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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해학·배려 넘치는 촛불, 문학보다 아름다웠다

소설가 조해진, 서울광장을 가다
  
11월 12일 오후 4시, 시청으로 갔다. 이미 엄청난 인파가 쏟아져 나와 있었다. 혹시 사고나 불상사가 있을까 하는 것은 기우였다.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러 왔다는 듯 하나같이 밝은 표정이었고, 유모차나 전동휠체어가 지나갈 때는 알아서 길을 내주며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 갔다. 여기저기서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대중가요가 들려왔고 풍자와 익살로 가득한 팻말도 보였다.

청소년들 깔깔 웃으면서 행진
유모차 지나가면 알아서 길 비켜줘
두 자녀와 함께 나온 40대 아빠
“대통령도 처벌하는 게 민주주의”

가족 단위로 참여한 사람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시청역 근처에서 만난 40대 중반의 주부는 “두 아이에게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헌법에는 국민의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이 명시돼 있는데 현실에서는 상식조차 지켜지지 않아 이번 집회를 통해 진보하는 역사를 경험하게 해주고픈 마음이었다”고 부연했다. 옆에서 엄마 손을 붙든 초등학생 꼬마는 “머릿수라도 채우려고 따라 나왔다”고 말했다. 역시 두 자녀와 동행한 40대 후반의 회사원은 “아이들에게 노력해도 안 되는 사회를 물려주기 싫다”고 단호히 말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대통령도 잘못하면 법적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다”고도 했다.
12일 촛불집회에 참가한 소설가 조해진씨. “평화로운 축제 같아 감동적”이라고 했다. [사진 강정현 기자]

12일 촛불집회에 참가한 소설가 조해진씨. “평화로운 축제 같아 감동적”이라고 했다. [사진 강정현 기자]

청년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시청 광장에서 동료와 행진 중이던 20대 후반의 회사원(여)은 “답답해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동안 집회에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분노가 임계점에 다다라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그를 가장 분노하게 한 것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참사 당일 증발해 버린 대통령의 7시간이 변명으로만 무마되고 있는 현실이라고 했다. 또 다른 20대 중반의 회사원 역시 “집회 참여가 처음”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난 대선 때 기권을 할 만큼 선호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이 없는 무당파(無黨派)”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정치적 판단을 떠나 옳고 그름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며 차분히 분노를 드러냈다. 막상 집회에 나와 보니 행동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고, 나아가 세계관이 변화하는 것 같다고도 했다. “야당은 대통령의 무능과 최순실의 국정 농락에 집중하지 않은 채 정당의 손익에만 몰두하는 듯 보이고, 여당도 기득권 유지에만 골몰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국회의원을 향한 불만도 토로했다.

이번 집회가 축제 분위기를 띨 수 있었던 데는 청소년들의 역할이 컸다. 그들은 친구들과 깔깔 웃으며 행진했고, 샛길 곳곳에서 발언대를 만들어 하고픈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여고생들은 지금 상황이 ‘개판’이라고 시원하게 독설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을 얕보고 있다고, 역사가 퇴보해 과거로 돌아간 것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고등학생은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기 위해 집회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금 참여해 세상을 바꾸지 않으면 앞으로 내내 부끄러울 것 같아서 거리로 나왔다”고 고백한 대학생도 있었다. 부끄러웠다는 그 말을 잊을 수 없 다. 지난 18대 대선 때 선거권을 갖지 않았으니 엄밀히 말하면 현 상황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데도 제 몫의 부끄러움을 감당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그들이 대견하면서도 기성세대로서 미안했다. 그들이 이미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100만 촛불 민심 축제가 된 시위 - 경복궁 앞

100만 촛불 민심 축제가 된 시위 - 경복궁 앞

어느새 어둠은 짙어졌고 눈에 보이는 건 끝없는 촛불뿐이었다. 정의를 존중하고 부끄러움을 알며 다음 세대에게 떳떳해지고 싶은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한 사람 한 사람이 피워 올린 촛불이었다. 압도적인 에너지가 전해지는 그 풍경에 감동받지 않은 이는 없을 터였다. 100만 명(경찰 추산 26만 명)이 사익이나 이권이 아닌 다만 정의와 민주주의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곳에 모였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역사의 한 페이지였다. 틈틈이 쓰레기를 줍고 서로의 촛불을 배려하며 행진하는 질서정연한 모습이라든지, 뜨거운 분노를 웃음으로 승화해 더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동참하도록 이끄는 고급스러운 집회 분위기는 또 어떤가. 대통령은 혼자 과거로 회귀해 염치도 없이 불통의 독재자가 돼 갔지만 국민은 이미 성숙한 민주시민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거리는 오래도록 촛불로 가득했다. 그 어떤 문학 작품보다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나는 읽었다. 동참할 수 있어서, 한 명의 증언자로 남게 되어서 영광스럽다.

 
◆조해진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문예중앙’ 으로 등단. 소설집 『천사들의 도시』, 장편 『여름을 지나가다』 등. 신동엽문학상·이효석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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