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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24. 파리의 하늘 밑

“현수 형 얘기... 듣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
 
아트는 기내 식사 중에 와인을 좀 과하게 마시더니 식사가 끝나갈 무렵 문득 생각난 듯 에프이야기를 꺼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는 내게 와인을 건넸다.
나는 대답 없이 와인을 받아 마셨다.
 
“그 날... 현수형... 전이랑 똑 같았어요. 가끔 조깅하러 나가다 만났던 모습 그대로 였다구요.”
 
몇 잔 마신 와인으로 그의 얼굴은 벌써 붉어져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같은 모습이었다면... 그날도 분명 내가 아는 그런 모습이었겠지... 에프가 조깅할 때 입는 셔츠는 주로 밝은 레드계열이었다. 아주 붉은 것도 좋아했지만 코랄이나 오렌지 계통도 즐겨 입었다.
붉은 색 옷은 혈기가 느껴져. 그래서 운동을 할 땐 훨씬 힘이 나게 되거든. 언젠가 오피스텔에서 밤을 새고 새벽 운동을 나가던 에프가 했던 말이었다.
 
내 아련해진 눈빛을 금세 알아챘는지 아트는 비스듬히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나를 보고 형이 잠시 멈춰 서더니 그날 점심을 같이 먹자고 하더라구요.... 그랬는데...”
 
“그 말을 듣고도 경찰이 자살이라고 했건 거예요?”
 
에프에 대한 말에 아무 반응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생각보다 먼저 말이 앞서 나왔다. 아트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기사 보고 알게 된 걸요.”
 
아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면서 어떻게 그러고 있어요? 사고 당일 만났으면 스스로 경찰서에 찾아가야 했던 거 아니에요? 목을 넘어오는 말을 참느라 나는 몇 번 입술을 깨물어야했다.
에프에 대해선 이미 재수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트는 잔을 들어 남은 술을 훌쩍 넘겼다.
 
“현수형 부인... 몇 번 뵌 적 있지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에요.”
 
아트가 내 표정을 살폈다. 아트의 눈빛은 마치 자신이 한연수와 나의 불편함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말과는 달리 그녀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말이 될 것이었다.
 
아트는 의심을 풀지 않는 내 눈을 향해 입에 한가득 미소를 진 채 사람 좋은 웃음을 웃었다. 그 웃음은 적어도 자신이 나의 적은 아니라는 의미 같았다.
 
참고 참았지만 아트가 에프이야기를 꺼내자 가슴 속에 거센 바람이 일었다. 다독이고 다독여도 이렇게 어딘가 한 곳이 뚫려버리면 한 동안 그곳으로 거친 바람이 마구 쓸려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곧장 뛰면 안 돼, 10분 정도 빠르게 걸어주다 뛰기 시작하는 거지. 한강변을 조깅하는 에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어떤 소리에 눈을 떴다. 곧 파리에 도착 할 거라는 스튜어디스의 안내방송이었다.
창밖은 아직 바다였다. 저 바다만 건너면 바로 파리였다.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아트가 무슨 말인가를 했지만 다시 나오는 안내방송에 소리가 섞여버렸다. 내가 아무 것도 못 알아들은 표정을 짓자 그가 나를 빤히 보면서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세요. 제가 달려갈게요.”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트까지 거기에 엮이게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비행기는 안전하게 파리 공항에 닿았다. 마음이 복잡한데다 열 두 시간의 긴 비행에 몸이 피곤했지만 파리에 도착하자 깜깜한 어둠에 불이 켜진 듯 몸과 마음이 가뿐해졌다. 다행이었다.

드골공항은 여전했다. 대학 3학년, 6개월 연수를 위해 파리로 날아 왔던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긴 시간의 공백 이후 만나게 된 파리의 하늘은 싸늘했지만 가슴은 설레었다. 파리의 날씨는 서울에 비해 많이 춥고 분위기는 스산했다.
 
“에펠탑 근처 호텔이라구요? 역시 예술가는 다르네요. 샹젤리제 거리에서 영감을 얻어올 생각이군요.”
 
비행기에서 내려 내 캐리어를 끌어주며 그가 말했다. 여기서의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몰라 샹젤리제 거리에 대한 생각은 염두에도 둔 적이 없었다. 다만 혼자 머물러야하는 부담 때문에 번화가에 숙소를 정한 것이었다.
에펠탑 근처까지 에어프랑스 리무진을 탈 거라 했더니 아트는 리무진 대신 택시를 타는 게 좋겠다고 했다.
 
“강 위쪽은 50유로, 강 아래쪽까진 55유로입니다. 공항택시에 정해진 금액입니다.”
 
더블처럼 투 블럭 모히칸 머리를 한 20대 후반의 흑인 청년이 어눌한 발음이지만 영어로 말해 주었다. 에펠탑은 드골공항에서 세느강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으니 55유로였다. 55유로를 주겠다고 하자 흑인 청년은 함박웃음을 웃었다. 피부색과 대비된 환하게 드러난 하얀 치아 때문인지 그가 매우 유쾌한 청년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트는 자신의 자그만 캐리어를 옆에 세워놓곤 내가 탄 택시의 뒤꽁무니를 향해 한참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백미러에 비친 그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자 문득 그가 어디서 얼마간 머무는 지 물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대사관 일을 보러 왔다는 사실 외에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내겐 그의 연락처조차 없었다.
 
