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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백만 개 촛불 앞에 선 한국 민주주의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

역사의 결절점(critical juncture)이란 역사의 신이 낡은 기득권 세력과 새로운 미래 세력을 구분해 내는 결정적 국면을 일컫는다. 100만 주권자들의 촛불이 광화문-시청광장을 온통 뒤덮고 있는 요즘 우리는 30년 만에 찾아온 민주주의의 중대 결절점 앞에 서 있다. 30년 전 1987년 6월 권위주의 체제를 물러나게 하고 민주화를 시작했던 그 광장에 시민들은 유린당하고 파탄 난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지키기 위해 다시 모였다.

촛불 민심은 민주주의 갱신 요구
시민 주인의식, 사그라들지 않아
청와대·친박 지연전략은 안 통해
정부·감시자 집단 실패, 위기 원인
제도권과 시민 정치가 협치하는
새로운 플랫폼, 미래 리더 절실


시민들은 한 중년 여인이 청와대·행정부·대기업을 헤집고 다니며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와 최소한의 상식을 농락한 현실에 분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분노와 허탈감에 그친다면 밝은 미래는 없다. 뜨겁지만 차분한 마음으로 촛불을 들고 있는 옆자리의 낯선 이들과 따뜻한 눈길을 주고받는 연대감 속에서 시민들은 준엄하게 민주주의의 갱신을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의 퇴진이니, 정부 형태의 개헌이니 하는 이슈들은 중요하지만 궁극적 이슈는 아니다. 시민들의 궁극적 바람은 망가져 버린 20세기형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서 대의제 정치와 시민들의 일반의지(general will)가 상시적으로 교감하고 소통하는 새로운 유형의 시민정치, 새로운 유형의 정치 플랫폼을 만드는 데 있다.

시민들은 일반의지가 반영될 통로(혹은 상시적 반응 그 자체)로서의 새 플랫폼을 요구하고 있지만, 한 줌의 마지막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낡은 정치계급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낡은 정치계급들은 (1)지연전략(청와대), (2)회피전략(여야 정당)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 청와대의 참모들과 일부 친박들은 이미 시간벌기 전략에 돌입한 듯하다. 어떻게든 지금의 촛불 시위가 잦아들길 기다리며, 야당들의 갈팡질팡 혼란 속에서 최악의 국면을 모면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시간 벌기 전략은 안이하고 부적절하고 위험하다. 무엇보다 광화문-시청광장에 모여든 촛불 시민들의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다. 분노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열렬 시위대라면 그 기세는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늘 시위를 주도해 온 낯익은 ○○단체들이 아니라 몇 시간을 걸어서 혹은 수백㎞를 버스로 달려온 촛불 시민들의 참여는 오랫동안 참아온 주인 의식의 표현이기에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날로 어려워지는 청년실업, 심각해지는 경제적 꿈의 격차 앞에서도 참고 참던 시민들이 주말마다 광화문-시청광장을 메우는 것은 그만큼 민주주의의 회복과 갱신에 대한 의지가 넓고도 강함을 뜻한다.
또한 여야 정당과 국회 쪽에 포진한 정치계급들이 구사하려는 회피 전략의 핵심은 정부 형태의 개헌으로 모아질 것이다. 이들은 박근혜 정부의 대실패를 대통령제라는 제도의 허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프레이밍 하려 한다. 따라서 한 개인에게 권한이 엄청나게 집중된 대통령제를 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로 고쳐야만 지금과 같은 실패를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개헌을 추진하려는 이들이 대부분 국회의원들이라는 사실은 이 개헌론의 불순하고도 퇴행적인 본질을 보여준다. 개헌 방향의 이름을 내각제, 이원정부제, 분권형 대통령제, 그 어느 것으로 부르더라도 본질은 권력의 중심추를 청와대로부터 국회로 이동하는 데 있다. 그런데 과연 지금의 국회는 대통령제(혹은 대통령 개인)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만큼 투명하고 개방적이고 소통 가능한가?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대통령 개인의 실패, 대통령제 제도의 실패에 국한되지 않는다. 권력이 밀실에서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반복했음에도 이를 감지하지도 제어하지도 못한 우리 시스템 전반의 실패이다. 지금의 위기는 대통령제의 실패를 넘어 방대한 조직과 인원을 거느린 채 허수아비 노릇을 한 정부 조직과 절차의 실패이고, 그 정부를 감시하는 언론, NGO, 전문가 집단의 집단적 실패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총체적 위기 앞에서 여야 정당을 포함한 대의제 정치세력들이 촛불 시민들의 뜻을 모으고 소통할 수 있는 시민정치 플랫폼을(우리가 종종 들어온 ○○비상시국회의 등으로는 21세기 시민을 지향하는 시민정치 플랫폼을 구축할 수 없다.) 내놓지 못한다면 지금의 이성적이고 평화로운 촛불은 더 큰 불길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야당·여당을 포함한 기득권 정치 전반이 무너져 내리는 대혼란으로 갈 것인가, 혹은 제도권 정치와 시민정치가 협치하는 새로운 정치 플랫폼이 정비되는 길로 갈 것인가의 역사적 실험 앞에 서 있다. 우리는 과연 이 역사적 분기점에서 새로운 미래 세력, 미래의 리더를 만날 수 있을까? 혼란, 판단 착오, 아집 등이 뒤엉켜 있는 기득권 정치 안에서 우리는 미래 리더를 만날 수 있을까?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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