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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본질에서 해답 찾는 국악 현대화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



전통예술의 현대화에도 트렌드가 있다. 한때는 서양의 것과 우리 고유의 것을 이리저리 더해 뒤섞어보는 ‘퓨전’이 유행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퓨전’은 대체로 “국적불명” 또는 “한물갔다”는 평을 듣는다. 요즘엔 다소 서양적인 메소드를 사용하더라도 전통의 본질로 회귀하는 것이 추세다. 그간 두텁게 쌓인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정수만 남겨 예리하게 드러내야 세련된 현대화 작업으로 인정받는다.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20일까지 국립극장) vs 국악극 '현의 노래'(20일까지 국립국악원)

같은 시기에 공연되고 있는과도 그런 작업들이다. 수년 전부터 창극의 새로운 형식을 찾기 위해 무한 노력 중인 국립창극단과 최근 들어 국악의 현대적 창작에 적극 뛰어든 국립국악원이다. 이들은 각각 세계적 연출가 옹켕센과 국민 작가 김훈을 무기로 내세워 차별화를 강조했지만 ‘우리 소리의 아름다움’이란 지향점은 같았다.



 



[판소리 오마주한 ‘트로이의 여인들’]



“창극의 중심인 판소리는 한국만의 것이 아닌 세계의 보편적인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판소리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음악이라는 것을 들려주고 싶다.”(연출가 옹켕센)



창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평소 판소리를 흠모해온 싱가포르 출신의 세계적 연출가 옹켕센이 싱가포르예술축제와 공동제작 시스템을 구축한 글로벌 프로젝트다. 내년 싱가포르 공연이 확정되는 등 세계진출의 활주로에 올라 시작된 작품이라 관심이 집중됐다.



원작인 그리스비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 전쟁 3부작’의 완결편으로, 그리스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망한 날 트로이의 모든 여인들이 노예로 끌려가기 직전의 이야기다. 국립창극단은 이미 2012년 ‘메디아’를 선보인 바 있으니 그리스비극이라서 특별한 건 아니다. 관전 포인트는 분명했다. 경극·가부키 등 동양의 무대예술 양식을 서양 고전에 덧입혀 스타일리쉬한 미장센을 창조해내는 것으로 정평난 옹켕센 연출이 우리 창극의 양식미를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세계적 거장 로버트 윌슨의 조명 디자이너 스콧 질린스키, 브로드웨이에서 각광받는 영상 디자이너 오스틴 스위처, 재미 무대미술가 조명희 등 ‘글로벌 드림팀’이 만든 새로운 창극은 극도로 미니멀했다. 극작가 배삼식이 새로 쓴 대본을 바탕으로 명창 안숙선이 작창한 소리와 전방위 뮤지션 정재일이 작·편곡한 음악이 원톱 주인공이 되도록 시각적 요소는 절제됐다. 큰 창이 뚫린 거대한 성벽 앞으로 파빌리온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단순한 세트였지만 바다와 창공, 우주, 용광로 속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역동적인 영상을 투영해 인상적인 미장센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한 명의 창자가 북 장단 하나에 의지해 시공간을 넘나드는 판소리의 초현실성과 미니멀리즘에 대한 오마주와도 같았다. 극이지만 두 사람 이상이 얽혀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은 거의 없었다. 왕비 헤큐바 역 김금미를 비롯해 카산드라 역 이소연, 안드로마케 역 김지숙, 그리고 헬레네 역 김준수가 차례로 나와 자신의 사연과 심정을 노래하는 형식은 마치 각기 개성적인 소리꾼들의 한바탕 배틀처럼 보였다.



국악기의 활약도 돋보였다. 통상 숨어있던 악사들이 전면에 자리해 존재감을 과시했고, 거문고와 대금, 아쟁 등의 악기가 하나씩 각 여인에게 매칭되어 캐릭터를 대변하는 동시에 악기 고유의 매력을 당당히 주장했다.



‘창극계 아이돌’ 김준수가 분한 절세 미녀 헬레네의 존재도 의미심장했다. 헬레네의 소리를 받쳐준 것도 유일하게 국악기가 아니라 정재일이 직접 연주한 피아노였다. 미의 화신에게 남성과 여성 사이, 동양과 서양 사이의 이중성을 부여한 것은 ‘금발에 푸른 눈’이라는 서구적 미의 기준에 대한 도발에 다름 아니다. 현대음악으로 판소리를 서포트해 세계에 선보일 새로운 창극의 매력을 스스로 은유하는 흥미로운 장치였다.



 

국악극 ‘현의 노래’



[잠든 국악 깨우는 ‘현의 노래’]



“들리지 않는 적막을 어찌 말로 옮길 수 있었겠는가. 내 글이 이루지 못한 모든 이야기는 저 잠든 악기 속에 있고, 악기는 여전히 잠들어 있다.”(‘현의 노래’ 서문 중에서)



김훈의 ‘현의 노래’는 가야의 악사 우륵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가야금을 지켜낸 여정에 힘의 논리를 추구하는 신라 장군 이사부와 대장장이 야로의 삶을 엮어낸 대하소설이다. 사실 의문이었다. 치밀하게 직조돼 꼭꼭 씹어 읽는 맛이 매력인 김훈의 문장이 압축과 비약의 예술인 공연으로 어떻게 변신할 수 있을까.



국악극 ‘현의 노래’는 김훈의 소설을 무대화했다기 보다는 가야금을 비롯한 국악기 연주를 돋보이게 하고 위엄을 더하기 위해 김훈의 소설을 살짝 빌려온 무대였다. 말하자면 주연은 관현악단, 조연은 김훈이었고 드라마는 엑스트라였다. 하지만 이병훈 연출이 ‘오라토리오 국악극’을 표방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연기보다 합창과 관현악의 비중이 큰 연주 중심의 국악극이 전에 없이 참신한 시도였음은 분명하다.



‘순장’이 중요한 키워드인 만큼 무덤에서 발굴된 듯한 이미지의 관현악단 30여 명이 무대 중앙을 차지했다. 그 사이로 우륵 역의 국립국악원 정악단원 김형섭, 아라 역의 무용단원 이하경 등이 등장해 연기와 노래를 했지만, 비중은 크지 않았다. 가야금 병창 6인의 합창이 중심이 됐고, 작가 역 배우가 내레이션을 맡아 소설 속 주요 문장들을 읊조리며 김훈의 그림자를 끌고 갔다.



집중할 것은 극이 아니라 합창곡 ‘현의 노래’를 비롯해 류형선이 작곡한 음악이었다. 가야금 중심으로 편성된 국악관현악단은 양악기의 도움 없이도 매력적인 사운드로 90분 내내 귀를 호강시켰다. 잔잔하고 섬세한 줄로만 알았던 가야금이 웅장하고 관현악의 도움으로 스펙터클한 매력까지 어필할 땐 실제로 김훈의 문장이 미처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를 토해내는 듯했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야 감동이 완성될 것 같은 느낌은 낯선 형식 탓만은 아닐 것이다. 여럿의 삶이 얽힌 대하소설을 우륵의 이야기로 압축하다 보니 플롯이 실종됐고, 극적 재미를 찾는 관객에게 전문 연기자가 아닌 이들의 연기도 어색해 보였다. 역시 김훈은 읽어야 제 맛인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의 명성을 빌어야 했던 이유를 누가 모를까. ‘악기는 여전히 잠들어 있다’는 김훈의 글처럼 국악의 매력도 아직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대가의 명성에 기대서라도 대중적인 국악창작곡을 풍성히 들려줄 수 있다면 절반 이상의 성공으로 보고 싶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극장·국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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