파리엔 이미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내게 파리는 두 번째였지만 지난번과는 인터벌이 길어 초행이나 다름없었다.
대학시절 연수하러 와서 머문 기간이 6개월. 한 학기라는 시간이 짧지 않았지만 학교에서 정해주는 스튜디오에 한국 친구들과 함께 머무느라 혼자 외부로 나다니거나 외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다.
활발한 친구들은 몇몇 따로 떨어져 나가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주말이면 짧은 여행도 다녔지만 그때의 나는 공부에 욕심이 있어 다른 친구들에 비해 학교 스튜디오에 머무는 일이 많았다. 내게 중요한 건 좋은 학점을 따는 일이었다.
 
“언니, 잘됐네. 안토니 만나고 와, 안토니.”
 
내가 일이 있어 파리 출장을 간다고 했더니 미영이 잊었던 이름을 기억에서 꺼내 주었다. 안토니는 당시에 함께 공부했던 영국학생이었다. 안토니는... 파리에서 돌아오고도 한참 메일과 편지를 주고받았던... 친했던 친구였다....
 
전형적인 영국신사 같았던 그는 예의 바르고 단정한 모범생이었다. 그런 그가 세계적인 의상 디자이너가 꿈이라고 해서 나는 처음 깜짝 놀랐었다. 보여 지는 모습은 법학도나 의학도처럼 느껴졌었다.
 
안토니는 정서적으로 나와 비슷한 면이 많았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거기에 파묻혀 있길 좋아했고 한 가지에 꽂히면 밤 새 토론하길 좋아했다.
 
주제가 뭐였는지 기억에도 없는, 그 어떤 저녁의 기억이 있다. 그날도 역시 우리는 저녁식사 이후 토론이 벌어졌다. 안토니의 스튜디오에서 시작된 것이었는데 밤이 깊도록 나와 안토니,누구도 느슨해질 기미가 없었다.
 
솔직히 토론을 할 만한 영어실력을 갖추지 못했던 나는 단순한 영어실력으로 앞에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한국말을 하나도 알지 못하는 안토니는 그런 나와의 소통이 답답했을 텐데 오히려 내게 한국말을 배우려고 노력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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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이 길어지고 밤이 깊어지자 안토니 입장이었던 몇몇과 내 입장이었던 친구 몇은 하나씩 둘씩 각자의 방으로 돌아 가버리고 말았다. 토론에 정신이 빠져 한참 떠들다 보니 어쩌다 안토니와 나, 둘이 남게 되었다. 뭔가 서먹한 기분에 둘 다 말을 멈추었을 때 안토니는 무슨 이유인지 내게 아주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아 엠 쏘리...라고 말했다.
 
연수를 마칠 즈음 안토니와 둘이 몽마르뜨를 간 적이 있었다. 물론 한국 친구들과 여러 번 간 곳이라 새로울 게 없었지만 우리는 그날 거기서 화려한 메리고라운드를 탔다.
 
안토니는 메리고라운드를 좋아해서 영국 곳곳에 있는 메리고라운드를 거의 다 타보았다고 했다. 자기는 특히 테임즈 강변의 메리고라운드를 좋아한다고 언젠가 나를 초대하겠다고 했다. 나 역시 놀이기구 중 유일하게 탈 줄 아는 게 메리고라운드였다. 아마 나는 그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메리고라운드를 태워주고는 늘 사진을 찍어주던 아버지이야기를 듣고 안토니도 자기의 아버지 이야기를 했었다. 멋진 분이지만 자신에게 더 이상 사랑을 주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연수기간이 끝났지만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만 하면 자기네 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를 준다는 말에 나는 최고가 되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한국에서 함께 간 우리 중 누구도 그 기회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안토니는 예외였다. 학교에 남아주길 원한 순번 1위의 학생이었다. 몽마르뜨 언덕의 메리고라운드에서 안토니가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 위에서 나는 그 말이 자기만 남고 나는 떠나게 된 것에 대한... 나도 열심히 했지만 자기만 그것을 쟁취한 것에 대한 미안함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와 함께 사랑을 나눌 수 없어서 미안했다는 말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그의 편지를 받고서 나는 비로소 그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동성애자였다.
 
내가 영어에 능숙했더라면 또한 나도 함께 파리에 남을 수 있었다면 나는 안토니에게 사랑이란 섹스를 나누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해주었을 것이었다. 왜냐면 나도 안토니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성으로 그를 좋아했지만 그의 성적취향 때문에 내가 그를 더 이상 좋아해서는 안된다는 논리에는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와 혹은 그녀와 섹스를 나누겠다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만일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에프나 튜즈...그리고 엠과 적당한 사이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에프에게 나는 온전한 한 여자가 되고 싶어 발버둥 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랑한다는 것을 정신과 육체로 나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정신에서 비롯된 것을 육체를 담보하면서 완성이 된다고 하는 건 동의할 수 없다.
 
