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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균형자’ 푸미폰 국왕 사후 태국은 어디로] 왕위 승계 과정에서 정국 혼란 불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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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3일 서거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시신이 14일 방콕 왕실 사원에 안치됐다. 이날 왕궁 앞엔 국왕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수만 명이 모였다. 젊은 시절 푸미폰 국왕의 사진을 들어보이는 방콕 시민.

태국 정치의 구심점이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1927~2016년)이 10월 13일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46년 6월 9일 국왕에 올랐으니 재위 기간만 70년 126일에 이른다. 생전에 ‘살아있는 최장수 군주’ 기록을 세웠다. 국왕의 서거는 태국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푸미폰 국왕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국왕 서거 소식이 알려지자 수많은 태국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통곡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것과 마찬가지로 오열하며 진심으로 애도했다. 태국 국민의 군주에 대한 존경심은 유별나다. 공무원이 일하는 공적 시설이나 지폐에 초상화를 새긴 것은 군주제 국가에선 통상 볼 수 있는 장면이긴 하다. 하지만 크고 작은 호텔이나 식당, 가게 등에도 푸미폰 국왕과 왕비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살아있는 최장수 군주 기록
국민이 보여주는 뜨거운 국왕 사랑은 단지 군주라는 이유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푸미폰 국왕은 실천의 국왕이었다. 국왕은 항상 국민 곁에 다가가는 군주였다. 가난한 농촌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국민과 가까이 했다. 저소득층 복지와 농촌개발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국왕은 건강이 허락하는 동안에는 거의 매년 한 해 200일 넘게 ‘현장’을 다녔다. 왕궁이 있는 수도 방콕 주변의 멋진 장소, 성대한 행사에만 참석한 게 아니다.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고산지대를 비롯한 오지까지 다니며 국민이 어떻게 사는지를 직접 체험하며 고충을 청취했다. 직접 자동차를 몰고 농촌과 산촌을 누비거나 도보 행군도 마다하지 않았다. 헬리콥터로 지방을 시찰할 경우에도 손에서 지도를 내려놓지 않은 채 꼼꼼히 지형을 살피곤 했다. 부친의 지방 시찰에 자주 동행한 둘째 딸 마하 차크리 시린돈 공주가 한 인터뷰에서 밝힌 후일담은 푸미폰 국왕의 성품을 짐작하게 한다. 푸미폰 국왕은 시린돈 공주가 헬리콥터를 함께 타고 가다 졸기라도 하면 “국민의 혈세로 기름을 넣은 헬리콥터를 타는 것은 특전이기 때문에 국민을 위해 힘을 쏟아야 하는 데 엔진 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자면 되겠느냐”고 야단을 쳤다는 것이다.

농촌의 가난에 가슴 아파했던 국왕은 1950년대부터 태국판 새마을 운동이라 할 수 있는 ‘로열 프로젝트(국왕 개발 계획)’를 제창해 30여개 농촌 지역에서 성공시켰다. 로열 프로젝트는 자급자족형 농업개발계획이다. 책상머리로 국가개발계획을 짜지 않았다. 직접 지도와 카메라·필기구 등을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철저한 현장 경험을 쌓아 이를 개발계획으로 활용하는 실사구시의 자세를 보였다. 푸미폰 국왕은 가뭄이 들어도 벼농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관개시설을 완비하도록 하는 한편 상습 가뭄지역에 대해서는 인공강우로 가뭄을 해소토록 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북부 치앙마이 등의 고산지대에서 화전을 일궈 연명해온 소수민족들에게는 고냉지 채소와 포도와 딸기 등 황금작물 재배로 안정적인 생계를 도모토록 하는 한편 이를 통해 환경도 보전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뒀다.

