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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범의 쏘울루션] ⑤우울증 “살아갈 의욕이 없어 죽고 싶다”

“사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오랜 침묵을 깨고 어렵사리 그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진료시간 대부분은 그의 아내가 답변을 대신했다. 아내는 남편이 몇 년 전부터 급격히 말수가 없어졌다고 했다. 하루 종일 넋이 나간 사람처럼 지낸단다. 바깥 출입도 하지 않고 집 안에서 그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앉아 있기 일쑤였다. 어떤 날은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릴 때도 있었고, 실어증 환자처럼 말을 시켜도 응답이 없는 날도 많았다. 가족들은 너무 답답했다. 이상하게도 밥은 잘 먹었다. 배가 부를 것 같은데도 꾸역꾸역 먹더니 체중이 10㎏ 이상 늘었다. 그러다 가끔씩은 ‘내가 죽어야 해. 죽어야지’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실제 자살 시도로 이어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남자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는 얼마 전까지 은행 지점장으로 근무했다. 좌우명이 ‘성실’일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순종적이기까지 한 그는 상사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르면서도 부하 직원들에게는 더 없이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 결과 꿈에 그리던 지점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은행이 통폐합을 하게 됐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졌음을 느꼈다. 통폐합 과정에서 반복되는 회의로 인해 지쳐갔고 부조리한 결정이 많았지만 단 한 번의 항의도 하지 못하고 윗선의 결정에 따라야 했다. 아꼈던 직원들마저 자신을 원망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지만 말도 못하고 그냥 인정했다. “모든 게 다 나 때문이야. 내가 못나서 이렇게 된 거야.’ 그는 그렇게 자책했다. 그간 이뤄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아 허무했다.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꼈고, 점점 말수가 줄어갔다. 공허함과 무력감이 그를 짓눌렀고, 몸과 마음의 전반적인 기능이 저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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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학서인 『상한론(傷寒論)』에서는 이와 유사한 인간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중략)…몸은 무거워지고, 애를 써도 불안하고, 마음에 소중한 것을 잃을까봐 심란하고, 특히 속이 헛헛하고 텅 빈 느낌이 들며, 타인에게 손님 대하듯 친절히 대하느라 마음속의 할 말을 다 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心??反?語, 若加?針, 必??煩躁, 不得眠, 若下之, 則胃中空虛, 客氣動膈心中懊?, 舌上胎者, 梔子?湯主之)”

원문 중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 몇 개를 살펴보자. 먼저 ‘객’(客)은 ‘제후들 사이를 오고 가는 사절’이란 뜻으로 상대를 높여 부르는데 사용된다. 그래서 ‘객기’는 타인을 극진한 손님을 대하듯 하는 기분을 말한다. 자신이 불편하더라도 꾹 참고 손님의 기분에 맞추는 심리다. 자기감정은 표출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친절하게 응대하는 ‘을’의 마인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이런 부류의 사람 중에는 ‘자신은 어딘지 모르게 부족하고 모자라다’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위중공허’(胃中空虛)라는 단어는 위 속이 텅텅 비고 허전함을 말한다. ‘공’(空)자는 구멍이 뚫렸다는 뜻이다. ‘허’(虛)자는 호랑이 ‘호’(虎)에 구릉을 뜻하는 ‘구’(丘)가 합쳐진 글자다. 이것은 호랑이 같은 맹수의 출현으로 주거지가 황폐화돼 의당 있어야 할 것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 두 단어가 묘사하는 정황을 요약해본다면 사람을 대할 때 자기 내면의 감정을 표출하는 대신 친절함 이상으로 굽실거리게 되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존재에 대한 부족감을 느끼게 하여 마음속에 텅 빈 공허함이 엄습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같은 우울증의 심리적 바탕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열등감이다. 무의식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열등감은 자존감 결여의 부산물이다. 일반적으로 열등감은 유년시절 엄격하고 권위적인 가정 환경에서 비롯된다. ‘허용’보다는 ‘통제’가 강한 양육방식은 아이가 부모의 눈치를 보게 만들고, 자기 내면의 확신보다는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주목하게 한다. 따라서 문제의 원인을 자기로 귀결시키고, ‘내가 잘못했다. 나는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라는 잦은 반성과 자책에 빠지기 쉽다. 자기 계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도 어려서 형성된 낮은 자존감은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흔히 순종만 하고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평가를 중시하고 통제가 강한 이 같은 환경에서 만들어진다.

