관계자주의가 확산하고 있다. 사회적 책임 부담이 기업에도 약이 된다.” 2012년에는 김석동 당시 금융위원장이 “바람직한 자본주의가 정착하려면 정부와 기업, 자본시장이 모두 참여하는 심도 있는 논의와 연구가 필요하다”며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얘기를 꺼냈다. 그는 “기업의 의사 결정 시 주주·채권자·종업원·정부 등 모든 이해를 아우르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개념이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 대안으로 대두하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이근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2017년 한국경제 대전망』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미래상은 지속 가능한 성장, 안정적 고용과 분배를 축으로 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고 주장했다.



이런 흐름은 정치권에서도 나타난다. 지난 9월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는 근로자 1인을 사외이사로 추천하는 내용을 담은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여기에 김종인 더불어 민주당 의원이 국회의원 122명의 동의를 얻어 대표 발의한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커졌다. 세칭 경제민주화 법안에는 감사위원 분리 선출, 집중투표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제 등이 포함돼 있다. 또한 최대 주주와 특수 관계인은 사외이사 후보추천위원회의 위원이 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우리사주조합과 소액주주들이 추천하는 사외이사 각 1인은 반드시 선임하도록 했다. 재벌 개혁 또는 경제민주화를 내세우면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강화한 것이다.



 

[어떤 자본주의를 택할 것인가, 공론의 장 열려야]

자본주의 논쟁은 오랜 역사가 있지만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전 세계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반복된 경제위기와 저성장의 원인이 자본주의, 정확히는 주주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는 인식이 확산했다. 심지어 자본주의가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세계체제론을 연구한 이매뉴얼 윌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는 그의 책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에서 “자본주의는 하나의 역사적 체제이며, 모든 체제에는 수명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2050년께 자본주의가 소멸할 것으로 내다봤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책도 봇물을 이뤘다. 영국의 경제학자 앤드루 글린이 쓴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대표적이다. 글린 교수는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와 주주 자본주의가 엮이면서 1930~70년대 고성장·저실업의 황금시대(Golden age)가 막을 내리고 저성장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주장했다.



시장경제론자까지 가세했다. ‘쇼터미즘(short-termism·단기실적주의)’이 기업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는 이론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이는 대놓고 “주주는 기업의 주인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해 파이낸셜타임스에 쓴 칼럼에서 “회사의 주인은 주주이며 이사회의 역할은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라지만 놀랍게도 미국에는 그런 법률이 없다. 영국 기업의 주주도 절대로 회사의 주인이 아니다”고 썼다. 잭 웰치 전 GE 회장은 “주주 가치를 CEO의 주요 목표로 삼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런 비판에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다. 이에 대해 장하성 교수는 “자본주의의 종말이 오지 않은 것은 자본주의가 최선의 선택이거나 잘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대안이 없어 지금의 체제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라며 “지금의 자본주의에 문제가 있다면 고쳐서라도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만드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했다.



한국에 더 나은 자본주의는 무엇일까. 주주 자본주의는 악이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선일까. 이언 브리머 유라시아그룹 회장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썼듯이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주주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제로 인해 세계 경제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는 지적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또한 어떤 자본주의가 좋은 것인지 정답은 없다.



냉철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우리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선에서 양쪽의 조합을 적절하게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 미래에는 중국식 국가자본주의가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 잡을 수도 있고,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요소가 반영된 자본주의가 대세가 될 수도 있다. 또는 지금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자본주의가 나올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자본주의를 원하는가. 서울시의 근로자이사제 도입과 기업 지배구조를 바꾸는 상법 개정안은 그 답을 찾는 과정이다. 더욱 치열한 공론의 장이 열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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