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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승처럼 빚은 메밀 따뜻하고 푸근

따뜻한 육소바. 구수하고 깊은 맛이 나는 장국물 맛이 좋다. 날씨가 차가워지면 더욱 맛있다.


경계인. 서로 다른 문화에 양 발을 걸치고 있어서 어느 곳에도 쉽게 속하지 못하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을 표현할 때 자주 쓰이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경계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꽤 많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혼혈인 들이다.


우리나라가 국제화되기 시작한 지도 이미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우리의 ‘국민’에 대한 인식은 전근대적이고 보수적인 것이 사실이다. 순혈주의가 너무 강하다. 이런 배타적인 나라에서 경계인들이 살아나가기란 참 쉽지 않을 것 같다.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한국어를 하면서, 한국에서 살아가지만 한국 사회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방인 같은 삶이란 어떤 것인지 사실 당사자가 아니면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왠지 나도 ‘가해자’였을 것만 같아서 마음 한편이 뜨끔하기도 하다.


경복궁 옆 서촌에서 ‘노부’라고 하는 작은 식당을 하고 있는 정인(31)씨는 경계인이다.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캐나다로 유학을 다녀 온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우리나라에서 살았다. 어릴 적은 물론이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정체성에 혼란을 겪던 참에,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에 건너가서 취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소바(そば)였다. 일본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국민 음식, 메밀국수다.


소바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만드는 과정이 힘들다. 정씨는 그 힘든 과정을 해내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고 한다. 혼자 묵묵히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마치 마음 수련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동안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느껴왔던 무기력 증이 치유되는 느낌이 좋았다. 일단 동경에서 유명한 소바 장인으로부터 소바 만드는 법을 일 차로 배운 다음, 소바 식당에서 수련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왔던 나라, 어머니의 나라로 돌아와서 아버지 나라의 국민 음식, 소바를 하는 작은 식당을 차리게 된 것이다. 2015년에 개업했다.

▶노부 서울시 종로구 누하동 219-3 전화 02-3210-4107 일요일과 월요일 점심은 쉰다. 자리가 모두 8~9석 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여서 식사 시간에는 줄을 서야할 수도 있다. 어머니와 둘이 함께 한다. 소바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만드는 가정식 카레도 일품이다. 육소바(온소바) 1만3000원 카레라이스 1만원.


정인씨의 하루 일과는 맷돌에 메밀을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 된다. 일본에서 가져온 전기 맷돌을 사용해서 두세 시간이 걸린다. 믹서로 갈면 금방 갈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열이 메밀의 향과 맛을 떨어지게 하기 때문에 오래 걸리더라도 맷돌로 천천히 갈아야만 한다. 그 다음에는 메밀쌀 가루에 밀가루를 섞는다. 흔히 ‘니하찌(にはち)’라고 부르는, 메밀가루 80%에 밀가루 20%의 비율이다. 일본에서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다.


섞은 가루를 채에 쳐서 부드럽게 만들고 물을 부어 반죽을 만든 다음, 소바 봉으로 얇게 펴는 과정을 진행한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소바 전용 칼을 이용해 잘라낸다. 1.8mm가 기준이어서 거기에 최대한 맞춰 자르기 위해 집중해야 한다. 하루 50인분 정도의 소바를 준비하는데 이 모든 과정을 마치기까지 4시간 정도가 걸린다. 이 과정을 매일 반복한다. 마치 수도승처럼.


이곳의 소바 중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따뜻한 장국물에 담겨서 나오는 ‘육소바’다. 약간 한국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원래 일본에서는 고기소바에 오리고기를 많이 쓰는데 일본 것처럼 작고 부드러운 오리 고기를 구하기 어려워서 돼지고기를 사용한다고 했다. 이 소바는 약간 짭짤하면서도 감칠맛 풍부한 국물의 깊은맛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스승에게 배운 정통 소바 쯔유(つゆ·맑은 장국) 만드는 방법 그대로 만드는 것이다. 정성껏 잘 쳐대서 만든 소바 가락은 뜨거운 국물 속에서도 힘없이 뚝뚝 잘라지지 않고 탄력을 유지한다.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마치 어렸을 때 어느 겨울 저녁 어머니께서 끓여주시던 메밀국수 같은 정감 어린 맛이 난다. 겨우 8~9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아주 작은 식당이어서 그 정감이 더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한 그릇 훌훌 들이키고 나면 마치 위로를 받은 것처럼 몸과 마음이 든든해지는 그런 힐링 같은 맛이었다.


경계는 두 문화가 만나는 곳이다. 그 접점에 서 있는 경계인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문화를 연결시켜 융합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정씨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문화와 음식은 이런 이종 교배를 통해 더욱 발전해 왔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경계인, ‘다문화’ 구성원들의 역할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더 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배려를 해야 한다. 어쨌건 우리 ‘가족’ 아닌가. 단일민족의 환상은 이제 벗어날 때도 됐다. ●


 


 


주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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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