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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스타인 매직'은 어떻게 컵스의 저주를 풀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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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에는 세 가지 유명한 '저주'가 있었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밤비노의 저주'가 유명했다. 1920년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한 뒤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하자 나온 말이다. 191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승부 조작 사건, 즉 '블랙삭스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 뒤 번번이 우승에 실패하자 '블랙삭스의 저주'라는 말이 붙었다. 둘 모두 10년도 넘은 옛이야기가 됐다. 2004년 보스턴이, 그리고 이듬해 화이트삭스는 연달아 월드시리즈 우승팀이 됐다.

나머지 하나, '염소의 저주'도 마침내 올해 풀렸다. 1945년 월드시리즈에서 애완 염소의 입장을 거부당한 한 팬이 “이 구장(리글리필드)에서 다시는 월드시리즈가 열리지 않을 것이다”는 악담을 퍼부었다고 한다. 리글리필드를 홈으로 쓰는 시카고 컵스는 1945년 이후 올해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1908년 우승에 이어 108년 만에 우승의 감격을 맛봤다.

저주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2003년 내셔널리그챔피언결정전(NLCS)에서 컵스는 플로리다 말린스에 3승1패로 앞서 나갔다. 5차전에서도 8회 1사까지 3-0 리드를 잡았다. 그러나 우익수 쪽 파울플라이 타구를 스티브 바트만이라는 관중의 방해로 아웃 카운트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이 플레이 뒤 컵스 투수진은 거짓말처럼 두들겨 맞으며 8회에만 8실점했다. 그리고 6·7차전도 모두 내주며 월드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언필칭 '저주'지만, 바트만의 방해도, 투수진의 붕괴도 결국 사람의 일이었다. 그리고 '저주'는 사람이 풀었다.

2003년 이후 줄곧 하위권에서 맴돌던 컵스는 2011년 10월 보스턴 단장을 지낸 테오 엡스타인을 사장으로 영입한다. 2002년 고작 29세 나이로 보스턴 레드삭스의 단장으로 부임해 해묵은 밤비노의 저주를 해결한 엡스타인이었다. 보스턴과 계약이 남아 있던 그를 데려오기 위해 컵스는 유망주를 보스턴으로 보내는 출혈까지 감수했다.

엡스타인 부임 시점에 컵스의 상황은 매우 암울했다. 팀 성적도 71승91패로 최하위권이었지만, 선수 구성은 더 나빴다. 알폰소 소리아노, 카를로스 삼브라노 등 몸값 못하는 선수가 즐비했다. 유격수 스탈린 카스트로와 선발투수 가자 두 명 정도가 눈에 띄는 활약을 했다.
현재뿐 아니라 미래도 어두워 보였다. 갓 프로에 데뷔한 19세 하비에르 바에즈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미래의 자원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1년 전 가자를 영입하기 위해 탬파베이에 내준 유망주들(크리스 아처·이학주·브랜든 가이어·로빈슨 치리노스)이 아쉬웠다.

한마디로,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다시 실패한 팀이 컵스였다. 엡스타인은 방향을 확실하게 잡았다. '리빌딩'이었다. 우선 팀의 미래 청사진에 없는 고액 연봉 선수를 내보냈다. 소리아노와 삼브라노는 차례로 팀을 떠났다.

이어 다양한 방법으로 타자 유망주들을 수집했다. 시속 100마일 투수였던 앤드류 캐쉬너를 대가로 안정적인 선구안을 자랑하는 1루수 앤서니 리조를 데려왔다. 이어 쿠바를 탈출한 20세 외야수 호르헤 솔레어에게 3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안기며 영입에 성공한다. 드래프트에서는 1라운드에서 알베르토 알모라, 크리스 브라이언트, 카일 슈와버 등을 차례로 지명했다.
2014년에는 FA까지 2년가량 남은 에이스 제프 사마자를 내보내고 오클랜드의 유격수 유망주 에디슨 러셀을 데려왔다. 투수 유망주 영입 기회도 많았지만, 엡스타인은 오직 타자 유망주만 고집했다.