국왕은 그 자신이 세계적인 인공강우 전문가다. 1970년대 초부터 자체 개발한 인공강우 기술로 가뭄 해소에 직접 나섰다. 푸미폰 국왕은 태국 전역에 가뭄이 계속되면 별궁이 있는 휴양지 후허힌에 ‘인공 강우 지휘센터’를 설치해 ‘구름씨 뿌리기’ 작전을 직접 진두지휘해왔다. 국왕의 인공강우기술은 유럽 특허사무소(EPO)로부터 특허권을 인정받았다. 기술의 독보적 가치를 인정받은 셈이다. EPO가 발급한 특허는 이후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스위스, 영국, 독일을 비롯한 30개국에서 공인됐다. 푸미폰 국왕은 또 크고 작은 부정부패 스캔들에 어떤 형태로든 연루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최고의 도덕성을 갖춘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다. 푸미폰 국왕을 알현한 외국 정부 고위인사는 푸미폰 국왕이 낡고 오래된 양복을 입고 있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세계적인 인공강우 전문가로 가뭄 해소에 직접 나서
태국 헌법에는 ‘국왕은 불교도로서 종교의 수호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불교국가 태국에선 불교가 제시하는 진리인 담마(法)를 통치의 핵심 수단으로 여겼다. 군주는 이 담마를 따르고 실천하며 구현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한다고 믿어왔다. 이를 따르는 군주를 탐마라차(法王)라고 부른다. 불법과 통치를 하나로 구현한 불교국가의 이상적인 통치자다. 푸미폰 국왕은 일평생 탐마라차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런 헌신의 결과 푸미폰 국왕을 생불(生佛), 즉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여기는 국민이 상당수다.

태국은 1932년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다. 헌법에 따라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다만 헌법 제7조에 ‘어려운 국면에 처했을 때 국가 상징으로서 국왕이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애매모호한 조항이 있다. 이는 태국에서 군주가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되어 왔다. 푸미폰 국왕은 공식적인 정치 관여는 자제하지만 헌법 제7조를 활용한 실질적인 정치적 위력은 막강하다. 국왕은 태국 역사상 중요한 시기마다 정치에 관여했다. 크게 세 차례 현실정치에 개입해 정권을 교체했다.

첫째는 1973년이다. 당시 군부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 시위자를 향해 군부가 발포하면서 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인심이 흉흉했다. 푸미폰 국왕은 타놈 군부정권에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다”며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군부정권은 국왕을 위협했지만 국왕은 “민주주의와 국민을 위해서”라며 버텼다. 결국 타놈 정권은 무너졌다. 서슬 퍼런 군부도 국왕의 권위를 이길 수 없었다.

둘째는 1992년이다. 쿠데타 세력에 대항한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었다. 당시 국왕은 시위대 대표였던 잠롱 당시 방콕시장과 쿠데타 세력의 지도자였던 수친다 장군을 집무실로 불렀다. 국왕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이들에게 “민주주의와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해야 한다”라고 질책했다. 국왕의 한마디에 수친다는 스웨덴으로 망명을 떠났고, 태국은 민주주의를 지켰다. 당시 이 두 사람이 국왕을 알현하기 위해 왕궁 응접실에 들어가는 장면이 방송을 통해 공개됐는데, 이들은 국왕으로부터 거의 100m나 떨어진 곳부터 무릎을 꿇고 바닥을 기면서 접근해갔다. 국왕을 알현할 때의 태국 전통 예절이라고 한다. 이 장면은 세계에 방송돼 태국에서 국왕이 갖는 높은 위상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셋째가 2006년 9월 4일이다. 이번에는 쿠데타 지도자가 아니라 선거로 뽑힌 총리였다. 이날 오후 방콕의 왕국에서 푸미폰 국왕을 알현하고 나온 탁신 친나왓 총리의 얼굴은 어두웠다. 탁신은 이날 밤 “차기 정부에서 총리직을 맡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시위로 나라가 시끄러웠지만 바로 전날까지 물러나길 거부하던 탁신이 푸미폰 국왕의 요구 앞에 마음을 돌렸다. 태국 역대 총리 가운데 가장 강력한 지도력을 가졌다는 탁신도 국왕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힘을 잃은 탁신은 9월 19일 유엔총회에 참석하던 중 발생한 군부쿠데타로 망명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2006년 당시 국왕은 두 달여 동안 계속된 탁신 총리 사퇴 요구 시위에도 선뜻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총선 결과 절반가량의 국민이 현 정권에 등을 돌린 것으로 나타나자 그 대변인 역할을 자처했다. 결국 국민의 평화시위에 국왕이 마음을 움직여 탁신 총리의 사퇴를 이끌어낸 것이다. 군부도 국왕이 탁신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을 확인하고 군대를 움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총칼로 쿠데타를 일으킨 서슬 퍼런 장군은 물론 국민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부여한 탁신 총리까지 단 몇 분 간의 설득으로 물러나게 하는 국왕의 권위와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국왕이 몸소 보여준 행동을 통해 그 힘의 원천을 짐작할 수 있다. 사례를 하나 보자. 2005년 3월 태국 동북부 전역은 수개월째 계속된 가뭄으로 땅이 말라갔다. 곡물 값이 치솟으면서 수많은 사람이 끼니를 걸렀다. 민심이 갈수록 흉흉해갔다. 푸미폰 국왕은 가뭄에 고통 받는 국민을 걱정하며 1주일 간 식음을 전폐했다. 결국 가뭄 대책 책임자를 자처한 후 내각에 인공강우를 시도하도록 지시하고 방콕의 왕궁을 떠나 가뭄 피해 현장을 찾았다. 이재민들과 함께 지내며 고난을 함께한 국왕은 단비가 내린 후에야 왕궁으로 귀환했다.

