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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하나로 바다 누비는 담대한 여성성에 세계가 공감

인류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의 모습. 유네스코는 산소통 없이 숨 하나로 물질을 하는 제주 해녀를 자연과 공생하는 공동체 문화로 전승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중앙포토]



마침내 세계가 인정했다. 제주도의 해녀문화가 지난 1일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숨 하나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숨 하나로 바다를 누비는 해녀. 가장 자연친화적인 인간인 해녀들이 바다와 만나 생명력을 교감하는, 이 경이로운 해녀문화를 유네스코가 공감했다. 제주 해녀라는 아주 지역적인 정체성을 인류의 소중한 문화이자 위대한 세계 보편의 가치로 받아들였다.



인류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제주 해녀

제주 해녀문화는 한국의 19번째 인류 무형문화유산이 됐다. 2014년 3월 등재 신청 후 2년8개월 만에 맺은 결실이다. 유네스코는 산업화와 지구화 과정에서 급격히 소멸되고 있는 무형문화유산을 보호하고자 2001년부터 인류 무형문화유산을 지정·등재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왜 해녀문화를 세계인이 같이 공유할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했는가. 제주 해녀는 과연 어떤 존재이며, 어떤 의미인가.

해녀가 박의 씨를 파내고 구멍을 막아 만든 테왁을 메고 있다. 해녀들은 물질 때는 테왁을 물위에 띄워놓고, 물 밖으로 나와선 테왁을 잡고 휴식을 취한다. 손에 든 건 전복 등 해산물을 캘 때 쓰는 빗창이다. 사진 허영선, [중앙포토]

[살아 있는 자연과 공생하면서 지속 가능]

제주 해녀들은 그 물음에 맨몸으로 답한다. 바다와 생태친화적인 존재가 만나는 지점에 그녀들이 있다. 산소통 하나 없이 오로지 맨 몸으로 바다로 투척한다. 테왁 하나에 둥둥 몸을 의지한 채.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대해에서 숨비소리를 낸다. 어머니에서 딸,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전승되는 해녀문화. 유네스코가 보편적인 가치로 삼은 까닭은 세대 간 전승문화에 있다. 자맥질로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은 여성의 주체적인 역할이란 점이다. 해녀의 고령화 등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문화유산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연과 공생하면서 지속적으로 전승·보전할 공동체로 인정한 것이다.



여성성 회복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도 통했다. 지금까지 이처럼 여성이 주체가 된 무형문화유산이 있었던가. 물질 기술 외에도 민속지식으로 이어져온 ‘살아 있는 문화유산’을 인정했다는 의미도 있다.



또 하나는 지역 공동체란 정체성이다. 제주도 내 어촌계는 100개. 해녀들은 저들끼리 희로애락을 나눈다. 그 공간에서 눈물도 기쁨도 같이 나눈다. ‘칠성판을 등에 진’ 위험한 물질 작업은 해녀들을 끈끈한 인간적 유대로, 늘 기도하는 자세로 임하게 한다. 그녀들에게 잠수굿은 스스로의 안녕을 위해, 그리고 바다에서 사고로 해마다 물숨을 먹고 세상을 뜨는 동료 해녀들을 위한 무속의례다. 유네스코는 해녀 공동체 연대를 강화하는 잠수굿과 배 위에서 부르는 노동요인 ‘해녀 노래’도 소중한 유산으로 인정했다.



