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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웃기는 남자의 첫 악역…뭘 연기하든 ‘정성화답게’

정성화(41)는 영화 ‘스플릿’(11월 9일 개봉, 최국희 감독)에서 징글징글한 악역을 맡았다. 도박 볼링 선수로 뛰는 철종(유지태)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일명 ‘두꺼비’, 두중오 역이다. 그 역시 볼링 선수 출신이지만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마음이 뒤틀린 인물이다. ‘첫 악역 연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는 ‘스플릿’에서 두꺼비란 인물을 변화무쌍한 연기로 보여 준다. 그 바탕엔 정성화가 뮤지컬 무대에서 이미 다양한 역할을 한껏 소화해 온 경험이 깔려 있다. 그는 인터뷰 전날에도 뮤지컬 ‘킹키부츠’(11월 13일까지,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의 여장 남자 롤라 역으로 무대를 한바탕 흔들어 놓고 온 참이다. 정성화는 이미 많은 걸 갈고닦은, 준비된 배우다.

'스플릿' 정성화

 

어떤 영역에 갇히기보다, 어디에서든 연기할 수 있는 그냥 ‘배우’가 되고 싶다.


정성화가 사진 촬영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스튜디오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걱정이 앞섰다. 그는 성대 결절이라 했다. 마지막 공연을 향해 달리는 ‘킹키부츠’ 무대에 서 온 것이 두 달째. 공연이 없는 날에는 공연 홍보하랴, 이제는 영화 ‘스플릿’ 홍보하랴 피로를 제대로 풀지 못한 탓이다. 그가 나타나자 걱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예의 바르게 인사를 청하고 카메라 앞에 선 그는, 0.5초마다 자세를 극에서 극으로 바꾸며 스튜디오에 있던 사람들의 배꼽을 빼놨다. 누군가는 우스개로 “정성화 안에 청순한 여자 아이돌부터 ‘느낌 충만한’ 힙합 전사까지 들어 있다”고 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 한층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포즈를 취할 때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사진 찍고 인터뷰하는 내내 정성화는 손톱만큼도 멋쩍어 하지 않았다.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는 배우의 프로 정신이 빛났다고 할까. 짧은 순간이지만 그가 얼마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찬 배우인지 알 것 같았다. 그 자신감의 근거는 이러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정성화가 악역이라니.
“나도 내게 악역을 맡길 감독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최국희 감독님이 그러시더라. ‘평소 정성화의 눈을 보면서 악역도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절묘한 순간에 활짝 미소 지어 보이는 것으로 악역에 기묘한 분위기를 더하던데.
“어디서 많이 보던 악역 말고, ‘정성화다운’ 악역이 뭘까 고민했다. ‘평소 나는 싫은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쳐다보고 말하지?’ 생각했다. 왜, 사람이 실실 웃으면서 안 좋은 얘기하면 더 얄밉지 않나. 방향을 그렇게 정하고 나니, 중오를 연기하며 언제 웃어야 할지 감이 잡히더라.”
-결말까지 보고 나면 중오가 철종을 괴롭힌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 때문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맞다. ‘나쁜 사람’이라는 게 원래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닌가. 중오가 수갑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에 대해 극 중에는 자세히 표현되지 않았지만, 시나리오에는 ‘그만큼 경찰 업무에 많이 공헌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형편이 어려운 유소년 볼링 선수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좋은 사람인데, 유독 철종을 싫어하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철종에게 계속 지기만 했으니까. 그래서 철종이 빈틈을 보인 뒤로는, 일부러 그를 곁에 두고 그 틈을 악착같이 파고들며 괴롭힌다. 그렇게 자신의 자격지심을 해소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뮤지컬계에서 인정받는 스타 배우 아닌가. 그런 열등감을 느껴 본 적 있나.
“지금의 나를 키운 건 열등감이다. 어려서부터 개그맨이 되고 싶었고, 고등학생 때는 선생님들이 교내에 없던 ‘예능 장학금’을 만들어 주실 만큼 ‘꽤 웃기는 놈’으로 통했다. 열아홉 살의 나이에 SBS 3기 공채 개그맨이 됐으니, 그 꿈을 아주 빨리 이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개그맨이 되고 나서는 주목받지 못했다. 인기 절정의 개그맨 그룹 ‘틴틴파이브’에 합류하기도 했지만 2년 만에 잘렸다. 그 뒤 군대에 다녀왔고, 캠퍼스 드라마 ‘카이스트’(1999~2000, SBS)에서 익살스러운 만수 선배 역을 맡으며 TV 드라마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그때도 ‘눈에 띄지 않는다’ ‘뒷심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에서 ‘뭘 해도 중간이거나, 그 이하’라 생각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격지심 같은 게 생기더라. 그것을 벗어나기 시작한 게 뮤지컬을 하면서부터다. ‘그래, 이거야!’라 느낀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열등감 속으로 들어가지 말아야지.’”
-열등감이 자신감으로 바뀐 순간은 언제인가.
“2007년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 역에 조승우와 함께 더블 캐스팅됐다. 대극장 뮤지컬의 주인공을 맡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조승우의 공연은 표가 순식간에 팔려 나가는데, 내 공연은 그렇지 않았다. 첫 무대를 마쳤을 때, 관객이 전부 일어나 박수 쳐 줬다. 내 인생의 첫 기립 박수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때 정말 미칠 듯이 행복했다. ‘그래, 연기가 내 길이야.’ 그런 확신이 들었다.”