파리는 거리엔 떨어진지 오래된 잿빛 나뭇잎이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잿빛 거리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붉은 빛은 건물의 유리창으로 점점 스며들더니 한 순간 그 붉은 빛으로 도시를 감싸 안았다. 마치 파리의 온 건물들이 꽃잎을 일으키며 붉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내 살던 곳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혼자서 맞는 낯선 도시에서의 첫 석양이었다.
 
 
내가 예약한 호텔방은 생각보다 작았다. 거리로 난 창이 하나, 골목으로 난 창이 하나... 두 개의 창문과 샤워 실 하나, 화장대겸 책상, 더블침대, 옷장, 냉장고가 딸린 미니 바... 그리고 전신 거울이 두 개... 작은 규모긴 하지만 있을 건 다 갖추어 놓은 방이었다.
 
이동식 선반에 캐리어를 펼쳐놓고 우선 옷장을 정리했다.
호텔은 일단 3일 예약을 했지만 상황에 따라 며칠 더 머물 수 있도록 가변성 있게 예약을 했으므로 혹 일이 더뎌진다 해도 다른 곳으로 옮겨야할 일은 없었다.
물론 예상대로 내일 달리미술관을 들러 무사히 일을 볼 수 있다면 예정한 3일로 충분할 것이었다.
 
짐 정리를 마친 후 샤워를 하고 나오니 저녁 먹을 시간이 많이 늦어있었다. 호텔로 들어오던 길목에 카페가 즐비했던 기억이 나 적당한 옷을 찾아 입고 거리로 나섰다.
 
에펠탑 근처라 그런지 타워의 화려한 불빛이 거리거리에 쏟아지고 있었다. 오렌지 빛을 뿜는 가로등의 나트륨등은 도시를 몽환적으로 빛나게 만들고 있었다.
 
이상했다. 아름다운 카페를 감상하며 거리를 걷는데 마치 누군가와 함께 걷는 기분이 들었다.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카페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와인을 마시며 맥주를 마시며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삶에 흠뻑 취해 누구도 이방인인 나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카페마다 인도까지 테이블을 내 놓고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인 걸 보니 울컥 그리운 어떤 곳이 떠올랐다. 에프와 가끔 들르던 서울의 광장시장 맞은 편 어떤 거리...
 
거기엔 길거리에 몰려나온 의자들로 붐비는 맥주 골목이 있었다. 플라스틱 의자에 플라스틱 테이블, 그리고 그에 걸맞지 않게 우아한 파라솔.. 바람이 불면 함께 흔들리던 그 파라솔 아래 앉아 에프와 맥주를 마셨던 기억.
 
파리 거리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그들처럼 열정에 어린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이 있었다. 파리의 그들처럼 거기서도 모두 자유로웠다. 누가 누군지 구분하지 않았고 누가 누구와 어울리는 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곳 파리의 이들처럼 그 곳 분위기에 취해, 자신의 기분에 취해, 주변의 사람들을 눈여겨 살필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나는 어떤 카페에도 걸음을 멈추고 들어가지 못했다. 에프의 기억이 떠오르자 혼자서 들어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혼자 그곳을 즐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
 
화덕에서 구운 치아바타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는 카페 앞에서 테이크아웃으로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베이컨과 치즈 한 장에 치아바타를 입힌 샌드위치하나가 하얀 종이에 돌돌 말린 채 겉포장 없이 내 손으로 건너왔다. 가져 갈 거라고 분명하게 말했지만 자기네 습성으로 아마도 길을 걸으며 먹을 것으로 판단 한 것 같았다.
 
손에 들고 먹기 좋을 모양으로 감싸진 샌드위치와 커피 한 잔을 들고 낯선 거리를 걸었다.
이 곳 시간 저녁 아홉 시. 내 살던 한국은 일곱 시간을 먼저 달리고 있으니 아주 새파란 새벽일 것이었다.
 
▶ 제8요일의 남자 더 보기
#1. 화요일의 남자, 튜즈
#2. 7분의 1을 넘나드는 남자, 에프

#3. ‘당신의 어둠 속에 나도’
#4. “그날,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것”
#5. 엠, 월요일을 싫어하는 남자
#6. 어떤 고백
#7. 한 잎의 여자
#8. 당신은 어디 있나요?
#9. 그 여자 미주 -내 이름은 튜즈
#10. 이미 시작된 일
#11. 말할 수 없는 비밀
#12. 점점 깊은 곳으로
#13. 기억의 영속
#14. 카메라오브스쿠라
#15. 왜 하필 장현수야?
#16. JEAN이라는 남자.
#17. 미로 속 그물
#18. 이별은 언제나 아프다.
#19. 내가 몰랐던 것
#20. 당신은 누구세요?
#21. 에메랄드 목걸이
#22. 나의 고독
#23. 우연과 필연의 거리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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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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