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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만 당한 인도, 핵·우주 강국으로 이끌어

 

인도의 우주발사체가 인도 동부의 발사장에서 대기 중이다. 인도가 독자기술로 개발한 정지궤도위성용 발사체다 [ISRO 홈페이지]



압둘 칼람(1931~2015)은 인도 자주국방의 아버지로 불리는 과학자다. 인도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립한 국가 중 처음으로 탄도미사일과 핵무기를 자체 개발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인도 국민은 ‘미사일맨’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조국에 첨단 우주 로켓과 탄도 미사일, 전투기를 안겨준 과학기술 영웅이다. 과학입국과 기술자립의 상징이기도 하다. 힌두교도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에서 종교적 소수파인 무슬림(이슬람신자)인 그는 2002~2007년 제11대 대통령을 맡아 국민 통합에도 기여했다.



[이노베이터, 세상을 뒤집다] 인도 자주국방의 아버지 압둘 칼람

칼람의 이력은 ‘메이드 인 인디아’ 첨단 무기 목록으로 가득 차 있다. 우주항공과학자인 그는 일생을 자주국방 사업에 바쳤다. 40년 넘게 국방연구개발청에서 일하며 중거리 탄도미사일 아그니 개발을 진두 지휘했다. 아그니는 핵탄두를 실을 수 있으며 멀리 중국 한복판까지 날아갈 수 있다. 단거리 탄도미사일 프리트비도 개발했다. 숙적인 이웃 파키스탄의 주요 도시를 사정거리 안에 넣고 있는 무기체계다. 인도 최초의 국산 제트전투기인 경공격기의 개발도 주도했다.



 

1 1998년 5월 인도의 5연속 핵실험 직전의 샤크티1 핵폭탄. 칼람이 개발에 참여했다.



그의 과학자 이력은 1998년 5월 인도 북부 라자스탄주 타르 사막에서 다섯 차례 진행된 핵실험을 주도하면서 절정에 올랐다. 인도는 1974년 ‘미소 짓는 부처’라는 암호명으로 첫 핵실험을 한 뒤 24년간 침묵하다 힌두민족주의정당 BJP의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총리 시절인 1998년 포크란 핵실험장에서 ‘샤크티(위력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작전’이란 이름의 핵실험을 했다. 5월 11일 세 발을 연속으로 터트린 인도는 13일 추가로 두 발을 더 터트렸다. 인도의 핵능력을 증명한 실험이었다. 바지파이 총리는 즉시 기자회견을 열고 인도가 핵보유국임을 선언했다. 인도는 미국과 일본 등 서방국가의 제재를 기꺼이 감수했다. 이 제재는 미국이 2001년 인도와 전략적 동맹관계 수립에 합의한 데 이어 2008년 원자력 협력협정에 서명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미국 의회는 인도 원자력 산업에 미국기업의 참여를 허용하는 ‘미국-인도 평화적 원자력법’을 통과시키면서 인도 원자력발전소 사업에 구애하고 있다.



 