해녀들은 항상 테왁 위에서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작업을 한다. 전복이나 오분자기를 키우는 어장에서는 해녀의 나이가 많든 적든 같이 작업하고 판매, 분배한다. 소라 한둘 부족해 10㎏을 채우지 못한 이에겐 하나둘을 더 주고 채워준다. 젊어서 상군(최고의 기량을 갖춘 해녀)이었던 해녀들도 늙음은 순리. 늙어 힘들어지면 수심 얕은 곳에 만들어진 ‘할망바당’으로 이동한다. 인간적 배려다. 제주바당 올레를 한 바퀴 걸어보라. 검은 돌담을 쌓아 만든 바닷가의 작은 공간들을 만나게 된다. 바다에서 나와 몸을 말리는 ‘불턱’이다. 이곳은 그녀들의 해방공간이었다. 지금처럼 현대식 탈의장이 없던 시절 해녀들은 여기서 불을 피우며 서로의 삶과 지혜를 소통했다. 해녀들만의 자유로운 의사결정권으로 바다밭을 가꾸고 어장을 보호한다. 해녀들은 물질하고 번 돈으로 집 사고 밭도 샀다. 그 수익금을 마을길을 조성하거나 학교건물을 짓는 데 내놓기도 했다. 이러한 해녀 공동체 문화는 지속 가능한 마을 재생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해녀, 인간문화재나 마찬가지 아니우꽈”]

“날개라도 단 것 같다.”



해녀의 무형문화유산 등재에 대해 해녀 홍경자(65·제주시 한림읍 한수리)씨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부터 미천한 직업처럼 보여 동창들 모이면 물질한다는 말도 못했는데, 이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요. 전문직 여성으로 발돋움했다는 거지요. 이제부턴 내 몸이지만 내 몸을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다는 자부심이 들고, 하루 5~6시간 하던 물질도 4시간으로 줄이면서 안전하게 해야 할 것 같아요. 여든 살 될 때까지 오래오래 하고 싶어요. 해녀 개개인이 인간문화재나 마찬가지 아니우꽈. 해녀들이 자긍심 갖게 하는 교육도 더 필요합니다.”



해녀들은 바다 지형과 조류, 물때, 바람, 채취물 등 해양 지식을 경험을 통해 체득한다. 50년 물질에 ‘공부박사’는 못 됐지만 ‘바다박사’는 됐다는 그녀. 해녀가 줄어들고 있는 문제점과 바다 아열대화와 오염으로 어장이 황폐화해 가는 현실에 대해서도 짚는다. “바다 자원이 줄면 수입이 줄고 해녀도 힘들어진다. 후배 해녀들을 양성하는 것도 힘들다”는 지적이다.



 

[“보험도 못 드는 현실, 정부가 도와줬으면 … ”]

젊은 여성들이 취미로 다이버는 배우려 하지만 해녀는 하지 않으려는 것이 이상하다는 그녀. 밭일 하다가도 몸이 뻐근하면 몸 풀러 바다로 간다. 밭에선 일하다 쓰러지면 119라도 부르지만, 바다밭이 그러한가. 위험직종이라서 해녀는 보험회사의 보험도 못 드는 현실이란다. 그녀의 바람이다. “해녀가 없어지면 사철 바닷속 해산물도 못 먹어요. 그런 것들을 정부에서 제도적으로 해주면 좋겠습니다.”



“우리 어멍 날 날 적에/무신 날에 날 낫던가…”(우리 어머니 날 낳을 때 어느 날에 낳았던가.)



‘해녀 노래’의 한 대목이다. 해안가에서 태어난 제주의 딸들에게 해녀는 숙명이었다. 지금처럼 고무옷이 없던 시절, 무명천으로 만든 소중이에 물적삼 하나 걸치고 한겨울 물질하다 물밖으로 나오면 맨살이 저절로 발갛게 붓고 떨린다. 일고여덟 살이면 어머니로부터 둥근 테왁 하나 들고 자맥질을 배웠다. 바다에서 돌고래를 만나도 침착해야 된다는 담대함도 터득했다. 10대에 애기 상군 소리 들으며 바다로 나갔다. 소라·전복·천초 등 해산물이 망사리에 가득 담겨져 나오기까지 물에서 노동은 5시간 이상이다. 검정 고무옷에 큰 눈(물안경), 부력을 견뎌줄 납덩이를 허리에 차고 전복을 만나면 한판에 떼어낼 빗창, 호미가 전부다. 제주 해녀들에게 바다는 무한한 생산 저장고이자 한없이 고마운 바당밭이다.



