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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강유정의 까칠한 시선] 어느 여성 영화평론가의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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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의 저자 록산 게이는 스스로 ‘나쁜 페미니스트’라 칭한다. 여기서 ‘나쁜’이란 ‘완벽하지 않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완벽하지 않은 페미니스트일까. 가령 그는 ‘비치(Bitch·여성을 가리키는 속된 말)’가 쉼표처럼 자주 등장하는 로빈 시크의 노래 ‘블러드 라인(Blurred Lines)’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고, 핑크색도 좋아한다. 심지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 몇몇 남성들이 친절하게 대해 주니, 일부러 그렇게 보이도록 연출할 때도 있다. 아마 진짜 페미니스트 눈에는 영악한 사기꾼처럼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록산 게이는 “내가 나쁜 페미니스트인 것이 좋으며 옳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사실 ‘나쁜’이라는 표현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요즘 사회가 지나치게 마초적’이라는 점이다. 즉, 자신이 적당히 관대한 태도를 지녔음에도 ‘이 세상은 어딘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이야기다. 록산 게이의 말에 따르면 나 역시 나쁜 페미니스트에 가깝다. 특히 여성 영화평론가로서 말이다.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중에는 유독 남성 위주 세계를 다룬 작품이 많았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의 ‘1000만 영화’를 되돌아봐도 그렇다. 그중에서도 ‘베테랑’(2015, 류승완 감독) ‘내부자들’(2015, 우민호 감독)은 “남성 캐릭터로 가득 찼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내부자들’의 주은혜(이엘)나 ‘베테랑’의 미스 봉(장윤주)처럼 눈에 띄는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극 중에서 보조적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물론 ‘암살’(2015, 최동훈 감독) ‘부산행’(7월 20일 개봉, 연상호 감독)과 같이 여성 캐릭터가 중심인 영화도 존재한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 보면 그것은 ‘이야기 전개상 없어서는 안 될 역할’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환상적인 맛을 내기 위해 지켜야 할 재료 배합 비율처럼, 영화에도 전체적인 흐름을 고려해 여성 캐릭터가 필요한 순간이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산행’에서 여성은 보호해야 할 수동적 대상이다. 심지어 좀비들조차 남성일 때 더욱 강력해 보인다. 극 중에서 여성은 최초 유포자(기차에 탑승한 감염자)이며 최초 감염자(KTX 승무원)로서 존재감을 얻는다. 그럼에도 나 역시 ‘아버지가 딸을 구하고, 남편이 아내를 보호하는 게 맞다’고 여겼다. 그러한 설정이 우리에게 훨씬 더 익숙하니까. 물론 ‘매드맥스:분노의 도로’(2015, 조지 밀러 감독)에서는 여전사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가 위험에 처한 다른 여성들을 거침없이 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영화에서 그런 작품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여성 영화’는커녕 개성적인 ‘여성 배역’조차 찾아보기 힘든 현재의 영화판이라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닐까.


‘아수라’(9월 28일 개봉, 김성수 감독)를 살펴보자. 이 영화야말로 ‘물고 뜯는 남자들의 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물론 그 세계는 지옥이며, ‘아수라’ 속 여성 캐릭터는 지옥의 일부에 불과하다. 극 중 한도경(정우성)의 아내 정윤희(오연아)는 병실에 누워만 있다. 그럼에도 남성 주인공을 둘러싼 상황은 그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 간다. 이 영화에 묘사된 여성은 과거 ‘민폐 캐릭터’로 유명했던 TV 드라마 ‘추노’(2010, KBS2) 속 언년(이다해)과 다르지 않다. ‘세상의 절반은 여자’라면서, 왜 그들의 이야기는 보기 드문 것일까. 또 우리가 ‘남성적’이라 부르는 영화들 대부분은 어째서 범죄와 연관된 피 칠갑 풍경뿐인 것일까. 여기서 더 나아가,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에서 여성을 그리는 방식도 되짚어 보아야 한다. ‘해어화’(4월 13일 개봉, 박흥식 감독) ‘덕혜옹주’(8월 3일 개봉, 허진호 감독) 등을 그 사례로 꼽을 만하다. 이 영화들에서 여성 캐릭터는 어떻게 구축됐을까. 여전히 ‘해어화(解語花·말을 아는 꽃)’처럼 그려지고 있지는 않을까. ‘해어화’처럼 두 여성이 등장할 경우, 둘은 여지없이 경쟁 관계이며 그 사이에는 한 남성이 있다. 이처럼 감정으로 얽힌 문제는 끝내 총체적 파국을 불러오게 된다. 개인적 연정으로 인해 결국 큰일을 그르치는 것이다. ‘덕혜옹주’가 여성 주인공을 다루는 방식도 아쉽다. 역사적 인물을 재조명한 것에는 의미를 둘 만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 들여다본 덕혜옹주(손예진)의 인생도 그리 주체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상황에 휘둘리는 대상에 가깝다. 진짜 여성의 삶이 거의 드러나지 않은 셈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드센 여성이 되어 목소리 높여 권리를 주장하자’는 뜻이 아니다. 다만 ‘여성 영화’는커녕 개성적인 ‘여성 배역’조차 찾아보기 힘든 현재의 영화판이라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는 그저 현재 기획 중인 한국영화 가운데 4분의 1이라도 여성의 자리가 있길 바라는, 나쁜 페미니스트의 반성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 강남대학교 교수, 허구 없는 삶은 가난하다고 믿는 서사 신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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