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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30. 변명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하고 오늘은 이만하겠네.”
 
한연수의 아버지 한정현, 그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모니터에 보이는 그의 표정이나 말투는 불만스러운 무언가를 한껏 내포하고 있는 듯 했다.

쥬디와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속옷 차림인 것도 까마득 잊은 채 태블릿 모니터 안의 두 사람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한정현은 이윽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에프도 천천히 따라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려 몇 걸음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한정현은 뭔가 생각난 듯 멈춰 서선 에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한껏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웃느라 비틀려 올라간 한쪽 입술 때문인지 표정이 일그러져 보였다.
 
“저 번에 이야기했던 그 반미주라는 여자 말이야...”
 
한쪽으로 비틀린 그의 입술이 열리며 갑자기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말에 에프가 움찔하더니 그도 우뚝 자리에 서 버렸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도대체 그들의 대화에 내 이름이 왜... 그것도 처음이 아니라니... 가슴은 이내 쿵쾅쿵쾅 방망이질을 하며 뛰기 시작했다.
 
“비밀이 아주 많은 사람이던걸.....”
 
비밀.. 나는 엉겁결에 옆에 앉은 쥬디에게 얼굴을 돌렸다. 쥬디도 깜짝 놀랐다는 듯 예의 금테 안경을 반짝 빛내며 나와 화면을 번갈아 쳐다보기 시작했다.
 
한정현은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다시 입술을 비틀며 바로 말을 이었다.
 
“사생활이 복잡한 데다... ”
 
내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미주얘기는 다시 안하시기로 하셨잖아요.”
 
에프가 뒷말을 가로 막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반미주 만나는 남자 중에 기자가 하나 있던데.... 곧 정치부로 발령이 날 거라던데... ”
 
“아버님.. 저하고 상관없는 이야기는...”
 
“상관이... 없을까..? 장현수 국회의원 내연녀가 알고 보니 정치부 기자와도 애인사이... 이런 기사가 대문 짝 만하게 실리는 날이 오면...”
 
“그런 사이 아닌 거 아시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진실보단 가십거리를 원한다네... 어느 날 먹잇감이 돼서 갈가리 찢길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라는 거야. 이건 협박이 아니고 조언일세. 아직 자네는 내 사위야. 내 사람이라고... 그러니 바른 판단을 하라고...”
 
말을 마친 그가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 에프가 털퍼덕 소파에 주저앉았다. 카메라가 계속 레코딩하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에프는 그렇게 앉아있었다.
 
마치 정지된 듯 움직임 없는 화면이었지만 우리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뚫어져라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한정현의 말은, 직접 그것을 들은 에프만이 아니라 영상을 보고 있는 쥬디와 내게도 적잖이 충격을 안겨 주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에프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켜놓고 숨소리조차 죽인 채 그렇게 앉아있었다. 마치 무슨 소리라도 내면 에프가 놀라 금방 뒤라도 돌아볼 것만 같았다.
 
그렇게 5,6분 정도 등을 내놓고 앉아있던 에프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돌아서더니 카메라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이쪽으로 한걸음 내 딛을 때 마다 모니터 속의 에프의 얼굴이 조금씩 커진 채 다가왔다.
 
할 말이 있어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어떤 기색도 표정에 담아놓지 않은, 마치 석고상처럼 표정이 굳은 에프의 얼굴을 향해 나는 외치고 싶었다. 한정현이 쏟아놓은 말을 해명하고 싶었다.
 
카메라 앞에 멈춰 선 에프는 마치 무슨 말이든 해보라는 듯 렌즈를 응시했다. 무표정의 얼굴이었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주겠다는 듯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깊은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에프는 이내 카메라 쪽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 손이 카메라로 다가와 정지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나는 제발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바로 화면은 캄캄해지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긴 한숨과 탄식이 흘러나왔다. 쥬디와 맞잡고 있던 손에선 눅눅하게 땀이 배어나왔지만 쥬디는 이미 캄캄해진 동영상 파일에서 아직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내가 잡았던 손을 놓자 그는 정신이 들었다는 듯 파일을 터치해 종료 버튼을 눌렀다. 우리가 방금 보았던 영상의 파일이름은 20160622. 아마도 녹화날짜인 것 같았다.
 
“하나 더 열어볼까?”
 
“아니, 잠깐만...”
 
쥬디가 다른 영상파일을 터치하기 전에 내가 그의 손을 막았다.
 
“할 말이... 있어, 선배...”
 
쥬디가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이 말을 먼저 해야 할 것 같아. 아까 내가 하려 했던 말이랑 비슷한 맥락의 말인데.. 그게... 선배...”
 
“미주야...”
 
쥬디가 내 어깨를 잡았다. 어깨에 닿는 그의 손에서 단호함이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대강 짐작해. 아까 등장한 정치부 기자는 나를 말하는 거겠지? 그래.. 너한테 정확하게 듣고 싶은 설명이 많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는... 장현수 죽음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할 것 같아.”
 
