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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시도한 장바이리, 실탄 늑골 스쳐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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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바이리와 일본인 간호사 쭤메이(左梅). 홋카이도 출신인 쭤메이는 장바이리와 결혼 후 일본과 단절했다.

바오딩(保定)군관학교 교장 장바이리(蔣百里·장백리)의 자살 소식은 전국을 진동시켰다. 며칠 지나자 원인이 밝혀졌다. 정부의 지원을 믿고 부임한 장바이리는 자신이 넘쳤다. 생도들에게 긍지를 심어줬다. “오늘날 육군을 논하는 사람들은 독일과 일본을 부러워한다. 나는 두 나라를 두루 경험했다. 군사훈련과 실습에 참여하고, 군 부대 시찰도 기회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머리가 세 개 달리고 손발이 여섯 개 있는 괴물이 아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다. 전법이나 전술도 특별한 게 없었다. 애국심이 투철하고, 상하가 한마음으로 노력하다 보니 오늘의 성취를 이뤘을 뿐이다. 나는 우리의 지혜와 능력을 믿는다. 우리나라가 영원히 빈약하고, 군대가 저들만 못하리라고 믿지 않는다. 제군들이 장차 군을 다스릴 우수한 장교가 되도록 헌신하겠다. 그러지 못하면, 천하를 향해 사죄하겠다.”

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02-

육군부(陸軍部)는 장바이리의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멋대로 교관을 갈아치우고, 교재도 제때 보내주지 않았다. 기병과에 말이 한 필도 없었고 포병과는 박격포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장바이리는 애가 탔다. 베이징을 여러 차례 오갔다. 도처에 장벽투성이였다.

“나의 요구는 받아들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관료사회는 중국의 출로를 찾기 힘들 정도로 음침했다. 죽음으로 저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1913년 6월 17일 밤, 베이징의 육군부에서 온종일 시달리다 돌아온 장바이리의 몰골은 처참했다. 교장실 부관이 구술을 남겼다. “기색이 초췌했다. 감히 말을 걸기 힘들 정도였다. 먹을 갈아달라는 말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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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바이리와 쭤메이는 딸만 다섯을 뒀다. 1947년 7월, 상하이에서 열린 셋째딸 장잉(蔣英)과 천쉐썬(왼쪽)의 결혼식. [사진 김명호 제공]

[군관학교 교육장에 보낼 유서 작성]장바이리는 자살을 결심했다. 군관학교 교육장과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는 노모, 일본육사 동기인 윈난(雲南)성 도독(都督) 차이어(蔡鍔·채악)에게 보낼 장편의 유서를 작성했다. 참모총장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에게 보내는 편지는 썼다가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교육장 앞으로 쓴 유서가 남아있다.

“내 통장에 500원이 있다. 딸 결혼에 쓰도록 해라. 노모는 젊어서 홀몸이 됐다. 직접 사정을 고하고, 틈나면 찾아가 적막을 달래주기 바란다. 너와 사귄 지 10여년, 그간 반년을 함께 일했다. 말 하자면 끝이 있을 리 없고, 안 해도 내 심정을 알리라 믿는다. 수십 년 후, 혼백(魂魄)이라도 다시 만나자.”

날이 밝자 장바이리는 비상을 걸었다. 전교생 2000여 명을 연병장에 집합시켰다. 정장을 하고 나타나 엄숙한 눈빛으로 생도들을 한차례 둘러봤다. 생도들은 교장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고 직감했다. 뭔가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예감은 했지만, 자살까지는 상상도 못했다.

교장의 침통한 목소리가 새벽 공기를 갈랐다. “그간 너희에게 많은 요구를 했다. 어김없이 잘 따라줬다. 나는 내가 할 일을 제대로 못했다. 스스로 벌을 내리려 한다. 내가 무슨 행동을 하건 미안해 할 것 없다. 교장의 책임을 다하지 못해 미안할 뿐이고, 너희를 볼 면목이 없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딜 가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안되는 일이 저기서는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게 무슨 일이 생겨도 동요하지 마라. 중국의 미래가 너희에게 달려있다.” 학생들은 불길한 징조를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총성과 함께 장바이리가 뒤로 쓰러졌다. 교정이 혼란에 빠졌다. “교장이 자살했다.”
 
[“자살은 용감한 행동이 아닙니다”]불행 중 다행이었다. 연단 밑에 있던 교관은 평소 교장이 비분강개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의아해 하며 장바이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장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하는 것을 보자 미친 듯이 계단을 올라가 총을 나꿔챘다. 총구가 약간 왼쪽으로 틀어지며 탕 소리가 났다. 실탄이 늑골을 스치고 지나나가는 바람에 심장은 상하지 않았다. 교장은 목숨을 건졌다. 생도들의 통곡이 바람 소리를 삼켰다.” 보고를 받은 대총통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는 의료진을 바오딩으로 파견했다. 생도들도 무심치 않았다. 돌아가며 교장의 병실 주변을 지켰다.
장바이리의 자살 사건이 퍼지자 정부 실책을 비난하는 소리가 드높았다. 장바이리의 쾌유를 기원하는 편지가 줄을 이었다. 윈난 도독 차이어는 이유를 밝히라며 정부를 압박했다. 위안스카이는 민심을 읽을 줄 알았다. 일본 최고의 의사와 간호사를 베이징으로 초빙했다.
34년 후, 첸쉐썬(錢學森·전학삼)의 장모가 될 일본간호사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장바이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관심도 없었다. 첫 대면 날, 장바이리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자살은 용감한 행동이 아닙니다. 참을 줄 알아야 용감한 사람입니다. 자살은 책임을 피하려는 행위입니다. 위대한 이상을 실현해야 할 분이, 가볍게 자신을 희생시키려 한다면, 그런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장바이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훗날 차이어에게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 “내가 개만도 못한 것들이 몰려있는 당파의 삼류 군인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병상에서 일어나면 이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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