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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악한 삶에서도 사랑은 피어난다

저자: 라오 핑루 역자: 남혜선 출판사: 윌북 쪽수: 320쪽 가격: 1만4800원


한반도에 사는 사람은 얕은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13억 중국인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 중국은 때로 악어가죽처럼 거칠어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장미처럼 향기로워 마음을 사로잡을 때도 있다. 악어 가죽이 중화인민공화국의 무력과 경제력이라면, 장미는 중국인들의 문화다. 문화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몽글 몽글 피어나는 꽃구름이다. 현실이 아무리 차가워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은 이 꽃구름을 통해 인간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


‘라오 할아버지’로 불리는 지은이의 삶과 행적이 바로 이런 경우다. 1922년 태어난 94세의 이 할아버지는 중국의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왔다. 항일전쟁, 공산정권 수립, 문화대혁명 같은 역사적 사건을 겪었다. 역사는 숱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더 중요한 것은 험악한 역사를 겪었음에도 허다한 사람처럼 감정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핵심은 부인에 대한 사랑이었다.


46년 집안끼리의 약속으로 만난 부인 메이탕과 2008년 사별할 때까지 그는 60년 이상 부부의 연을 이어갔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지은이는 어린 시절부터 연애·결혼·이별에 이르는 전 생애를 수채화와 글로 남기며 부인과의 추억을 반추했다. 머릿속 기억과 가슴 속 그리움은 18권의 화첩으로 세상에 나왔다. 애절한 사연이 알려지면서 2013년 중국에서 다시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됐고 2015년 영미와 유럽 국가에서 출간이 결정됐다.


책의 날줄은 사랑이지만 씨줄은 중국 현대에 대한 미시사다. 1930년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중국인의 생생한 생활상이 수채화로 등장한다. 거리 풍경부터 가족생활, 사회생활, 음식, 풍속이 사진을 보는 듯하다. 지은이의 고향인 장시성 난창의 새해 맞이 죽순·두부피 음식인 샤오차오(小炒)와 구쯔(骨子)부터 별미인 두부튀김과 기름빵까지 다양한 중국 토속 음식을 눈요기하는 재미도 쏠솔하다.


종전 직후인 46년 중국에서 젊은 남녀가 어떻게 데이트를 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지은이와 메이탕은 결혼 전 구운 전통과자를 파는 가게에서 간식을 먹고 쇼핑도 즐겼다. 호수 공원도 산책하며 노천찻집에서 차를 마셨다. 노인들도 젊은 시절은 지금 청년과 차이가 없었다. 국공내전 기간에 특별 휴가를 내서 고향인 난창의 쟝시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담황색 군복을 입은 신랑이 순백의 서양식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찍은 결혼 사진은 부평초 같은 삶 속에서 사라졌지만, 신랑의 또렷한 기억은 이를 그림으로 복원했다. 당시 결혼식 정경과 혼례 풍습, 결혼 증서가 지은이의 기억력과 그림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중국이 공산화되자 지은이는 부인과 함께 화로 앞에 앉아 국민당 군장을 한 사진을 모두 불태우는 장면도 등장한다. 씁쓸한 생존의 지혜다. 그 뒤 국수가게도 내고 고추장사도 하는 등 생활전선에 나섰다가 공산당으로부터 노동개조를 명령받고 부인과 22년간 생이별을 하지만, 그 긴 세월도 부부의 사랑을 식히진 못했다. 풀려난 남편은 노인이 된 뒤 “젊었을 때 하지 않고 뭘 했느냐”는 부인의 지청구를 들으며 그림을 공부했다. 그 공력이 이 책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아내의 마지막도 생생하게 전한다. 나이 들어 병석에 누워 신장투석을 하던 아내는 혼미해진 정신 속에서 “검은색 바탕에 붉은 꽃무늬가 들어간 치파오(중국 전통의상)를 달라”고 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역시 나이와 무관했다. 아내는 2008년 딸에게 “네 아버지 잘 돌 봐 드려야 해”라는 말을 남기고 눈물 한 방울 남간 채 정신을 잃었고, 꽃봉오리가 지듯 세상을 떠났다.


책은 지은이의 이종사촌 형으로 대만의 장군이자 화가였던 양다허의 시를 인용하며 막을 내린다. 그 마지막 귀절은 이렇다. “빈손으로 세상에 온 내게는/오직 내 가장 사랑하는 꽃 구름뿐.”


부부는 서로에게 송이송이 아름답던 꽃 구름이었다. 사라져가는 모든 것은 아름답지만 이를 기록한 것은 더욱 멋드러진다.


 


 


글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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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