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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구의 NEAR 와치] 분노의 포도와 대통령의 시간

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

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

그곳에는 촛불만 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뜨겁지만 냉철한 시민정신이 함께 불타고 있었다. 진정 무엇이 그들을 아스팔트 위로 내몰고 정신적 패닉 상태에서 분노하게 했을까?

지금 우리 국민의 분노는 ‘이게 나라냐’ 하는 절규와 같이 국가의 근본에 관한 분노로서 폭발력과 가연성을 갖고 들불같이 번져나갈 수 있는 처절한 외침이다. 마치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1939)’ 처럼 붉은 분노인 것이다.

며칠 전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으로 입건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국민들은 깊이 고뇌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대통령의 친인척들이 단죄되고 심지어 대통령 본인이 자진해야 할 만큼 불행했던 역사를 또다시 반복하게 되는 현 정치체제와 생태계를 보며 탄식한다. 특히 이번에 새로 드러난 정치·자본·지식권력이 결탁한 침묵의 카르텔과 그들이 자행한 국정 농단을 보며 생존형 인간으로 내려앉아 천박해지는 주류사회의 모습에 자기실현적 위기감을 느낀다.

그러나 국민은 분노하면서도 허탈해한다. 공을 넘겨받은 국회, 특히 각 정당들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며 불안감마저 든다. 지난 1개월간 야당 등 정치인들은 국민에게 그들의 민낯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국민과 언론이 만들어 온 파격적인 상황의 전개 속에서 정치인들은 민중 뒤에 숨어 따라 하기 바빴고 리더십 부족으로 아무것도 합의하지 못했다. 막상 문제 해결의 키를 쥐고 있을 때는 자기 계산에 골몰하다 타이밍을 놓치고 이제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국민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면서도 막상 떠오르는 걸출한 대안 세력이나 인물이 없고 그들의 그릇이나 역량으로 볼 때 국정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아 두렵고 답답해한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이런 마음속의 짙은 안개비를 맞으며 60년대 말 유행했던 가요 ‘동숙의 노래’의 가사 중 한 구절이 떠올랐다.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 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놓고 뉘우치며 울어도 때는 늦으리.”

그렇다. 박 대통령을 현재의 질곡으로 이끈 불행의 씨앗은 그녀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고 짙게 남아 있는 트라우마였다. 부모의 불행한 죽음을 겪으며 생긴 깊은 원한과 상처가 미처 치유되기도 전에 그녀의 정신세계의 빈 곳을 점령한 매우 불건전한 위로세력과 배신 트라우마에 의해 지배된 박근혜식 무신불립(無信不立)이 세상을 잘못 보고 잘못 생각하게 한 것 아닐까? 그리고 오랜 은둔형 공주 생활 끝에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보답심리와 신비주의 속에 감춰진 가상 청렴성에 대한 기대심리에 힘입어 준비 없는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그녀는 대통령과 여왕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채 국민이 위임한 권력의 사유화에 골몰하는 가운데 청와대는 그녀의 왕궁처럼 변해 갔다. 그리고 그녀의 해체되지 않은 트라우마는 결국 국정에 그대로 스며들며 측근들에게 국정 농단의 텃밭을 제공하게 됐다. 실정법 위반으로 피의자가 된 박 대통령의 보다 더 치명적인 죄목은 국민정신을 무너뜨린 부도덕성과 국기를 문란하게 하고 품격을 떨어뜨린 국격 훼손의 죄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 박 대통령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마음을 가다듬어 정신세계를 온전케 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실인식을 바로잡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여기서 박 대통령이 내려놓을 것은 조금 남은 권력만이 아니라 오래 응고돼 해체되지 않은 트라우마와 양 어깨를 짓눌러온 과도한 책임도 함께 내려놓는 것임을 명찰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촛불은 계속 타고 있는데 이미 권위와 지휘력을 잃어버린 박 대통령이 민중의 쓰나미 앞에 모래주머니를 쌓으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매우 안타깝다. 지금 박 대통령이 특유의 결기와 정치공학적 전술로 시간을 벌고 있는 것 같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녀가 숨을 곳은 점점 없어질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제 더욱더 솔직하게 국민과 역사 앞에 깊이 사죄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법적 처벌보다 더 무서운 처벌은 국민의 차갑고 원망스러운 눈빛이며, 그것을 마음의 용서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박 대통령의 겸손한 회개의 눈물뿐인 것이다.

나라가 망가지는 데 1년이면 족하고 이를 다시 세우는 데는 10년 가지고도 부족하다. 우리 현실은 잦은 비로 물을 흠뻑 머금고 있는 산비탈과 같다. 폭우가 오면 산사태가 우려되니 철저히 방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같이 어정쩡하고 불확실한 국가 리더십으로 아무것도 결정하기 힘든 거버넌스의 위기하에서 다음 15개월은 길고도 위험한 경로다. 따라서 모두가 국내 정치 상황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국정이 표류하지 않고 내각이 조속히 안정될 수 있도록 국정 안정 프로그램에 대승적으로 합의하고 당리당략이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도록 자제해야 한다.

이제 현재의 국정 위기 국면을 헤쳐 나갈 정치 리더들은 대의(大義)와 대리(大利)를 추구하며 나의 이익을 버리고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몸을 바칠 것이라고 국가와 국민 앞에 다짐해야 한다. 또한 현재와 같이 정치가 실패하고 시장이 실패할 때 튼튼한 안전판이 돼 온 관료사회가 다시 한 번 그들의 헌신과 치열함을 회복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지금 청와대에서 자탄의 시름 속에 잠 못 이룰 박 대통령에게 민심에 역류해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되지 말고 헛된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조언하고 싶다. 그리고 떠나는 순간에도 자신보다 나라의 안위를 더 걱정하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이기 바란다.

정덕구 NEAR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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