푸미폰 국왕은 태국 화합과 의지의 리더십을 발휘해 국민 갈등을 봉합하고 국민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상징적인 역할만 한 게 아니라 실질적인 영향력도 발휘했다. 대표적인 것이 2007년 12월 5일 80회 생일을 앞두고 보여준 모습이다. 푸미폰 국왕은 생일 하루 전인 4일 저녁 총리와 내각 각료 전원, 그리고 사회 각계 지도층 인사들을 왕궁으로 불렀다. 태국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이들 앞에서 국왕은 이렇게 대국민 연설을 하면서 화합을 강조했다. “나의 두 다리는 병이 들어 똑같이 걷지 못합니다. 그러니 몸이 제대로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지요.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화합하고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면 똑바로 나아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군과 민간이 지금처럼 반목하며 화합하지 못하면 반드시 국가 위기가 닥칩니다.”

이 연설은 2006년 9월 군부의 쿠데타로 탁신 총리가 물러나고 군부와 정치권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민정 이양이 자꾸 미뤄지고 있는 현실을 치유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담았다. 더구나 그해 12월 23일로 예정된 총선을 앞두고 온갖 유언비어와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에 국왕으로서 경종을 울린 것이다. 국왕의 준엄한 연설을 들은 수라윳출라논 당시 과도정부 총리는 그 자리에서 “국민화합을 이루기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군인들도 고개를 조아렸다. 국왕 생일 전야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왕국 밖에 모였던 시민들도 전국에 생중계된 연설을 듣고 ‘화합’을 외쳤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지만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실질적인 태국 최고 통치자 역할을 한 푸미폰의 리더십은 80회 생일을 맞아 더욱 빛났다. 국왕의 생일인 5일 방콕 시내 왕궁 주변은 국왕을 상징하는 노란 색으로 넘쳐났다. 전국에서 찾아온 10만 명 이상의 국민이 노란 셔츠를 입고 노란 손수건을 흔들며 국왕의 장수를 기원했다. 이날의 연설과 국민의 반응은 태국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다. 국왕이 세상을 떠난 지금 태국 국민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하나로 기억하는 장면이다.
 
스캔들 없었지만 즉위 기간 중 벌어진 쿠데타 대부분 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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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왼쪽)과 왕세자 마하 와찌랄롱꼰.

국왕은 일평생 단 한번의 부정이나 스캔들도 없었다. 그만큼 자신을 경계해왔다. 푸미폰 국왕의 전기를 쓴 미국 언론인 폴 핸드리는 “국왕의 삶은 부처님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최고의 절제와 도덕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푸미폰 국왕은 재위 기간 동안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면서 국민의 모범이 돼 온 것으로 평가받아왔다.

어두운 면도 없지는 않다. 태국은 1912년부터 2014년까지 모두 21차례의 성공하거나 실패한 쿠데타가 반복돼왔다. 그가운데 15차례가 푸미폰 국왕 재위 중 벌어졌다. 국왕은 임기 중 벌어진 쿠데타의 대부분을 사실상 추인해왔다. 국왕이 군부와 기득권층을 등에 업고 영향력과 권위를 유지하면서 민주주의를 왜곡했다는 비판도 있다. 빈곤층의 지지를 받았던 탁신 전 총리를 몰아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탁신 치나왓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거세지는 등 정치 혼란이 심화하자 탁신의 사임 발표를 유도해 극적으로 사태 해결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군부와 부유층, 중산층과 지식인이 싫어하는 탁신을 끌어냈다는 외신의 관측도 있다. 푸미폰 국왕은 이미 2003년 12월 5일 자신의 76회 생일 때 만난 탁신 총리에게 “자만하지 말고 비판의 소리를 경청하라”고 따끔하게 야단쳤다.