그의 방침은 '투수력이 우선'이라는 한국 프로야구의 고정관념과 대조된다. 투수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메이저리그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엡스타인의 행동에는 근거가 있었다. 실증적인 연구 결과들은 비슷한 등급의 유망주일 경우 투수보다는 타자의 성장 결과가 더 좋다고 말한다. '하드볼타임스'에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1~100위 유망주를 5개 구간으로 나눠 비교했을 때 5개 구단 모두에서 타자 쪽이 우위를 보였다. 투수 유망주는 부상이나 급격한 구위 저하 등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특히 1~10위 유망주 중 메이저리그 레벨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선수의 비율은 타자 쪽이 10%였던 것에 비해 투수 쪽은 31%에 달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타자는 마이너리그 시절의 평가가 메이저리그 승격 뒤에도 어느 정도 일관성을 보인다. 마이너에서 A급은 메이저에서도 A급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투수는 일관성이 떨어졌다. 유망주 시절 1~10위 선수와 26~50위 선수의 메이저 레벨에서의 활약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투수 유망주 평가가 그만큼 더 어렵고 불확실성이 크다는 의미다. 엡스타인은 '시속 100마일 강속구'와 같은 과대 포장에 현혹되지 않고, 통계에 근거한 냉정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투수력 보강을 위해서는 조금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한 가지씩 흠이 있어 가치가 떨어진 투수들을 싼값에 모았다. 마무리 투수 헥터 론돈은 룰5 드래프트에서 영입한 선수다. 카일 헨드릭스는 구속이 낮아 주목받지 못했다. 제이크 아리에타는 메이저리그 데뷔 후 부진으로 가치가 하락한 유망주였다. 칼 에드워즈는 60kg대 왜소한 몸집으로 스카우트들의 외면을 받았다. 이 세 명을 7월 말 데드라인에 맞춰 트레이드 시장에서 싸게 영입했다. 가치가 과장된 '특급 유망주'는 피하고 약간의 하자가 있는 유망주들을 다수 모았다.
 
어느 정도 팀이 궤도에 오르자 아껴 둔 지갑을 아낌없이 열었다.
2년 사이 존 레스터, 제이슨 헤이워드, 존 래키, 벤 조브리스트 등의 대형 FA들이 연이어 컵스에 입단했다. 불펜 투수진의 부진으로 인해 팀이 잠시 흔들리자, 그동안 수집한 여러 타자 유망주들 중 중복 포지션의 선수들을 내보냈다. 그 대가로 아롤디스 채프먼과 마이크 몽고메리라는 좌·우 구원투수를 한 명씩 영입했다. '유일한 약점'을 없앤 과감한 트레이드였다. 그 결과 컵스는 2016년 정규 시즌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103승58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8년 만의 지구 우승에 성공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컵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LA 다저스를 차례로 꺾으며 71년 만의 월드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월드시리즈에선 위기도 있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앤드류 밀러와 코디 앨런, 2명의 마무리 투수로 변칙적인 투수 운용을 했고, 컵스는 이에 잘 대처하지 못했다. 4차전까지 1승3패로 몰렸다. 하지만 5차전 이후 타선이 폭발했다. 결국 마지막에 웃은 쪽은 더 탄탄한 전력을 갖춰 놓았던 컵스였다.
 
14년 전 엡스타인이 보스턴 단장으로 부임했을 때 뒷말이 무성했다. 예일대와 샌디에이고대 로스쿨 출신인 29세 풋내기가 단장직에 올랐다. 개성 강한 스타들이 즐비한 메이저리그 판에서 견뎌 낼 수 있냐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젊고 냉철한 엡스타인은 오히려 메이저리그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들보다 편견 없이, 객관적인 자료에 기초해 효율적인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었다. 보스턴에 이어 컵스로 팀을 옮겨서도 또 한번의 놀라운 성공을 이룩했다. 그의 성공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컵스가 그동안 월드시리즈와 인연이 멀었던 이유는 결국 실력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실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우승하는 것은 아니다. 스포츠에는 행운과 불운이라는 요소가 개입한다. 하지만 '저주'로까지 불린 불운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능력 있는 경영자가 성공을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선규(야구공작소)
 
야구 콘텐트, 리서치, 담론을 나누러 모인 사람들. 야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공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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