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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분노와 미움을 넘어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전 아시아개발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전 아시아개발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

처음에는 수백 명이 모이던 집회에 점점 숫자가 늘어났다. 19일 밤에는 경찰 추산으로도 140만 명이 모여 대통령의 퇴진을 외쳤다. 거짓 이미지로 인기를 얻어 당선된 대통령은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갖가지 스캔들로 도덕성을 상실했다. 도박업자에게서 830만 달러의 뇌물을 받은 의혹이 폭로돼 탄핵 위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상원은 대통령의 비밀 은행 계좌와 횡령을 입증할 증거의 채택을 거부했고 탄핵 절차는 중단됐다. 분노한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다. 1986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독재를 무너뜨린 바로 그 혁명의 거리였다. 대통령이 조기 대선을 발표했지만 야당·종교지도자·시민들은 즉각 사임을 요구했다.

2001년 1월 20일 밤을 새운 시민들 중 일부가 대통령 관저로 행진을 시작했다. 마침내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사임했다. 그날로 부통령이던 글로리아 아로요가 취임해 전임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수행하고, 2004년 선거에서 당선돼 2010년까지 필리핀 14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아로요는 9대 대통령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딸로서 부녀가 대통령이 된 기록을 세웠다.

필자가 아시아개발은행 근무를 위해 필리핀에 있던 기간에 아로요 대통령은 인기가 없었다. 경제는 침체했고 테러와 범죄로 치안이 불안했다. 대통령은 부정선거 의혹과 친인척 비리로 여러 번 탄핵 위기에 몰렸지만 친(親)아로요 상원 의원들의 지지로 위기를 모면했다. 정권 이양 직전에 대변인이었던 최측근 레나토 코로나를 대법원장에 임명하고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하원 의원에 출마해 당선돼 후일에 대비했다. 그러나 후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선거 부정과 친인척 부패 혐의로 기소돼 2011년 11월 체포됐다. 코로나 대법원장도 부패 혐의로 2012년 5월 상원에서 탄핵됐다.

2016년 현재의 한국 상황을 보면 당시 필리핀에서 일어난 일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물론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한 선진국 중 하나인 대한민국과 후진국인 필리핀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 그러나 국민이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한국에서 발생했다. 대통령과 최측근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부정한 일을 저지르고 진실을 숨기려 했다. 법과 원칙을 지킨다는 이미지에 속아 대통령을 지지했던 국민은 배신감과 자괴감이 들고 억장이 무너졌다. 퇴진을 요구하는 함성이 전국에서 울려 펴졌다.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검찰과 특검이 대통령을 제대로 수사해 모든 잘못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헌법 절차에 따라 탄핵을 진행하면서 혼란을 질서 있게 수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못지않게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한국 사회의 시스템을 다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필리핀 국민은 민중혁명으로 부패한 대통령을 몇 번에 걸쳐 몰아냈지만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다. 대통령 한 명만이 아니라 족벌정치, 정경 유착, 특권층의 부정부패가 모두 문제였지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법부는 정권의 시녀였고 공정한 법질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한국도 사회 시스템을 제대로 고치지 못하면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더라도 권력 남용과 측근 비리는 반복될 것이다. 제2의 최순실, 문고리 권력, 부패한 공직자들이 대통령의 힘을 빌려 호가호위 하면서 정부 예산을 빼돌리고, 민간기업을 옭매고, 공권력을 동원해 비판세력을 겁박하고, 심지어 자녀를 부정 입학시키는 일이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재벌들은 권력에 줄을 대어 여전히 이권을 챙기려 할 것이고 공기업의 낙하산 인사는 계속될 것이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고 힘없는 약자들에게 여전히 가혹할 것이다.

무엇보다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혁해야 한다. 국민의 뜻을 모아 정·부통령제의 4년 중임으로든 책임총리제로든 개헌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정당의 공천방식을 바꾸고 선거제도도 개선할 부분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재벌의 지배구조도 개선해야 한다.

권력에 대한 감시 기능을 높여야 한다. 권력이 하는 일을 건전한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감시하고 국민에게 투명하게 알려야 한다. 대통령은 의회 지도자, 출입기자, 전문가들과 자주 만나 소통해야 한다. 국회 청문회도 개선하고 활성화해야 한다. 검찰이 제 역할을 하도록 개혁해야 한다.

인사의 공정성 또한 높여야 한다. 지연·학연·사적(私的) 인연의 연고주의를 타파하고 공정하게 인재를 추천하고 검증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정부와 민간 부문 모두 정직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선발해 책임 있는 자리에 임명해야 한다.

젊은 세대가 다시 광장으로 나와야 하는 현실이 참담하다. 그들이 자랑스러워할 정직하고 정의로운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 기성세대가 해야 할 일이다. 분노와 미움을 넘어 새로운 한국을 만들어야 한다.

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전 아시아개발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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