제주를 사랑하는 프랑스 태생의 노벨상 작가 르 클레지오는 “해녀는 실제로는 고기잡이의 프롤레타리아”라고 했다. 그는 해녀에게서 고통과 긍지가 섞인 감정을 발견했다고 했다.



물질 경력 50, 60년은 보통. 해녀는 은퇴 연령이 따로 없다. 최고의 바다 전문가이며 경제인이다. 해녀들은 물질 기량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 탁월한 해녀는 물속 20m까지 내려간다.



해녀들이 한 번 물속에서 참는 숨은 대개 1분에서 2분. 물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한판 승부는 바로 이 숨이 결정짓는다. 자칫 과욕은 금물. 전복 하나 더 떼려다간 바로 물숨을 먹는다.



직접 노를 저으며 뱃물질 나가던 선배 해녀들은 거친 물살의 배 위에서 아이를 낳았다. 애 낳고 사흘만에 물에 들었다는 해녀도 있다. 집을 떠난 바깔물질인 출가 물질은 1895년 부산 지역이 시작이었다. 이후 한반도 전역으로, 일본과 중국 다롄(大連)과 칭다오(靑島),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대륙을 이동했다. 초국가적 바다의 전사들이다. 한창 땐 4000여 명이 나갔다. 독도 앞바다도 1950년 초부터 70년대까지 제주 전역의 해녀들이 앞마당처럼 누비던 바다였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먼바다로 나가 해산물을 채취한 그녀들은 제주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해녀들의 강인함과 당당함은 역사가 입증한다. 두려움을 넘어선 담대함은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그때 그녀들은 화산의 불덩이 하나쯤 갖고 있던 존재 아니었을까. 식민의 시대, 일본인들의 부당한 수탈에 대항한 제주 해녀들은 촛불 대신 빗창을 들었다.



1932년 1월의 제주 해녀 항쟁이 그것이다. 제주섬의 동쪽 세화리·하도리·종달리·우도 등지에서 약 3개월에 걸쳐 항쟁에 동참한 해녀들은 연인원 1만7000여 명에 달했다. 전국 최대 규모의 여성 어민투쟁이었다. 일제의 징용물질로 고향을 떠나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서 살고 있는 해녀도 있으며, 현대사의 대비극 제주 4·3사건을 피해 일본으로 떠난 여인들은 그곳 바다를 고향 바다처럼 누볐다.



 

[일제수탈에 저항하던 해녀 정신]

해녀의 유네스코 등재는 해녀문화의 빛나는 가치의 재발견이자 재인식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그래야 지속 가능한 모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까. 갈수록 해녀 인구는 줄고 있는 현실이다. 제주도에서 현재 활동하는 해녀의 수는 지난해 기준 4377명이다. 90년 6827명에서 25년 새 2450명이 줄어들고 고령화도 급격하게 이뤄지고 있다. 해녀학교를 운영하고는 있지만 실제 젊은 해녀들은 귀하다. 60세 이상 해녀가 전체의 85.7%(3751명)이며 특히 70~79세가 42.4%로 가장 많다.



유네스코 등재는 제주 해녀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제주 해녀문화 보존과 전승이 탄력을 받을 것이란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해녀문화 전승을 위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바다 환경 정책이 수립되고 해녀문화 보전을 위한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



제주 해녀. 이 여인들의 억세고 소금기 가득한 이름은 이제 따뜻하고 생명력 넘치는 새로운 인류의 가치로 자리매김하는 시대가 왔다. 배려와 나눔의 해녀 공동체 문화는 갈수록 사막처럼 삭막해지고 있는 현대에 던져주는 전혀 새로운 상징이 아닌가.



 



 



허영선 사단법인 올레 이사, 제주대 강사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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