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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조작한 그리스 미신 정치


신화와 현실이 혼동되던 고대 그리스 시대, 최고 성역은 델포이였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우주의 양끝에서 각각 날려 보낸 독수리가 서로 만난 곳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곳에 동그란 돌을 세우고 옴팔로스, 즉 ‘대지의 배꼽’으로 불렀다. 아폴로가 괴물 여신 피톤을 여기서 제거했다는 신화에 따라 델포이엔 아폴로 신전이 들어섰다.


고대 그리스 시대를 통틀어 사적이나 공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앞둔 사람은 델포이에서 ‘델포이의 신탁’, 즉 아폴로를 모시는 무녀에게 신탁(神託)을 요청했다. 신탁이란 신이 사람을 매개로 자신의 뜻을 알리거나 인간의 물음에 답하는 것을 말한다. 델포이에선 인간이 질문을 외치면 피티아(Pythia)로 불린 무녀가 신의 답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신탁이 전해졌다. 무녀들은 불분명한 말을 시어(詩語) 형식으로 말해서 곁에서 부하 여사제들이 해석해주지 않으면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모호성이 오히려 권위를 더했을 것이다.


피티아는 황홀경 상태에서 인간의 질문에 대한 아폴로의 답변을 전했다. 피티아는 땅이 갈라진 곳에 앉아 신탁을 받았다는데, 지하에서 올라오는 메탄 가스를 마셨다 혹은 대마초를 태워 그 연기를 흡입했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정신과학적으로는 일종의 접신 상태에 이른 것으로 짐작된다. 요즘으로 치면 점쟁이나 무당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피티아는 부하 여사제 중에서 후계자를 뽑아 계속 승계됐다.


피티아는 그리스 전역에서 가장 영험한 예언가이자 최강의 권력을 쥔 여성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 같은 철학자, 헤로도토스·플루타르크· 투키디데스 같은 역사학자까지 수많은 고대 그리스 지식인이 델포이의 신탁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스인은 물론 외국인까지 이곳을 찾아 개인이나 국가의 대사와 관련한 신탁을 받아갔다. 전쟁이나 협상 같은 중요한 국사에서 델포이의 신탁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과학보다 신비주의를 앞세운 고대의 풍경이다. 고대 제국을 건설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물론 점령지 그리스를 찾아 꿈에 그리던 시인이자 가수로 대접받았던 로마 황제 네로까지 이곳에서 신탁을 받았다. 신비주의에 빠졌던 고대 사회의 미신 정치다.


영화 ‘300’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 1세는 그리스 연합이 페르시아와 치르는 전쟁에 도움을 요청하자 델포이에 신탁을 요청했다. 결과는 부정적이었지만 참전을 결정했다. 페르시아의 뇌물을 받은 피티아가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스파르타의 참전을 만류하는 ‘신탁 공작’을 펼쳤다는 주장도 있다.


신탁은 인간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었다. 레오니다스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지만 그리스는 페르시아를 물리쳤다. 신비주의에 기댄 무당 정치는 인간 의지를 이길 수 없었다.


지금은 폐허가 된 델포이 신전의 벽에는 당시 아폴로의 말이라는 147개의 경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델포이의 격언’으로 불리는 이 경구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너 자신을 알라’다. 소크라테스가 끊임없이 했던 바로 그 말이다.


그뿐 아니라 ‘신을 따르라’ ‘법을 준수하라’ ‘부모를 존경하라’ ‘정의에 무릎 끓어라’ ‘배운 것을 적용하라’ ‘들은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분노를 조절하라’ ‘명예를 존중하라’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 존재임을 생각하라’ ‘나라를 위해 죽어라’ ‘조상에게 영광을 돌려라’ ‘운을 믿지 말라’ 등등 지금 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지혜롭다. 고대 그리스의 무당 정치는 그나마 이런 합리성과 지혜를 가미했기 때문에 그나마 버텼던 게 아닐까.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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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