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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경주가 준 선물

한국·대만·일본지부 회장들과 함께 한 학습의 현장.


이맘때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6년 전 한국 팬클럽 회원들의 초청을 받아 한국을 찾았다. 12일 내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한 자리였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생일파티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이벤트는 특별한 의미를 남기곤 한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잊기 힘든 추억을 선사해주니 말이다.


그날 우리가 함께 식사를 한 곳은 ‘필경재(必敬齋)’라는 한식집이었다. 세종대왕의 5남인 광평대군의 종손 정안부 정공 이천수가 건립해 1987년 문화관광부로부터 전통 건조물 제1호로 지정된 곳이다. 500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한옥에서 먹는 궁중음식이라니 황홀할 따름이었다.


요리 역시 하나같이 매우 정교하고 저마다 기품 있는 맛을 자랑했다. 종종 한국을 찾는 나로서도 처음 보는 요리가 대부분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밥도둑’ 간장게장이었다. 게딱지에 잘 지은 쌀밥을 비벼 먹으면 어찌나 맛이 좋던지. 거기에 내장까지 얹으면 금상첨화다. 나는 그 매력에 흠뻑 빠져 그날로 간장게장의 팬이 돼 버렸다.


이 같은 진수성찬에도 불구하고 그날 행사 중 가장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장면은 식사 후 후원에 나와 단체사진을 찍은 것이다. 곱게 든 단풍이 완연한 가을임을 알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반평생을 바쁘게 사느라 넋 놓고 가을 풍광을 제대로 느껴본 적조차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마도 그때 결심했던 것 같다. 반드시 이 좋은 계절에 다시 한국을 찾겠다고 말이다.


나는 의사 선생님께 이달 14일로 잡힌 수술 전에 한 번만 여행을 다녀오면 안 되겠냐고 간청했다. 이것은 나에게 주는 생일선물이라면서 말이다. 마침 11월 첫째주는 한국 경주에서 제32회 국제난정필회 서법전이 열릴 때였다.


사실은 작품을 한 점 준비해서 참가할 예정이었지만 출품을 못하면 어떠한가. 각국에서 온 서예가들의 가르침을 받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주는 내게도 친근한 곳이었다. 양아들 토니 할머니의 고향으로 나도 지난해 한 번 찾아가 본 적이 있다. 더구나 딸 세레나와 비비안이 함께 하고, 토니가 고향길에 가이드 겸 통역으로 나선 셈이니 나는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토니의 부모님은 한 식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산 복어 3kg이 한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복어 껍질부터 시작해 살점을 음미하고, 마침내 내장에 이르렀을 땐 진귀한 보물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중국과 한국의 음식문화는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우리 모두 ‘독으로써 독을 다스린다’는 말을 믿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나온 음식은 죽이었다. 요리사는 “복어 정자로 만든 죽”이라고 설명했다. 순간 멈칫 했지만 결국 내가 깨끗이 비우자 모두들 뛸 듯이 좋아했다. 그들은 내 병세에 대해 묻진 않았지만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튿날 아침 커튼을 열어보니 오랜만에 만나는 절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산을 뒤덮은 단풍잎들이 내게 손을 흔드는 것 같았고, 은행나무의 어여쁜 금빛 물결은 누구라도 미소짓게 만들었다. 덕분에 유쾌한 발걸음으로 서법전이 열리는 장소로 향할 수 있었다. 한국·일본·중국·대만·말레이시아에서 온 서예가들이 가득 자리를 메우고, 최양식 경주시장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300여점이 넘는 작품 중에는 한국어로 쓴 것도 몇 점 포함돼 있었다. 비록 내용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아름다운 선들의 조합은 언어의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마치 외국어로 된 노래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원래 예술은 만국공통어가 아니던가.


전시를 찬찬히 돌아보던 중 작품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시아 최대 정보통신기술(ICT) 업체 후지쯔의 마즈카 미치요시(間塚道義) 회장이 쓴 글씨였다. 유럽지사장 등 10여명의 고위급 임원들의 모습도 보였다. 장빙황(張炳煌) 국제난정필회 대만지부 회장은 “모두 엄청 바쁘신 분들이라 평소에 글씨 연습하실 시간도 없을 텐데 서예 문화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셨다”고 설명했다. 지금도 이리 멋진데 시간 제약이 없고 스트레스도 없는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아마 그 창의력은 무한할 것이다. 역시 온 보람이 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손이 근질근질했다. 빨리 병이 나아 다시 회포를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나 또한 아무런 구애 없이 다시금 자유롭게 나의 예술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천추샤(陳秋霞·진추하)라이언팍슨 파운데이션 주석onesummernight7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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