-영화에서 눈에 띄기 시작한 건 코미디영화 ‘위험한 상견례’(2011, 김진영 감독)부터다. 이 영화에서 가장 웃겼던 장면이 바로, 음침한 분위기의 운봉(정성화)이 순정만화를 광적으로 좋아한다는 게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내가 영화에서 ‘관객을 웃길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은 작품이다. 사실 촬영장에서 그 장면을 찍을 때만 해도 우리끼리 크게 웃지는 않았다. 그래서 ‘재미없나 보다’ 생각했는데, 완성된 영화를 보니 관객이 그 장면에서 제일 많이 웃더라. ‘이게 뭐지? 아, 코미디영화 연기는 이런 식으로 하면 되는구나’ 하는 감이 왔다.”

-개그맨 출신에 뮤지컬 배우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영화에 출연할 때는 ‘영화’라는 장르에 맞는 아주 섬세하고 입체적인 연기를 보여 준다. 개그맨 출신 배우 몇몇이 극에 웃음을 주는 감초 역할로만 소비되는 것과 다르다.

“어떤 영역에 갇히기보다, 어디에서든 연기할 수 있는 그냥 ‘배우’가 되고 싶다. 그러려면 뮤지컬 연기와 영화 연기가 어떻게 다른지, 순간적인 웃음을 주면서도 극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코미디 연기가 어떤 건지 경험을 통해 노하우를 쌓아야 한다. 영화 연기에 대해 크게 배웠던 순간 중 하나가, 한국전쟁을 다룬 ‘서부전선’(2015, 천성일 감독)에 한국군 연대장 역으로 출연했을 때다. 옆에서 이경영 선배님이 한국군 유 중령 역을 연기하시는 걸 보면서, 영화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 연기’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뮤지컬 무대에서는 단 한순간이라도 배우가 가만히 있으면 ‘사고 났다’고 생각한다. 한데 영화에는, 속으로는 그 인물의 정서를 품은 채 겉으로는 아무 표현도 안 하는 연기가 필요하더라. 대사를 들릴락말락 읊조릴 줄도 알아야 하고(웃음). 영화 연기는 참 섬세하다. 그래서 재미있다.”
-뮤지컬 무대에서의 경험이 영화에서 연기할 때도 도움되나.
“물론이다. 매일 무대에 오르면서 ‘아, 이건 매일 해도 관객이 웃는구나, 우는구나’를 경험하며 연기에 대한 통계 자료와 대중적 감각을 몸소 쌓는 것이니까.”

