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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너와 함께 걸어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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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피플앤이슈부 기자

집 근처, 가게 밖에 TV를 틀어놓는 편의점이 있다. 야구 시즌이던 지난 몇 주, 저녁이면 편의점 앞 테이블은 야구팬들로 꽉 찼다. 어느 저녁, 20대로 보이는 여성이 혼자 캔맥주 세 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야구를 보고 있었다. 옆옆 테이블의 외국인 남성 둘 중 하나가 여자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같이 마실까, 뭐 그런 분위기. 그런데 이 여성, 눈을 TV에 고정시킨 채 손가락으로 답한다. 검지와 중지를 눈앞에 올리더니 앞으로 쑥쑥, 손가락을 펴 남자들 자리 쪽으로 휘릭휘릭. “나 야구 보잖아. 조용히 해 줄래?”란 절묘한 의사 표현. 감탄했다. ‘오오, 멋진걸.’

요즘 한국의 젊은 여성들에게 자꾸 반한다. 지난 한 달여, 트위터에는 문화계에서 일어난 성폭력을 증언하는 20~30대 여성들의 폭로가 이어졌다. 글 하나하나를 읽으며 분노했고, 나의 비겁이 부끄러웠다. 잊고 싶은 기억을 끌어내야 하는 고통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싸우기로 결정한 사람들. 유명 사립미술관 큐레이터를 고발한 여성은 이렇게 썼다. “많은 분들이 (나처럼)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힘드시면 굳이 말하지 않으셔도 좋다. 그저 저의 용기로 당신이 힘을 받으셨으면 한다.” 누군가 이런 문장으로 답했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될 거야.’

이화여대 학생들의 시위도 감동적이었다. 미래라이프대 설립 반대에서 시작해 시국선언으로까지 이어진 이들의 용기는 지금 한국 사회의 거대한 연대를 이끌어냈다. ‘명문 여대생들의 이기적 순혈주의’에서 ‘마스크는 왜 쓰느냐’까지 유독 시비 거는 이들도 많았지만 당당했다. 경찰과 대치하며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는 모습, 시위에 나온 졸업생들의 ‘언니 왔다’ 피켓을 보며 울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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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걷기왕(사진)’은 개인적으로는 올해 본 한국 영화 중 최고였다. 선천적 멀미증후군으로 모든 교통수단을 탈 수 없는 여고생 만복(심은경)이 경보(競步)에 도전한다는 귀여운 이야기. 무엇보다 만복에게 수지 선배(박주희)가 있어서 좋았다. 처음엔 “넌 치열함이 없어”라고 만복을 타박하던 수지는 멀미 때문에 섬(강화도) 밖을 나가본 적 없는 만복이 전국체전 참가를 위해 걸어서 서울로 향할 때 함께 길을 나선다. “선배는 왜 나랑 같이 걸어요?” “그냥, 그러고 싶어서.”

영화의 엔딩 곡이 흥겹다. “걷다 보면 혼자는 심심해/우리 둘이 천천히/가고 싶은 그곳이 어디라도/너와 함께 걸어갈 거야.” 나도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같이 걸어주는 언니가 되어야겠다고.

이영희 피플앤이슈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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