태국에서 국왕에 대한 비판은 법으로 금지돼있다. 형법 제 112조에 왕실모독 처벌에 관한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유죄가 확정되면 최고 15년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탁신 전 총리의 측근인 작라폽 펜카이르 전 총리실장관은 외신기자클럽에서 한 발언이 왕실모독죄에 해당한다며 기소됐다. 외국인도 예외가 없다. 입헌군주제에 대한 토론회 사회를 본 영국 BBC방송 기자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 이 법에 따르면 모욕 내용을 공표하는 것도 금지돼 있어 그 내용조차 알 수 없다. 태국 곳곳에 수없이 게시된 국왕 사진을 훼손하거나 심지어 손가락으로 가리켜도 혼이 날 수 있다. 유죄 판결을 받고 반성문을 제출해 국왕의 사면을 받아 추방된 외국인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 푸미폰 국왕은 생전에 국왕에 대한 비판이 헌법상 금지돼 있어 잘잘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총리보다 더 힘든 위치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왕은 “나에게 (잘못을) 이야기 해 줄 사람은 어머니뿐인데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신다”라고 말하며 슬퍼하기도 했다.

이런 국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태국은 ‘권력의 균형자’를 잃었다는 관측이 나온다. 국왕 후임으로 외아들 마하 와찌랄롱꼰 왕세자가 계승하게 되는데 부왕만큼의 권위를 얻을 수 있을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세 차례의 이혼에다 문란한 사생활로 국민의 신망이 두텁지 못하다. 탁신 전 총리의 자금 지원을 받아 도박에 빠졌다는 위키리크스의 자료도 있다.

이와 달리 여동생인 마하 짜끄리 시린톤 공주는 구호활동 등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아왔다. 1년 간 섭정을 맡은 프렘틴술라논다 전 총리가 왕세자보다 시린톤 공주를 더 신뢰한다는 관측도 있다. 이에 따라 왕위 승계 과정에서 정국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왕세자를 뛰어넘어 그의 어린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길 원하는 세력도 있다. 이처럼 결점투성이인 왕세자가 국왕이 되면 태국이 진정한 입헌군주제가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인품이 뛰어난 푸미폰은 국정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지만 도덕적으로 흠집이 있는 왕세자는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시린톤 공주에 대한 국민의 신뢰 두터워
왕세자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1년의 애도기간이 끝나고 즉위를 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군 장성 출신의 프렘 섭정이 군부와 손잡고 어떤 정국을 구상할지에 관심이 몰린다. 군부가 세력을 확대하고 후계자 교체 등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탁신 진영에 우호적인 것으로 알려진 왕세자가 즉위하면 정치 관여와 무관하게 탁신 진영이 세력을 집결해 정국에 격변이 가져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태국은 가난한 나라다. 인구 6800만 명에 명목금액 기준 국내 총생산(GDP)이 2016년 국제통화기금(IMF) 예상치로 3905억 달러로 세계 28위다. 1인당 GDP는 5742달러로 87위다. 동남아시아에선 인도네시아(3362달러)·필리핀(2962달러)·베트남(2088)보다는 높지만 말레이시아(9501)보다는 한참 낮다. 태국의 입헌군주제와 민주주의, 경제발전이 모두 시험대에 올랐다.

푸미폰 국왕은 1927년 12월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서 마히돌 아둔야뎃 왕자(왕이 되지는 못했다)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하버드 대학에서 보건학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부모를 따라 귀국한 그는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6세가 되던 해 스위스로 떠나 초·중·고교를 마쳤다. 하지만 숙부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형 아난타 마히돌이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되자 1946년 6월 귀국해 국왕에 올랐다. 하지만 대관식을 하지 않고 다시 스위스로 떠나 로잔 대학에서 과학과 법학·정치학을 전공한 후 졸업했다. 대학을 마친 후 귀국해 비로소 대관식을 치렀다. 작곡가이며 작가이기도 하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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