-‘킹키부츠’에서는 드래그 퀸(Drag Queen·여장 남자) 롤라 역으로 관객을 울리고, 웃기고, 손뼉 치게 하고, 감동시키는, 그 모든 연기를 아주 능수능란하게 해내는 느낌이더라. 그중 뭐가 제일 어렵나.
“누군가를 웃게 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 특히 코미디 연기에는 강-약-중-강-약 같은 박자가 숨어 있다. 그 박자를 타고 가다 적재적소에서 정교하게 엇박을 내야 사람들이 놀라고 웃는다. 배우가 박자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이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 난 그게 모든 연기의 기본이라 생각한다. 일상적 연기도 마찬가지다. 고유의 박자가 없다면, 그건 연기가 아니라 실제 누군가의 일상을 찍어 놓은 다큐멘터리 영상과 다를 바 없다. 그 리듬을 가장 잘 익힐 수 있는 훈련이 바로 코미디다.”
-‘건강한 자신감으로 가득찬 배우’라는 느낌이 든다. 연기하는 것을 행복해 하는 것 같고. 그럼에도 배우로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나.
“조금만 쉬었으면 좋겠다(웃음). 혼자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하면서 TV 보고, 밥도 배달시켜 먹고. 심신이 사무치도록 아무것도 안 해 보고 싶다(웃음). ‘킹키부츠’ 공연 끝나면 한 달 정도 쉴 테니, 그때 쉬면 된다. 내가 또 오래 쉬면 병나는 스타일이다(웃음).”

-집에 있을 때 부인에게 노래도 불러 주고 그러나.
“(단호하게) 그러지 않는다. 하하하하하. 아내가 싫어한다. 낯 간지러운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성격이라. 내가 불러 주려 해도 ‘어우, 하지 마~’ 이런다. 대신 두 돌 갓 지난 딸에게 동요를 많이 불러 준다. ‘타요~, 타요! 타요~, 타요! 개구쟁이 꼬마 버스~~~. 그런데 딸도 내 목소리를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웃음).”

 
‘배우’ 정성화,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영화 4
정성화의 영화 출연작 목록을 쓱 훑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는 진즉 ‘코미디 배우’라는 울타리를 넘어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여러 색깔의 연기를 뽐냈다. 그걸 보여 주는 영화 네 편을 골랐다.

 
‘댄싱퀸’(2012, 이석훈 감독)의 종찬
정성화 스스로 “가장 인상적인 영화 출연작”으로 꼽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정성화는, 인권 변호사인 주인공 정민(황정민)이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하도록 돕는 정치인 종찬 역을 맡았다. 특히 종찬이 정민과 농구하며 그에게 정치계 입문을 권유하는 장면은, 정성화가 진지하고 번듯한 캐릭터를 믿음직스럽게 연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 줬다. 이 장면에서 종찬의 대사는 정성화가 직접 쓴 것이다.

 
‘창수’(2013, 이덕희 감독)의 상태
‘창수’는 남의 징역을 대신 살아 주며 연명하는 밑바닥 인생 창수(임창정)의 기구한 삶을 그린 누아르영화. 이 영화에서 정성화는 “평범한 삶에 훨씬 못 미치는 삼류 인생을 사는, 소위 ‘양아치’ 캐릭터” 상태를 연기했다. 창수와 친형제 같은 사이지만, 결정적 순간에 창수를 배반하는 건달 역이다. 임창정과 짝패를 이뤄 보여 주는 걸쭉한 욕설과 애드리브 연기가 인상적이다.

 
‘탐정 홍길동:사라진 마을’(5월 4일 개봉, 조성희 감독)의 여관 주인
탐정 홍길동(이제훈)은 일생의 원수를 쫓던 중, 할아버지(박근형)를 잃은 자매와 동행하게 되면서 한 여관에 묵는다. 이 여관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이가 바로 정성화다. 거친 삶을 살다 마음을 다잡고 여관을 운영하는 인물로, 위험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기까지 한다. “그 장면에서 악당들을 둘러메쳐야 해서 ‘액션 연습’이라는 걸 처음 해 봤다. 한마디로 ‘정성화의 본격 액션을 볼 수 있는 영화’라 할까(웃음).”

 
‘스플릿’(11월 9일 개봉, 최국희 감독)의 중오
‘정성화가 첫 악역을 맡은 작품’이라는 말은 영화 출연작만 따졌을 때 그렇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을 연기하면서 ‘악한’ 면모를 보여 주기도 했으니까.” 정성화는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악역 중오에 도전했다. 그는 이 영화가 또 다른 기회를 열어 주기를 바란다. “‘댄싱퀸’의 종찬을 연기한 뒤로 영화계에서 좀 더 넓은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스플릿’이 나를 다시 한 번 다양한 역할로 이끌어 주는 작품이 됐으면 좋겠다.”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사진=전소윤(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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