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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25. 시녀들

눈을 떴다. 알람이 울린 것도 아닌데 눈이 먼저 떠졌다. 뜨는 순간까지도 잊고 있었다. 내가 열 두 시간 하늘을 날아와 지구의 반대편에 안착해있다는 사실을...
눈을 뜨고 나서야 낯선 천장과 벽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서 독립해 나온 후 대부분의 아침은 혼자 깨어난다. 나는 혼자 잠 깨는 일이 좋다. 빈 공간에 혼자 남겨져 있다는 설렘이랄까, 아무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무한한 자유로움 같은 것....

하지만 타지에서 혼자 잠이 깨는 일은 드문 일이라 오늘 눈을 떴을 땐 좀 달랐다. 쓸쓸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한 묘한 기분이었다.
 
이상했다. 학창시절 한을 풀지 못했던... 그래서 그렇게 오래 별렀던 파리라는 도시의 한 가운데 누워있건만 조금도 설레지 않았다. 오히려 멀리 와있다는 생각에 싸늘한 기운이 몸을 파고 드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달리 미술관엘 가야하고 거기서 에프의 탭을 받아야하고... 거기에 뭐가 있는지 알아내야한다...
 
시리얼과 크로와상, 바게뜨, 샐러드 등이 준비돼 있는 호텔 조식은 생각보단 별로였다. 기계에서 금방 분쇄돼 내려진 따뜻한 에스프레소와 크로와상을 한 조각 먹었다.
아침 시간에 뭔가를 먹는 일이 없는 내겐 흡사 전장으로 나가는 군인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커피는 독약처럼 쓰고 빵은 윤기 없이 푸석거렸다.
 
몽마르트르로 오시면 됩니다, 달리 미술관에서 전화한 여자 말대로 미술관은 몽마르뜨 언덕에 있었다. 구글 지도는 내가 있는 호텔에서 몽마르뜨 언덕까지 지하철을 타고 아베스 역에 내리라고 알려주었다.
 
아베스 역은 내부에서 몽마르뜨 언덕으로 바로 올라가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계단에서 계단으로 이어진 긴 벽에는 아름다운 대형벽화가 펼쳐져 있었다.
오르다 멈추고 오르다 멈추었지만 그림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에프의 탭을 내 손에 받아들기 전엔 어디에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지상으로 올라오니 제일 먼저 메리고라운드가 눈에 들어왔다. 나선형으로 만들어진 긴 계단을 올라오느라 숨이 찼지만 메리고라운드를 발견하는 순간 이상하게 위로 받는 기분이 들었다.
 
화가의 거리에는 오전 시간이었지만 많은 관광객으로 붐볐다. 옆의 카페엔 거리로 내 놓은 테이블 마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화가의 거리를 지나 건물을 돌아서니 달리미술관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이 보였다. 달리의 프로필이 그려진 빨강색 표지판이었다.
 
입구에는 전시 관람 표를 구매하려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카운터엔 삭발을 한 흑인아가씨가 일을 보고 있었다. 특이한 헤어스타일이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머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내 차례가 되자 표를 받으며 관장님을 만날 수 있느냐고 영어로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전해달라는 말을 덧붙이자 삭발을 한 흑인아가씨는 조금 경직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반미주씨 입니까?”
 
유창하진 않지만 제법 발음이 또렷한 한국말이 답으로 날아들었다.
 
“네 맞습니다. 혹시 그때 저랑 통화하셨던...”
 
“아닙...니다. 그분... 제인..입니다. 따라...오세요.”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카운터 옆의 사무실로 따라 들어갔다.
 
“반미주씨?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국인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벌떡 일어서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저도 한국인이에요. 입양돼 와서 국적은 미국입니다.”
 
제인이라는 이름을 듣고 프랑스 인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이라는 건 정말 의외였다.
 
“집은 미국이고 남편이 이곳 대사관에 근무해요. 저도 프랑스에 온지 7년입니다.”
 
한국에서 전화로 통화할 때 그렇게 딱딱하게만 들렸던 이유가 그녀가 한국어를 할 때 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란 걸 알 수 있었다. 중간 중간 이 곳 직원이 뭔가를 물으면 한 없이 편하게 말을 하다가도 나와 이야기를 하려 한국어를 말 할 때는 얼굴에 긴장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제인은 40살이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40살이라면 나와 5년 차인데 그 시절에도 미국입양아가 많았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이었다.
 
“한국어가 유창하시네요. 저는 한국어 발음이 거의 정확하셔서 이민가신 분인가 생각했었어요.”
 
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웃었다. 스스로를 조소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한국부모는 나를 버렸지만 미국인 부모는 제 모국어를 배우도록 해주셨어요. 그리고 어릴 적엔 교민들이 다니는 한국인 학교에도 보내주셨어요. 언젠가 부모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부모는 못 만났지만 한국남자랑 결혼해서 살고 있구요..”
 
“그래서 한국어를 더 잘하시는군요...”
 