[외딴 섬 낚싯배 대여업 어민의 아들]핵실험을 마치고 뉴델리로 귀환한 칼람은 국민적 영웅이 됐다. ‘미소짓는 부처’ 프로젝트에는 참가하지 않고 과학자 자격으로 실험장에 초청돼 참관만 했던 그는 샤크티 작전에선 수석프로젝트조정관으로서 정치적·과학기술적 책임을 맡았다. 그는 국민에게 “우리는 10억 인구의 나라답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100만 인구의 나라처럼 (소극적으로) 굴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청년들에게는 “꿈을 꿔라. 꿈을 꿔라. 꿈을 꿔라. 그리고 그 꿈을 생각으로 만들고 최종적으로는 이를 행동으로 옮겨라”라고 외쳤다. 그는 “핵으로 무장한 인도는 외국 침략의 공포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고대 인도 문명을 파괴했던 알렉산드로스와 그 후손인 마케도니아인, 페르시아인, 아프간인, 그리고 인도를 식민지로 운영했던 영국인들을 상기시켰다. 그는 “인도는 2500년간 누구도 침략한 적이 없는데도 외국 세력이 인도에 쳐들어왔다”며 “힘을 갖추면 이런 굴욕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칼람은 평소 “나는 식민지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랄 때부터 과학에 관심을 두면서 강력한 인도를 꿈꿔 왔다”고 강조했다. 그는 1931년 인도 남부 타밀나두 주에 있는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인도와 스리랑카 사이에 있는 이 섬에서 낚싯배 대여업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전투기 조종사가 돼 하늘을 나는 꿈을 꿨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주력기인 스피트파이어 전투기의 활약상을 지역 신문에서 읽으면서다. 슈워츠 중등학교와 가톨릭계 대학예비교(고교와 대학 사이에 있는 영국계 교육기관) 세인트 조지프 칼리지를 마친 칼람은 마드라스 대학에서 물리학을, 마드라스 공대에서 항공공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전투기 조종사가 되는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인도공군에서 8명을 뽑는 선발시험에서 9등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1960년 마드라스 공대를 졸업한 그는 인도국방연구개발기구(DRDO)에 과학자로 들어가 자주국방을 위한 기술개발 업무를 맡았다.



 

2 인도의 중거리탄도미사일인 아그니 2호. 2004년 인도 뉴델리에서 공개된 모습. 칼람이 참여한 인도 미사일개발사업의 결과물 중 하나다.



[1980년 인공위성 로히니 궤도 진입 성공]하지만 처음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입사 초기엔 원하던 항공 분야가 아닌 소형 호버크래프트 설계를 맡아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실의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1963~64년 4개월간 미국 우주항공개발국(NASA)의 버지니아주 랭리연구센터와 메릴랜드주 고다드 우주비행센터, 월러프 비행시설을 방문할 기회를 얻으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미국에서 파악한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인도도 할 수 있다”며 연구소를 설득해 1965년 DRDO에서 로켓 발사 프로젝트를 맡았다. 1969년 인도우주연구기구(ISRO)로 옮겨 로켓 과학자로서 활약했다.



인도에서만 공부한 ‘토종과학자’인 그는 인도 최초의 위성발사체(SLV-III) 개발을 담당해 1980년 인공위성 로히니를 준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외국 유학이나 외국기술 도입만을 능사로 여겼던 제3세계에서 그의 활약은 ‘혁신적 제3세계 과학자’의 모범이 됐다. 인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립한 국가 중 최초로 우주발사체 자체 개발과 발사를 이뤘다. 과학입국의 꿈에 성큼 다가섰다. 그는 1970~90년 인공위성 발사체 프로젝트를 꾸준히 추진해 인도를 우주강국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3 압둘 칼람의 이름을 딴 압둘칼람섬의 발사장에서 인도가 자체 개발한 탄도탄요격미사일이 발사되고 있다. 인도판 사드(THAAD)에 해당한다.



[인디라 간디, 탄도미사일 개발 비밀 지원]이 과정에서 칼람은 인도 자주국방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됐다. 우주발사체 기술을 바탕으로 ‘악마 프로젝트’와 ‘용맹 프로젝트’로 이름 붙여진 두 개의 탄도미사일 개발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당시 인도의 연립내각은 이 프로젝트를 승인하지 않았지만 자주국방 의지가 강했던 인디라 간디 총리는 비밀자금을 지원하고 칼람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1980년대 미사일 개발이 공식화하면서 칼람은 ‘통합유도미사일 개발프로그램(IGMDP)’의 총책임자를 맡았다.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아그니 시리즈와 전술 지대지미사일인 프리트비 시리즈의 개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1992년부터 1999년까지 장관급인 정부 수석과학고문과 DRDO의 책임자를 맡으면서 핵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그는 70세가 되던 2001년 모든 자리를 버리고 낙향했다. 과학자로서 후학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은퇴했다. 고향인 타밀나두 주의 이공계 중심대학인 안나대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교수로 변신했다. 전국을 순회하며 대학생과 고교생들에게 과학입국의 꿈을 심어주는 강연도 했다.



