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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경의 Shall We drink]<42>스코틀랜드의 오랜 친구, 위스키와 하기스

에든버러 성에서 내려다 본 도시 전경.

에든버러 성에서 내려다 본 도시 전경.


내가 이러려고 여행 왔나 자괴감이 들 때 가 있다. 낯선 나라로 향하는 첫 관문, 입국 심사대에서 험상궂은 표정의 심사관의 퉁명스러운 질문 세례를 받을 때가 그렇다.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보여주지 않으면 불법체류자로 간주하겠다는 눈총까지 받으면 화가 치민다. 반면, 친절한 심사관을 만나면 본격적인 여행 시작 전부터 그 나라가 좋아지곤 한다.
 
에든버러 성을 지키는 근위병들.

에든버러 성을 지키는 근위병들.


에든버러 가는 길, 런던 히스로 공항 입국심사원은 조곤조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는 가는데 왜 런던은 안 가는지, 가서 뭘 할지 물었다. 직항이 없어 런던을 경유하고, 스코틀랜드는 처음이란 답을 늘어놓는데 전혀 불쾌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살가운 조언 덕에 유쾌했다. 여권을 돌려줄 땐, 위스키·굴·하기스(Haggis) 등 스코틀랜드에서 맛봐야 할 것들을 콕콕 찍어주기까지 했다. 한데, 하기스가 뭐지? 뭔지는 몰라도 하기스를 꼭 먹고 말겠다는 결심을 품고 에든버러에 도착했다.  
 
핫한 레스토랑과 가게가 둥지를 튼 빅토리아 거리.

핫한 레스토랑과 가게가 둥지를 튼 빅토리아 거리.


눈앞에 시간이 멈춘 듯한 중세 도시가 펼쳐졌다. 잿빛 하늘 아래 오래된 석조 건물들이 아련한 시절의 색감을 내뿜고 있었다. 언덕 꼭대기에 뿔처럼 솟아 있는 에든버러 성으로 향했다. 화강암 절벽 사이에 요새처럼 견고하게 축조된 성은 에든버러가 옛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일 때부터 이 도시의 파수꾼이었다. 에든버러 성에서 홀리루드 하우스까지 구시가를 관통하는 거리 로열 마일(Royal Mile)에서도 스코틀랜드 왕가의 자부심이 묻어났다. 로열 마일은 이름대로, 왕가 전용 도로였다. 
 
피로 물든 광장에서 여유로운 쉼터로 환골탈태한 그라스 마켓.

피로 물든 광장에서 여유로운 쉼터로 환골탈태한 그라스 마켓.


로열 마일에서 사방으로 뻗은 좁은 골목 중 한 곳, 빅토리아(Victoria) 거리엔 활기가 감돌았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건물 안에 알록달록한 가게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빅토리아 거리의 끝과 만나는 그라스 마켓(Grass Market)의 변화도 놀라웠다. 광장을 둘러싼 노천카페, 그곳에서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는 사람들만 한때 건초와 가축을 거래하던 시장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16~17세기 종교개혁과 마녀사냥의 광풍으로 수많은 여인들의 피로 물들였던 섬뜩한 과거는 짐작조차 어려웠다.

우아한 고도, 에든버러의 과거와 현재를 엿보느라 하기스는 잠시 잊고 있었다. 하기스를 다시 떠올린 것은 스코틀랜드 국민 시인, 로버트 번스(Robert Burns, 1759~1796) 동상 앞에서다. 로버트 번스는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서민의 소박한 정서를 담은 시를  써, 18세기 영국 시단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자유와 위스키는 함께 한다’는 시를 남길 정도로 위스키 애호가기도 했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에선 ‘석별’이란 졸업식 노래로 익숙한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도 그가 쓴 가곡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가 태어난 1월 25일은 ‘번스 나이트(Burns Night)’라는 스코틀랜드 명절이 됐고, 그날엔 그의 시를 암송하며 위스키로 건배하고 하기스를 먹으며 밤늦도록 노래를 부른단다. 그렇게 가이드는 눈빛을 반짝이며 로버트 번스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쯤 되니 하기스와 위스키의 조합을 얼른 맛보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에든버러의 스카치 몰트 위스키 소사이어티 내부 풍경.

에든버러의 스카치 몰트 위스키 소사이어티 내부 풍경.


내 맘은 아는지 모르는 지 가이드는 흡사 비밀결사 조직처럼 들리는 ‘스카치 몰트 위스키 소사이어티’(The Scotch Malt Whisky Society, 이하 SMWS)로 이끌었다. 1983년, 위스키 애호가 몇 명이 증류소에서 위스키를 오크통째 구입한 후 에든버러에 모여 마시기 시작하며 SMWS가 결성됐다. 지금은 전 세계 16개 지부에 4만 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린 SMWS의 가장 큰 특징은 위스키 본연의 맛과 풍미를 즐기기 위해 세계 각국의 증류소에서 공수해온 오크통에서 필터링 없이 병입 한 후 마신다는 점이다. 그래서 매년 위스키 병 디자인이 똑같다. 병에는 병입 날짜와 숙성기간, 알코올도수만 라벨에 적혀있다. 위스키 브랜드에 대한 선입견 없이 위스키 자체의 순수한 풍미를 즐기자는 의도에 증류소는 숫자코드로만 표기한다.
 
스카치 몰트 위스키 소사이어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위스키.

스카치 몰트 위스키 소사이어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위스키.


테이블 위에 초록색 위스키 병과 물병이 놓였다. 잔에 담긴 위스키에 스포이드로 물 한 방울을 톡 떨어뜨려 향을 깨운 후 한 모금 맛 봤다. 위스키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이 강렬했다. 그때 한 접시의 요리가 내 앞에 놓였다. 하기스였다.
 
스코틀랜드 전통 음식 하기스.

스코틀랜드 전통 음식 하기스.


“스코틀랜드 전통 음식 하기스는 양이나 송아지의 위에 동물의 내장을 다지고 양념과 오트밀을 섞어서 익힌 음식이죠. 으깬 감자를 곁들여 맛보세요.“

막상 하기스의 정체를 알고 나니 포크를 든 손이 멈칫했다. 스코틀랜드 판 순대를 맛본다고 생각하니 맘이 편해졌다. 하기스 한 입, 위스키 한 모금. 기름진 하기스와 강렬한 위스키의  절묘한 궁합에 감탄하는 내게 가이드가 로버트 번스의 시 한 구절을 읊으며 건배를 청했다. ‘오 그대, 나의 뮤즈여! 오랜 친구 스코틀랜드의 술이여!(O thus, My Muse! guid auld Scotch Drink!)’ 마치 마법사의 주문처럼 들리는 강한 스코틀랜드 악센트였다. 그래 설까. 그 순간, 위스키도 하기스도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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