내가 잘못한 건 없지만 잘못한 사람들 편에 내가 서 있는 것 같아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장현수 의원님....”
 
제인을 만나고부터 계속 기다렸던 이름이었는데 갑자기 에프의 이름이 나오자 이상하게 머리가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분... 제 부모님 찾아주시려고 애쓰고 계셨는데.... 제게 정말 고마우신 분이셨어요...”
 
제인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왔다. 전화 통화에서 에프의 죽음에 대해 유감이라 말했던 그날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안으로 푹 꺼지던 그 목소리가 왜 그렇게 아프게 느껴졌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의원님이 맡겨 놓으셨다는 그 탭... 언제 맡겨 놓으신 건가요?... ”
 
제인은 한참 생각을 했다.
 
“저는 5년 전에 처음 만났고 지난 5월에 두 번째 만났는데 그때입니다. 그땐 관장님이랑 의원님까지 저희 집에서 밤을 보냈어요. 그때 깊은 이야기를 나누셨던 것 같은데 다음 날 떠나시면서 관장님한테 부탁하신 걸로 알아요.”
 
“그랬군요.. 그럼 그 탭은 지금...?”
 
“아.. 그게... 좀 곤란하게 됐어요..”
 
제인은 미안한 얼굴로 내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곤란하다니요? 여기 없다는 건가요?”
 
빨리 가져가라고 해서 열 두 시간을 날아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곤란하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 화가 나려고 했다.
 
“탭은 여기 미술관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난방지를 위해서 그림 보관하는 금고에 보관하고 있어요. 관장님 안 계셔서... 오셔야 그걸 드릴 수 있어요.”
 
“제가 오늘 여기 올 거라고 미리 말씀드린 걸로 기억하는데요...”
 
“압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관장님 어제 오후에 급한 업무로 리옹으로 가셨어요. 예정에 없던 일이라 급하게 떠나셨어요. 3일 후 출근하실 겁니다. 며칠 파리에 머물면서 기다리시면...”
 
파리에서 리옹까지는 450킬로미터.. 우리나라 서울에서 부산정도의 거리인 셈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거기로 간다고 해결 될 문제도 아니었다. 물건은 여기에 있는데 관장이 와야 건네받을 수가 있다니...
 
“관장님이 직접 주셔야하는 거라... 제가 중간에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었어요.”
 
제인에게 따져야할 건 아니었다. 일이 그렇게 꼬인 것일 뿐이다... 하지만 기분이 개운치가 않았다. 왜 인지 이렇게 일이 꼬일 걸 미리 예상이라고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3일 동안 뭘 하나... 그 사이 한국을 다녀올 수도 없고...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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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후에 출근하시는 건 분명한가요? 거기에 또 다른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죠?”
 
“3일 후 오전에 미술관 행사가 있어요. 그게 제일 우선의 일이라 다른 일은 없을 거예요.”
 
우선 호텔에 기간을 연장해야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일단 호텔로 돌아가서 생각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의원님과 관장님은 개인적으로 잘 아시는 분이셨나요?”
 
제인은 내 말에 한참 뭔가를 생각했다. 그녀가 뭔가를 기억해내려 애를 쓰는 걸 보니 정확한 단어를 집어내려 애쓰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 학교를 같이 다니셨다는데 그.... 같이 학교 다닌 사람을 뭐라고 하는 한국말이 있는데 기억이 안나요.”
 
“동창?”
 
“아 맞아요, 동창.”
 
에프가 미국에서 유학을 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이곳의 관장인 프랑스 인이 에프와 함께 유학한 동창생인 모양이었다.
 
“우리 관장님이 유학시절 신세 진 게 많으셨던가 봐요. 의원님 파리 오실 때 마다 우리 관장님이 초대해서 신세진 거 갚는다고 같이 많이 다니셨어요. 남편이랑 함께 만나 저녁 먹고 우리 집에서 주무신 적도 있구요. 덕분에 의원님이랑 친해져서 제 친부모 찾아주신다고 얼마나 애쓰셨나 몰라요..”
 
에프는 그런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려 애쓰고 누구에게든 자신을 바치려 애쓰는 그런 사람이 맞았다. 누구에게든 필요한 가치가 되는 사람... 그게 처음 그가 꾸던 꿈이고 그가 이루려는 희망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떻게 모함을 한다고 해도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일단 오셨는데 우리 미술관 돌아보시고 가세요.”
 
내가 일어설 채비를 하자 제인이 말했다.
 
“깜박할 뻔 했네요. 저도 표 구입했어요. ”
 
탭을 받는 건 하는 수 없이 일정이 미뤄졌지만 에프가 그렇게 관심 있어 했던 달리의 작품들은 나도 감상하고 싶었다. 달리라는 화가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에프가 좋아했던 화가였으니 그가 왜 달리에 심취했었는지도 많이 궁금했었다.
3일 후 다시 방문하기로 하고 혹시나 해서 호텔번호와 내 핸드폰 번호를 남겼다.
전시실은 지하에 있었다.
 