당시 집권당이던 우파 BJP는 그런 칼람을 눈여겨봤다. 이 정당은 힌두민족주의를 지향했다. 인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힌두교도를 앞세웠다. 그러자 인구의 13.4%에 이르는 1억4000만 무슬림을 등한시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칼람은 이런 비판을 잠재우고 국민통합을 이루기에 최적의 인물이었다. 칼람은 1999년 1월 낸 자서전 『불의 날개들』에서 힌두 경전인 아타르바 베다와 이슬람의 신성한 책인 쿠란을 모두 인용해 균형감각을 인정받았다. 2002년 인도 대통령에 선출될 당시 집권당인 우파 BJP는 물론 좌파 국민회의까지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2002년 92만2887표를 얻어 10만7366표를 얻은 락시미 사흐갈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인도 대통령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이뤄진다. 인도 최초의 과학자 대통령이자 독신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칼람은 주로 의전적이고 상징적인 역할을 하는 인도 대통령 중 유일하게 ‘민중의 대통령’으로 불렸다. 내각책임제라 큰 실권은 없지만 그래도 국가원수다. 취임 뒤 처음 방문한 곳이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충돌해 20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서부 구자라트주였다. 위험하고 국민에게 인기가 없는 행동이라는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국민 곁에 성큼 다가가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졌다. 칼람 대통령의 키워드는 ‘균형감각’과 ‘과학입국’, 그리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었다. 칼람 대통령은 2006년 2월 방한해 노무현 대통령과 회담했다.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전국을 돌며 대학생과 중고생들에게 과학과 강한 조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강의를 했다. 2015년 7월 27일 그는 실롱에 있는 인도경영대학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특강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특강의 주제는 ‘지구라는 별을 살만하게 창조하기’였다. 고향에서 열린 국장에는 인도 전역에서 35만 명의 추모객이 운집했다.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강한 인도를 만든 과학기술 영웅에게 국민은 눈물로 작별인사를 했다.



 



[칼람의 구도자적 삶]



칼람은 공적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압력에 휘둘리지 않는 강력한 인도’를 만들기 위한 과학자와 행정가의 삶을 살았다. 불과 철의 모습이다. 하지만 개인적 삶은 한 송이 백합을 떠올리게 할 만큼 조용한 구도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저서 『영혼들을 인도하며』에서 “창의성은 아무런 기대 없이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나타난다. 뭘 바라는 게 있다든지, 뭔가 업적을 남기려고 든다든지, 아니면 마음이 권력에 가 있으면 이기심이 발동해 새로운 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인간 내면의 성숙을 강조하는 책 내용은 곧 그의 삶이었다.



평생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수도자처럼 단순·검소·소박한 삶을 살았다. 텔레비전도 없었다. 집에서는 책을 읽고 전통시를 읊었다. 새벽 2시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 6시 30분 또는 7시 30분에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했다. 우주로켓과 미사일을 개발하던 당시에도 버스를 타고 출퇴근했다. 연구소 주변 사람들은 정류소에서 조용히 책을 읽으며 버스를 기다리던 그를 기억한다.



칼람은 채식주의자로 살았으며 술·담배는 냄새도 맡지 않았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자신의 집 뜰에 약초를 심고 공작새와 토끼를 키우며 지냈다. 고향의 전통시를 사랑해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는 반드시 한 귀절을 인용했다.



과학기술 지식을 활용해 의료기기 개발에도 손을 댔다. 1998년에는 심장전문의인 소마 라주 박사와 공동으로 ‘칼람-라주 스텐트’라는 이름으로 심장 스텐트를 개발했으며 2012년에는 농촌지역 원격진료를 위한 칼람-라주 태블릿 컴퓨터도 개발했다. 과학자로서 조국에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우리는 창조하고 파괴한다. 그리고 재창조한다. 아무도 모르는 모습으로.” 저서에서 밝힌 과학기술 철학이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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