“ .... ”
 
“지금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아무개 게이트니 아무개 국정농단이니 하며 벌어진 요즘의 비상시국 사태가 아까 그 영상에서 말하던 그 일과 무관하지 않다면... 아니 깊은 관계가 있다면 말이야... 이건 장현수 개인의 죽음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야. 더 조직적이고 더 거대한 큰 손의 검은 음모가 배후에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거야.”
 
요즘 신문에는 연일 권력을 장악한 사조직의 비리가 낱낱이 파헤쳐 지고 있었다. 권력을 등에 업은 몇몇 무리가 암세포처럼 온갖 정부의 중요조직에 숨어들어 권력을 확장하다 마침내 발각되었다고.. 그래서 매일 한 두 사람씩 구속되거나 연행돼 수사를 받고 있다는 보도였다.

한정현이 말했던 그 일이 바로 지금의 이 일이라면 이 사건들은 있는 그대로의 것이 드러난 게 아니라 누군가 분명 목적을 가지고 터뜨린 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암흑에 싸인 아주 거대한 어떤 힘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먼저 한정현이 말한 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었다. 비밀이 많고 애인이 많고...하는 등등의 말을 쥬디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나도 한정현이 말한 부분 너한테 직접 설명 듣고 싶어. 하지만 일단 우리 더 큰 문제부터 하나씩 짚어가면서 넘어가자.”
 
나는 쥬디가 다음 영상을 클릭하는데 동의했다.
 
쥬디가 선택한 두 번째 파일은 7월 12일에 녹화 분이었다. 앞의 것과 20일 정도의 차가 있었다.
 
영상은 처음의 것과 비슷하게 시작되었고 카메라는 마찬가지로 에프의 손길에 의해 흔들리더니 이내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화면에 들어온 소파나 장식장, 카페트 등으로 봐서 장소는 에프의 집으로 보였고 벽에 늘어선 책장으로 짐작할 때 서재쯤인 것 같았다.
 
에프는 카메라를 장치해 놓은 후 방을 나갔다. 나가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한연수가 들어왔다. 그럴 리 없었지만 마치 에프가 장치해놓은 카메라를 찾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한연수의 시선은 계속 이 쪽 저 쪽을 향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 카메라의 반대 방향의 장식장 위에 한참 시선이 머물렀다. 그리곤 이쪽으로 고개를 훽 돌렸다.
 
이미 녹화된 것이고 우리는 이미 오랜 시간 후 그것을 보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카메라가 한연수에게 들킬 것만 같아 가슴이 졸아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오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에프가 들어왔다. 곧장 한연수의 아버지 한정현이 따라 들어왔다.
 
한정현과 한연수는 이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에프는 카메라를 등진 채 소파에 자리했다. 비서가 세 사람의 찻잔을 테이블에 놓고 나가자 한정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고집을 계속 피우는 이유가 뭐냐.”
 
한정현의 노기어린 목소리는 심하게 격앙 돼 있었다.
앞의 영상으로부터 20일 정도의 시간이 지난 걸 감안한다면 그 동안 두 사람의 의견은 매우 결렬돼 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에프의 답이 없자 한정현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감히 내 말을 네가 거부한다는 말이냐. 내가 누군지 몰라서?”
 
“당신도 참...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걸 왜 그래요.. 다 당신 위해서 하는 건데... ”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며 한연수가 거들었다. 하지만 에프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현수야...”
 
갑자기 한정현이 여우같은 웃음을 웃으며 다정하고 정감 넘치는 목소리로 에프를 불렀다.
 
“이미 일은 시작이 됐어... 너 말고 이 나라에 적격자는 없어... 빠져나갈 생각 하지 말고.... 우리 멀리 길게 보도록 하자.... 지금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절체절명의 국면이야... 더 이상 지체하면 야당에게 선제공격을 당하게 될 거야. 국운이 달린 일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에프가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들었다.
 
“아버님.. 저는 국민을 속이는 일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에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연수의 웃음소리가 방안을 흔들었다.
 
“아니, 여보. 당신 초등학생이야? 아빠 말씀을 그렇게도 몰라? 아빠가 하는 말이랑 당신 말은 결국 같은 의미라구. 그래서 당신한테 이 일을 맡기는 거잖아. 국민을 속이는 자들을 단두대에 냉큼 올려 놓으라구...”
 
에프의 단호한 목소리가 연수를 향했다.
 
“단두대에 올라갈 사람은 그들이 아니야.”
 
“무슨 말이야 여보.. 대통령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놓고 나라를 엉망으로 뒤에서 흔들고 있는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 아니면 누가 나쁜 사람이라는 거야?”
 
“그 사람들은 어차피 어떻게든 드러나게 돼서 죄 값을 치르게 될 거야.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걸 이용하려는 조직이 일부러 이 일을 수면 위로 꺼내놓는다면... 그들은 죄 값을 치르는 게 아니라 이용 후 면죄부를 받게 되는 것이고 결국 다른 음모의 숙주가 되는 거야.”
 
“그게 어때서.. 어차피 아빠나 할아버지 같은 분이 새로 정권을 재정비할건데.... 당신 도대체 뭘 걱정하는 거야? 밥상 다 차려놓는다는데...”
 