입구로 내려가자마자 기억의 영속에 등장한다는 흐르는 시계가 전시돼 있었다. 달리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화가이며 영화연출가, 사진작가였던 달리의 작품은 그의 활동영역이 방대한 만큼 작품도 방대했다. 조각과 가구, 석판화, 삽화에 의상까지... 수백 개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흐르는 시계를 조각한 작품은 총 4개였다. 에프가 사진에 담아온 것은 전시장 입구에 대표적으로 세워진 거대한 작품이었다. 도무지 에프는 무엇에 반해 그것을 사진에 담았던 건지... 10여분이 넘도록 그곳에 서서 작품을 감상했다.
 
“그렇게 오래 서서 본다고 영감이 생깁니까?”
 
내 뒤쪽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그리고 곧장 그 목소리가 기억이 났다. 아트였다. 순간 반가운 기분도 들었지만 이번은 절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솔직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우연 맞습니다. 뒤 돌아보셔도 돼요.”
 
독심술이라도 하나? 아트가 한 번씩 툭툭 던지는 말에는 내 생각이 읽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었다.

“뒤 돌아보면 웃어드릴라고 했는데....”
 
아트가 내 옆에 와서 나란히 섰다.
 
“뭐죠?”
 
나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우연 맞다니까요.”
 
장난하듯 그가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들이댔다.
 
“제게 왜 이러세요?”
 
그래도 쳐다보지 않았다. 우연을 빙자한데다 장난스럽게 구는 게 기분 나빴다.
 
“현수형 때문에 저 여기 왔어요. 미주씨를 여기서 만났다면 미주씨도 아마 저랑 같은 이유로 오신 거겠죠?”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같은 이유라니?
 
“현수형이랑 제가 살바도르 달리한테 반한 이유가 있어요.”
 
그제야 얼굴을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이유가 뭔데요?”
 
아트는 내 태도가 갑자기 바뀌어서 그런지 혼자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유 같지 않는 이유 말하면 저 정말 화 낼 거예요.”
 
아트는 내 말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아니란 의미 같았다.
 
“시녀들이라는 작품 알아요?”
 
“벨라스케스 작품 시녀들이요?”
 
“맞다.. 미술 전공 하셨지....”
 
“그게 왜요...”
 
“형이 그 그림 정말 좋아하거든요. 벨라스케스 시녀들을 피카소랑 살바도르 달리가 재해석해서 그린 모작들이 있잖아요. 피카소는 시녀들만 50점 넘게 변주해서 그렸죠... 달리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시녀들 작품을 재해석해서 그린 그림들이 제법 있어요. 그 때문에 현수형이 달리를 좋아하게 된 거죠. ”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은 1656년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유명한 작품이었다. 그림의 표현방식이나 화가의 시점이나 구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 보는 이에 따라 해석이 다른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역사상 가장 강렬한 패러디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만한 것이어서 고야, 마네, 피카소, 달리를 비롯해서 많은 화가들이 모작으로 그린 대단한 그림이었다.
 
에프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작품에 심취했었다는 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시고 여기 온 거 아니었어요? 아까 내려오시는 거 보고 현수형이 좋아하던 달리를 미주씨도 보러오셨구나 생각했는데?”
 
“대사관에 볼일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업무상?”
 
이라고 말하려는데 그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내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자 아트가 오히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보니 삭발을 했던 흑인아가씨였다.
 
“제인이 전할게 있대요. ”
 
제인이라고 한 걸 보면 관장이 온 건 아닌 것 같았다.
 
“잠깐 위층에 올라갔다 와얄 것 같아요.”
 
영문을 모른 채 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따라 사무실로 올라가니 제인이 벌떡 일어나 내 손을 잡았다.
 
“이거.. 아무래도 반미주씨 한테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제인이 나를 향해 노트 한권을 내 밀었다.
 
“이게 뭐예요?”
 
내가 제인을 쳐다보자 제인은 자신의 시선을 노트 표지로 가져갔다. 표지의 가장 아래엔 JEAN이라고 쓰여 있었다.
 
▶ 제8요일의 남자 더 보기
#1. 화요일의 남자, 튜즈
#2. 7분의 1을 넘나드는 남자, 에프

#3. ‘당신의 어둠 속에 나도’
#4. “그날,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것”
#5. 엠, 월요일을 싫어하는 남자
#6. 어떤 고백
#7. 한 잎의 여자
#8. 당신은 어디 있나요?
#9. 그 여자 미주 -내 이름은 튜즈
#10. 이미 시작된 일
#11. 말할 수 없는 비밀
#12. 점점 깊은 곳으로
#13. 기억의 영속
#14. 카메라오브스쿠라
#15. 왜 하필 장현수야?
#16. JEAN이라는 남자.
#17. 미로 속 그물
#18. 이별은 언제나 아프다.
#19. 내가 몰랐던 것
#20. 당신은 누구세요?
#21. 에메랄드 목걸이
#22. 나의 고독
#23. 우연과 필연의 거리
#24. 파리의 하늘 밑

<목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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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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