사연의 주인공도 유년시절 통제가 강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해 주사가 심했고, 폭행도 일삼았다. 어머니와 도피해 살았지만 오랫동안 아버지의 권위에 짓눌려 압박 받고 지내오는 동안 심한 위축감에 시달렸고, 그러면서도 외아들이라는 책임감에 누나들을 지켜야 했다. 어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자기의 감정을 표출하기 보다는 억누르며 살아왔다. ‘내가 잘돼서 집안을 바로 세워야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이런 생각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는 은행원의 길로 들어섰다. 학력 콤플렉스 때문에 더 노력하고 공부했다. 때론 지칠 때도 있었지만 그 어떤 원망도 없이 꿋꿋하게 일해 지점장까지 올랐다. 그런데 그 모든 게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허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살아갈 의욕도 그 어떤 의욕도 없었다. 노력할 에너지는 바닥이 났고 탈진 상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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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존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첫째, 열등감을 버려야 한다. 자신이 늘 부족하다고 여기는 생각은 틀렸다. 스스로 만들어낸 왜곡된 생각이다. 잘못된 생각은 버려야만 낮은 자존감을 극복할 수 있다. 둘째로 자신 있게 행동해야 한다. 상대에게 맞추는 ‘을’의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생각대로 당당하게 행동해야 한다.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 대신 내 생각도 옳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셋째, 자신의 말을 해야 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내면에 품고 있는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피력한 경험이 부족하다. 수시로 자신의 의견을 용기 있게 표현함으로써 타인과 소통할 때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워져야 한다. 넷째, 허기짐을 극복해야 한다. 허전하고 부족하다는 생각에 채우려는 마음은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먹는 행위를 유발한다. 하지만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 허기진 마음은 음식으로 절대 채워질 수 없다. 오히려 많이 먹으면 몸이 무거워 지고 움직임이 둔해진다. 그만큼 마음도 무거워져 우울증을 심화시킨다.

위 환자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듯이 자신이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하나씩 하나씩 뿌리를 더듬어 갔다.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거기서 비롯된 열등감,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그로 인해 스스로 억눌렀던 자아,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보면서 점차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내에게 “내가 왜 이렇게 멍청하게 있는 거지?”라며 되물었다고 한다.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듯 번쩍하고 정신을 차렸다.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영어 학원을 등록하며 자기 개발에 다시 에너지를 쏟게 됐고, 열심히 살겠다는 목표를 갖게 됐다. 말문도 전처럼 열렸고, 눈동자도 또렷하게 변했다. 우울의 긴 터널을 빠져 나와 환한 세상을 맞이했다. 삶은 정말 마음먹기 나름이 아닌가. 생각하기에 따라 지옥이 될 수도 천국이 될 수도 있다. 천상병의 시처럼 삶을 아름다운 ‘소풍’으로 만드는 건 결국 마음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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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범의 쏘울루션]은 현대인이 겪는 여러 마음의 질환을 다루고, 고대 의학서인 『상한론(傷寒論)』을 통해 해결 방법을 찾아본다. 총 10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다. 저자인 노영범 한의사는 30년 노영범 부천한의원 대표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공황장애, 우울증, 주의력 결핍 등 신경정신질환 전문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다. ‘한의계를 움직이는 파워엘리트 21인’으로 선정된 바 있고, 2007년부터는 한국소비자보호원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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