“그건 비리를 척결하고 국가를 바로세우는 게 아니지. 또 다른 거대한 비리를 만드는 거지. 더 큰 음모가 되는 거고...”
 
“아빠랑 할아버지가 뒤에 있는 일인데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당신.”
 
“그만들 둬!”
 
에프와 연수의 언성이 높아지는가 싶더니 한정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는 잠시 나가있어...”
 
한정현이 연수를 보고 말했다.
 
“아빠...”
 
“너와는 다시 따로 이야기 하자. 현수하고 둘이 할 이야기가 좀 있어..”
 
연수는 순순히 일어섰다.
 
“당신은 아버지랑 할아버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야. 혼자 애국자고 혼자 잘 난 줄 알지만 당신이 누리는 거 전부 아빠와 할아버지 후광이야. 그거 잊으면 안 돼.”
 
다부진 목소리를 에프에게 건네고 연수는 곧장 방을 나갔다.
 
“현수야...”
 
“아버님.. 저는 이제 더 이상 아버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겠습니다.”
 
“너는 이미 발을 들여놨고 그 발은 이 집에 묶여있다는 걸 알아야지. 내가 처음 했던 말 기억나니?”
 
에프가 고갤 들어 한정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반미주...? 그래... 소중한 건 지키고 싶겠지.. 하지만 힘없이 네 것을 지킬 수는 없지...”
 
“.....”
 
“이 일을 거부한다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단 걸 알아야한다. ”
 
“저는 더 이상 이 일은 모르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래? 더 이상 어떤 일도 감수 하겠다? 의원직도 내 놓고? 반미주와 야반도주라도 할 생각이냐?”
 
한정현은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아버님!”
 
“이제라도 합류한다고 말한다면 사람은 건드리지 않을 거야.”
 
“못 건드리실 거예요.”
 
“네가 나를 모르는구나.”
 
“죄송합니다. 저 지금... 아버님과 나누는 이야기 전부를 녹화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네까짓 게 나한테 어쩌고 있다고?”
 
한정현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나를 걸고 넘어 지겠다고?”
 
“아버님이 아무 일 하지 않으시면 저도 아무 일 하지 않습니다.”
 
“아하.. 미주를 건드리지 말라?”
 
“여기서 멈추신다면 그냥 삭제될 파일일 뿐입니다.”
 
“협박을 하겠다?”
 
“미주는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노크도 없이 한연수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두 사람의 말을 밖에서 듣고 있었다는 듯 에프를 향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뚜벅뚜벅 걸어서 소파 뒤쪽의 장식장으로 다가갔다. 맨 처음 방으로 들어와 살펴보던 거기였다. 연수는 손을 들어 장식장 맨 위에 놓인 고려청자를 옆으로 살짝 밀쳤다. 그리고 거기서 작은 카메라 하나를 꺼냈다. 카메라를 손에 들고 살피던 연수는 웃으며 그것을 한정현 앞에 내밀었다.
 
“저사람 치밀해요. 아빠 말씀 맞았어요. 몇 번에 걸쳐 녹화된 게 있네요.”
 
한정현이 그것을 손에 들고 뚫어져라 에프를 쳐다보았다.
 
“네가 이런 걸로 나를 협박하려고 했다고? 어리석은 놈!”
 
그는 연수에게 카메라를 건네곤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연수는 카메라에서 메모리를 꺼내 에프 앞에서 그것을 망가뜨려 놓았다.
 
“당신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정치할 자격이 없어. 결국 당신은 그깟 여자나 보호하려다 당신 전부를 잃게 될 거야.”
 
연수가 방을 나갔다.
말갛게 핏기 가신 얼굴로 에프가 돌아섰다. 그리고 이 쪽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그리곤 잠시 렌즈에 시선을 두고 서 있었다.
마치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 그 쪽에서의 그가 이 쪽의 나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 제8요일의 남자 더 보기
#1. 화요일의 남자, 튜즈
#2. 7분의 1을 넘나드는 남자, 에프

#3. ‘당신의 어둠 속에 나도’
#4. “그날,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것”
#5. 엠, 월요일을 싫어하는 남자
#6. 어떤 고백
#7. 한 잎의 여자
#8. 당신은 어디 있나요?
#9. 그 여자 미주 -내 이름은 튜즈
#10. 이미 시작된 일
#11. 말할 수 없는 비밀
#12. 점점 깊은 곳으로
#13. 기억의 영속
#14. 카메라오브스쿠라
#15. 왜 하필 장현수야?
#16. JEAN이라는 남자.
#17. 미로 속 그물
#18. 이별은 언제나 아프다.
#19. 내가 몰랐던 것
#20. 당신은 누구세요?
#21. 에메랄드 목걸이
#22. 나의 고독
#23. 우연과 필연의 거리
#24. 파리의 하늘 밑
#25. 시녀들
#26. 에프.. 당신의 기록
#27. 그의 태블릿pc를 찾다
#28. 침입자들
#29. 비밀의 문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됩니다>
그림=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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