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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만 쓴다고 저출산 해결될까


1916년 10월 25일 미국 뉴욕시 브루클린의 브런스빌 한 거리에서 소란이 일었다. 경찰이 미국 최초의 피임 의료원(birth control clinic)에서 설립자 마가렛 생어와 동료들을 끌어내고 있었다. 죄목은 외설죄 위반이었다. 이 일로 피임 의료원은 문 연지 아흐레 만에 닫게 되었고 생어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생어의 어머니는 50세에 결핵과 자궁경부암으로 사망했는데, 22년동안 18번 임신하여 7번 유산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간호사가 된 생어는 뉴욕의 이민자 공동체 안에서 일하면서 가난한 근로 여성들이 너무 잦은 임신과 유산, 스스로 행한 낙태로 건강을 해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당시 미국은 1873년 제정된 연방법으로 피임 정보나 도구를 포함하여 ‘임신을 방해하고 낙태를 일으키는 모든 것’의 확산을 금지하고 있었다. 외설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원하지 않은 임신은 무지의 결과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또한 부유한 여성들이 주치의를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것과 대비되는 현실이었다. 생어는 여성이 임신을 조절하여 자기 몸에 대해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대적인 사회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북서 유럽은 미국보다 피임에 대해 관대했다. 영국은 맬더스가 18세기 말 출판한 『인구론』 영향을 받았다. 맬더스는 농업생산성이 증가하면 인구가 증가하는데 인류는 기아나 질병으로 제동이 걸릴 지경까지 수를 늘리는 경향이 있다고 경고했다. 그 결과 맬더스주의 연맹까지 만들어졌고, 연맹에서는 가족계획의 중요성과 피임법을 대중에 전파하는 데 주력했다. 생어가 피임 의료원 사건 전에 피임법을 담은 책자를 유포한 죄로 1914년 기소됐을 때 보석을 받고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그 때 맬더스주의 연맹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네덜란드의 피임 의료원에도 방문하여 새로운 피임법을 접하고 의료원의 운영을 착안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1882년 세계 최초로 피임 의료원이 설립된 나라였다.


생어는 1917년 1월 열린 첫 재판에서 패하고 항소한다. 결국 1918년에 열린 재판에서 의사가 피임법을 처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결과가 나온다. 생어의 기소와 재판 과정은 미국 전역에 걸쳐 피임 정보 확산 운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지지자들의 기부금으로 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생어는 1952년 국제가족계획연맹 창설에도 주축이 되었다. 이렇게 미국을 포함하여 선진국을 중심으로 피임법이 확산되면서 사회·경제 전반에 걸쳐 지각변동이 발생한다. 피임이 가능하다는 것은 출산이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전쟁 직후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가족계획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1961년 4월 가족계획협회가 민간기구로 출범하게 된다. 협회는 약 3개월 후 바로 국제가족계획연맹의 정회원이 되었고, 그 영향으로 막 시작된 군사정권으로부터 합법적 기관으로 인정받았다. 그 뿐만 아니라 곧 정부의 인구 정책을 실행하는 조직으로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협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피임 지식을 전파하고 피임 시술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피임에 관해 서양에서 여성의 자유, 임신 및 출산의 가치, 성적 본능의 인정 등 주로 정치적·종교적 논쟁이 중심이었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인구 증가 억제에 초점이 있었다.


협회 활동은 정부의 적극적 협조 하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예컨대, 먹는 피임약이 미국 식약청 승인을 받은 때가 1960년, 유럽 최초로 발매된 때가 1961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1968년 벌써 보급되기 시작한다. 일본에서 먹는 피임약 판매가 허용된 것이 1999년인 것과 비교하면 당시 별다른 논의나 장애 없이 인구 증가 억제 수단들이 수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피임법이 급속하게 도입, 확산되면서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급격히 떨어졌다. 한 여성이 평생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수를 나타내는 합계 출산율이 1970년 4.53명에서 1983년 2.06명으로 인구 대체 수준 2.1명 밑으로 떨어지고, 2001년에는 1.29명으로 초저출산율 1.3명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피임법이 확산될 때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은 이전의 출산율이 각 가정이 원하는 수준보다 높았음을 의미한다. 아이 수를 선택할 수 있게 되면서 원하는 수준으로 조정되는 과정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피임법이 충분히 확산된 후에도 출산율이 지속적으로 감소한다면 이는 각 가정이 원하는 아이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선택은 이에 따른 편익이 비용보다 클 때 일어난다. 따라서 아이를 더 적게 낳겠다는 선택은 출산에 따른 편익이 줄거나, 비용이 늘거나, 둘 다인 경우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출산율 감소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선 출산에 따른 비용은 늘었다. 여성의 경제 활동이 늘면서 출산으로 감수해야 하는 금전적 손해와 경력상 손실이 증가했다. 아이를 키우는 데에도 교육 경쟁으로 피가 마르고 사교육비 지출로 허리가 휠 정도다. 그 동안 정부의 저출산 대책은 비용을 줄이는 데 초점이 있어왔지만, 획기적으로 줄이지는 못했다. 더구나 이러한 정책은 근본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출산의 편익이 감소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녀의 전통적 편익은 부모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부양을 책임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남은 것은 일말의 의무감과 키우면서 잠깐씩 느낄 즐거움, 덧없는 인생에 무언가 흔적을 남긴다는 존재감 정도다.


이런 불확실하고 추상적인 편익에 기대 출산을 결정하기에는 젊은이들의 앞길이 너무 팍팍하다. 정부로서야 뭐라도 하고 싶겠지만 돈을 쏟아 붓기만 해서는 그 부담이 젊은이들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올 것이다. 효과가 있을 만한 정책은 과감하게 추진하되 백화점식 나열은 곤란하다. 근본적으로는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는 것이 ‘해볼만한 일’이라고 젊은이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가정의 가치가 존중되는 문화를 만들고, 그 가정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을 우리 모두 고민해야 할 때다.


 


민세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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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