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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무력부장傳(2)] 김평일 때문에 숙청된 김광협

최용건이 1957년 북한의 민족보위상(인민무력부장)에서 물러난 뒤 그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그의 심복이었던 김광협(1915~ ·)이다. 김광협의 사망 연도에 점이 찍혀 있는 것은 언제인지 몰라서다. 부수상까지 오를 정도로 한때 권력 서열 6위까지 올랐다가 ‘반(反) 김일성’ 세력으로 몰리면서 하루아침에 제거됐다. 1970년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당적이 박탈당한 이후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다.
 
김광협 [사진 중앙포토]

김광협 [사진 중앙포토]


김광협은 김일성의 둘째 부인인 김성애의 오빠다. 그는 김일성 아들 김정일에 눈에 가시였다. 김정일과 김성애의 사이가 좋지 않아 그 영향이 김광협에게로 영향을 끼친 것이다. 후계 결정 과정에서 김광협은 김성애의 아들인 김평일을 밀었다. 외조카를 미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분위기도 김정일보다는 김평일에 쏠렸다. 강하게 반대하며 유일하게 김일성에 대들은 사람이 최현이다. 최현은 제4대 인민무력부장이라 제4편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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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이 김평일에 쏠리는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1967년 조선노동당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다. 이 회의에서 김정일은 갑산파를 숙청했다. 갑산파는 1930년대 양강도 갑산군과 그 인근지역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도와준 사람들이다. 특히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가운데 최고봉으로 꼽히는 보천보 전투를 도와 해방 이후 고위직에 올랐다.
 
갑산파의 대표적인 사람은 박금철(당 서열 4위), 이효순(당 서열 5위), 김도만 등으로 숙청 당시 당내 실세들이었다. 이들이 숙청된 가장 큰 이유는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에 장애가 됐기 때문이다. 당시 김정일의 나이는 25세. 갑산파 숙청 이후 항일빨치산 출신 가운데 일부 군인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김광협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광협은 항일빨치산 출신으로 1940년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정치위원으로 활동했다. 그 자리는 최용건이 제2로군 참모장이 되면서 김광협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같은 해 11월 소련 하바로프스크로 넘어가 소련 88여단 제4영 7연장으로 군사훈련을 지휘했는데, 최용건이 88여단 부참모장과 정치위원을 역임해 둘은 동북항일연군 시절에 이어 더 각별해졌다.

해방 이후 김광협은 안길 등과 함께 목단강 분견대를 인솔하고 목단강 지역에 이동해 경비사령부 부사령으로 활동했다. 북한에 들어온 것은 1947년이다. 그 다음해에 창건하는 조선인민군의 제3혼성여단장을 맡았다. 조선인민군은 최용건 민족보위상 겸 총사령관, 강건 민족보위성 부상 겸 총참모장, 김웅 제1사단장, 이청송 제2사단장 등으로 라인이 짜여졌다.
 
김광협은 1958년 11월 김일성이 6.25전쟁 이후 세번째로 중국을 방문했을때 군사대표단장 자격으로 김일성을 수행했다. 사진은 김일성(사진 왼쪽)이 우한(武漢)에 머물렀던 마우쩌둥이 찾아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김광협은 1958년 11월 김일성이 6.25전쟁 이후 세번째로 중국을 방문했을때 군사대표단장 자격으로 김일성을 수행했다. 사진은 김일성(사진 왼쪽)이 우한(武漢)에 머물렀던 마오쩌둥을 찾아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 중앙포토]


6.25전쟁 시절에는 강원도 일대로 쳐내려온 조선인민군 제2군단장을 맡았다가 작전 실패로 해임됐다. 1951년 김책 전선사령관이 사망하자 그 자리를 이어받아 복권했다. 6.25전쟁 이후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 됐다.
 
김광협은 1957년 제2대 민족보위상에 오르면서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 1958년에는 군사대표단장으로 소련, 중국, 체코, 베트남을 방문했다. 중국은 김일성을 수행하면서 갔다. 김일성과 함께 베이징을 거쳐 마오쩌둥이 머물렀던 우한(武漢)을 찾아가기도 했다.
 
김광협은 1965년 4월 김일성이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을 만날 때 수행원으로 함께 갔다. 왼쪽부터 김일성, 통역 수카르노. [사진 중앙포토]

김광협은 1965년 4월 김일성이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을 만날 때 수행원으로 함께 갔다. 왼쪽부터 김일성, 통역 수카르노. [사진 화보집 조선]

 
순탄하게 민족보위상을 지내던 차에 위기가 찾아 온 것은 1962년이다. 그 해는 쿠바 위기의 발발로 북한이 제4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지금 김정은이 추진하는 핵무력-경제 병진 정책의 원조격이다.
 
김광협은 경제·국방 병진정책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당 지도부와 갈등을 빚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김광협은 이 정책에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경제·국방 병진정책 속에 김일성의 우상화가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광협은 민족보위상 재직을 마지막으로 군생활을 마쳤다. 그 이후 최용건처럼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1966년 10월 제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6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1967년에는 부수상이 되기도 했다. 이에 앞서 1965년 4월 김일성의 수행원으로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하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김일성 유일사상체계의 바람은 너무 거셌다. 여기에 후계자 문제가 겹치면서 김광협은 버틸 수 없었다. 1970년 7월에 열린 당 제4기 제21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유일사상화를 위한 사상 투쟁이 강조되면서 유일사상화에 비토적인 자세를 보인 김광협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1970년 11월에 열린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당적이 박탈당했다.
 
김평일 [사진 중앙포토]

김평일 [사진 중앙포토]


김광협은 경제·국방 병진 노선과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확립 등과 같은 제도적인 문제보다 자신의 외조카를 후계자로 옹립하려는 움직임 때문에 낭패를 본 것으로 추정된다. 1963년 자신의 동생인 김성애가 김일성과 결혼했지만 1964년부터 정치에 뛰어든 김정일을 우습게 본 것이다. 결국 김성애와 김평일에게 줄을 선 사람들은 하나 둘 씩 역사속에서 사라져갔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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