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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관학교 교장 된 장바이리 “임기응변 능력 키워라”

1 장바이리 덕에 첸쉐썬(앞줄 왼쪽 첫번째)은 어릴때 부터 좋은 음악을 들으며 성장했다. 대학시절에는 밴드부 활동을 열심히했다. 1929년 가을 상하이 자오퉁(交通)대학 시절의 천쉐썬.


원래는 중국 군사과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은 첸쉐썬(錢學森·전학삼)의 얘기를 쓰려고 했다. 하다 보니 장바이리(蔣百理·장백리)를 빼놓을 수 없었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1901년 말, 북양대신(北洋大臣)과 직례총독(直隷總督)을 겸하던 리훙장(李鴻章·이홍장)이 세상을 떠났다.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뒤를 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손으로 훈련시킨 북양신군을 이끌고 바오딩(保定)에 터를 잡았다. 이듬해 5월, 조정에 군사학당 설립을 건의했다. 육군속성학당(바오딩 육군 군관학교 전신)이 문을 열었다. 혁명을 하겠다며 가출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도 속성학당의 문을 두드렸다.


학당에는 외국인 교관이 많았다. 에피소드 한편을 소개한다. 하루는 세균학을 전공한 일본인 교관이 진흙을 한줌 쥐고 사고를 쳤다. “이 안에 세균 4억 마리가 우글거린다. 중국 인구와 똑같다.” 학생 한 명이 교단으로 돌진했다. 교관 얼굴에 주먹을 한방 날리고 진흙을 나꿔챘다. 진흙을 8등분해 교관의 면상에 문질러댔다. “너희 나라 인구가 5000만 명이라고 들었다. 이 안에 5000만 마리의 세균이 있다.” 당황한 교관은 정신을 추스르자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냐? 혁명당원이냐?” 학생은 주저하지 않았다. “저장(浙江) 출신 장제스다. 내가 혁명당인지 아닌지는 알 것 없다.”


교관에게 항의한 학생은 무조건 퇴학이었다. 일본인 교관은 교장에게 학칙대로 할 것을 요구했다. 교장 자오리타이(趙理泰·조리태)는 장제스를 불렀다. 한차례 훈화를 마친 후 목소리를 낮췄다. “교관의 비유가 심했지만, 너도 잘한 건 없다. 교칙대로라면 너는 퇴교대상이다. 내가 방법을 일러주마. 일본 갈 준비를 해라. 일본어 반 학생이 아니면 일본 유학시험 응시가 불가능하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해보마.” 장제스는 자오리타이의 융통성 덕에 일본 유학을 떠났다.


 

2 장바이리 부부와 딸들. 오른쪽 첫번째가 훗날 천쉐썬의 부인이 된 장잉(蔣英). [사진 김명호 제공]


1912년 중화민국 총통에 즉위한 위안스카이는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를 육군총장에 임명했다. 돤치루이는 육군 속성학당을 베이징으로 이전했다. 육군대학으로 개명한 후, 속성학당 터에 바오딩 군관학교를 설립했다. 초대 교장에 자오리타이를 임명했다.


자오리타이는 전형적인 옛날 군인이었다. 고집이 어찌나 센지 타협을 할 줄 몰랐다. 대신 호감 가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었다. 지독한 아편 중독자였고, 여자도 유난히 밝혔다. 집무실, 빈 교실, 갈대밭 등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소문이 자자했지만 끄떡도 안했다. “여자가 남자 밝히는 것보다는 낫다. 여자로 태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다.” 위안스카이는 이런 자오리타이를 좋아했다. “세상에 흠 없는 사람은 없다. 아편 중독 외에는 나와 성격이 맞는다.”


남방의 혁명정부 학생군이 “군사학을 배우겠다”며 바오딩 군관학교로 몰려왔다. 자오리타이는 혁명군이라면 무조건 싫어했다. 입학을 거부했다. 교내에 혁명세력이 침투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학교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위안스카이나 돤치루이의 생각도 자오리타이와 별 차이가 없었다. 군관 학교에 자금 지원을 끊어버렸다. 교관들도 봉급 날 빈손으로 돌아갔다. 학생들은 모든 원인을 교장 자오리타이에게 돌렸다. 연일 교내에서 규탄 시위가 벌어지자 자오리타이는 “군관학교건 뭐건 폐교해 버리겠다”고 응수했다. 자오리타이는 빈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학생들은 베이징에 있는 육군부로 몰려갔다.


학생들의 불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위안스카이가 직접 나섰다. 자오리타이를 해임하고 후임 교장을 물색했다. 시종무관이 장바이리를 천거했다. “일본과 독일에서 명성을 떨쳤다. 학생들의 불만을 달랠 수 있는 적임자다.” 독일에서 포병교육을 받은 돤치루이도 겉으로는 장바이리를 거부하지 않았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며 큰소리쳤다.


군관학교 교장 취임을 앞둔 장바이리는 친구 첸쥔푸(錢均夫·전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학생들은 배움만 구할 목적으로 학교에 오지 않았다. 나는 학생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교장직을 수락했다. 학생들을 위한 일이라면 못할게 없다. 네 아들 쉐썬에게 좋은 음악 많이 들려줘라. 글을 익히면 이 편지를 보여줘라.”


취임식날 장바이리는 학생들에게 불량한 생활 습관을 고치라며 청결과 엄숙을 요구했다. “나는 너희들의 생활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 교재를 새로 만들고 교관들을 직접 교육시켰다. “군사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교육은 죽은 교육이다. 군인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직업이다. 임기응변이 중요하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임기응변 능력을 키우게 해라.”


매주 토요일, 장바이리는 학생들에게 특강을 했다. 동서고금, 명장들의 언행을 소개하며 학생들을 분발시켰다. 휴가중인 교관들의 강의도 대강(代講)했다. 강의 내용은 흡입력이 있었다. 학생들은 교관들이 휴가 가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1913년 6월 19일, 신문을 접한 국민들은 어리둥절했다. “어제 새벽, 바오딩 군관학교 교장 장바이리 장군이 학생들 앞에서 자살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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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