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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23. 우연과 필연의 거리

화요일 아침 공항은 조금 한산한 느낌이었다. 원래 예정은 어제 출국이었지만 중요회의에다 당장 작업을 마무리 해줘야 할 일이 있었다.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왕복 비행시간과 시차를 생각한다면 일정의 공백이 뻔한 일이라 급한 일을 먼저 마무리 해주길 바라는 회사 쪽 요구가 무리는 아니었다.
 
“미리 말했으면 내 출장이랑 맞췄을 건데...”
 
저녁 약속을 지킬 수 없음을 알리는 연락에 당장 공항으로 달려온 튜즈는 아쉬운 듯 계속 투덜거렸다.
 
“미주야. 휴가 좀 길게 잡아서 오래 머물면 어때? 다음 주 초에 나도 파리로 날아갈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튜즈에게 연락한 건 오랜만에 잡은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말을 전달을 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누군가와 동행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바쁜 일을 제쳐놓고 달려와 준 건 고맙기도 했지만 내겐 성가셨다.
 
“KONG 레스토랑에서 디너 꼭 먹어 봐. 세느강이랑 퐁네프다리가 한 눈에 보이는 야경이 기가 막히는 곳이야. 퐁네프역 바로 옆이니까 찾기도 쉬워. 갈빗살 스테이크 유명한 레스토랑도 찾아가서 그것도 꼭 먹어 보고...”
 
“중요한 일만 보고 금방 돌아올 거야.”
 
생각을 좀 정리하고 싶었지만 튜즈는 내가 하는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쉬지 않고 쏟아내었다.
 
“거긴 바람이 쎄서 머플러는 필수야. 그리고 우산은 항상 핸드백에 챙겨 다니고... 밤엔 위험하니까 어두워지기 전에 택시타고 호텔 들어 가... 인터넷에 우버 택시라는 어플이 있어. 그거 꼭 다운 받아서 써. 파리엔 택시가 흔하지 않아. 저녁엔 정말 위험하니까 조심하고... 요즘 파리가 예전 같지가 않거든.”
 
“미안해. 내가 지금 머리가 복잡해...”
 
“그러니까, 미주야.. 복잡할수록... ”
 
내 눈에서 진짜 복잡함이 흘러나오기라도 했는지 내 눈에 시선을 두고 있던 튜즈는 입을 꽉 다물어 버렸다. 눈을 보지 않아도 어수선한 내 행동이 다 읽혀졌을 것인데... 튜즈는 그래서 어쩌면 더 많이 당부하고 싶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녀와서 연락할게.”
 
“나는 미주처럼 세련되지가 않아. 말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게이트 앞에 줄을 서자 튜즈가 다가와 손을 한 번 꼭 잡았다 놓았다. 백 마디의 말을 능가하는 위안이었다.
 
이륙 후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창밖을 내다볼 여유가 생겼다. 비행기 날개와 나란한 자리긴 했지만 창가자리라 나쁘진 않았다.
핸드폰엔 잘 다녀오라는 쥬디의 문자가 남겨져 있었다. 핸드폰이 비행모드인 걸 알고는 대강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회사엔 휴가 좀 쓰는 걸로 하고 파리부터 다녀 와... ”
 
지난 주 목요일 저녁 식사를 마친 자리에서 쥬디는 파리 행 항공 티켓을 내밀었었다. 쥬디가 하는 판단은 늘 정확했지만 그리고 나보다 훨씬 생각이 깊었지만 나는 그걸 받지 않았다.
 
“가게 되면 내가 알아서 티켓팅 할게.”
 
저녁 내내 즐거운 기분으로 식사를 한 쥬디는 내가 선뜻 손을 내밀지 않자 금세 표정이 굳어졌다.

쥬디는 자신의 기분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는 스타일이다. 있는 그대로를 표정에 드러내는 사람은 두 종류로 볼 수 있다. 자기가 갑이기 때문에 감정표현을 절제할 필요가 없는 사람, 또 하나는 스스로 조절 할 수가 없어 감정을 다 꺼내 보이는 사람. 물론 쥬디는 전자였다.
 
쥬디가 감정을 얼굴에 그대로 담은 채 내게 보인다는 건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라는 협박인 셈이었다. 감정이 퍼득이는 그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다 내가 물었다
 
“두 사람 관계.. 어땠었어?”
 
손에 들고 있던 티켓을 테이블에 내려놓다가 쥬디는 누구? 하는 표정으로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장현수 의원과 선배...”
 
절제 없이 감정을 꺼내 놓던 쥬디의 얼굴에 갑자기 살짝 웃음이 스쳤다. 네가 그걸 물어 볼 줄 알고 있었지, 하는 가벼운 야유 섞인 웃음이었다.
 
“네 생각은 어떤데?”
 
쥬디는 복잡하게 담겨있던 감정들을 얼굴에서 비워내고는 말간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나 역시 표정 없이 쥬디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묻는 건 쥬디 다운 어법이 아니었다. 왜 쥬디 답지 않게 에둘러 말하는지 그 이유까지 궁금해 졌다.
 
“아주 좋거나, 혹은 아주 나쁘거나 둘 중 하나.... 절대 그저 그런 사이는 아니었겠지.”
 
나는 쥬디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했다. 쥬디가 내게 어떤 식으로 말하든 나는 그 대화만은 솔직하고 싶었다. 에프에 대한 내 감정과 쥬디에 대한 내 감정이 똑 같진 않다 해도 두 사람은 내게 다 소중했고 두 사람 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왜 그렇게 생각 하냐고 묻지는 마. 말장난은 싫어.”
 
내 말에 어떻게 답할지 망설이며 빤히 내 눈을 주시하고 있는 쥬디에게 나는 바로 덧붙여 말했다. 살짝 미소가 돌던 쥬디의 얼굴에서 웃음이 멈추었다.
 
“파리부터 빨리 다녀 와...”
 
그는 또 대화를 비껴가고 있었다.
 
“내 말에 대한 답이 아닌데?”
 
“답이다 뭐다 할 것도 없지만... ”
 
쥬디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를 켜는데 쥬디의 금테 안경을 빛이 훑고 지났다. 가끔 그의 안경에 빛이 스칠 때가 있었지만 그날 처음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일 때마다 빛이 그 위를 훑고 지난다는 걸 알았다.
길게 연기를 내 뿜고는 쥬디가 말했다.
 
“그 얘긴... 다녀와서 하지...”
 
내가 아는 쥬디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걸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그것도 갑의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한데 상대의 감정이나 생각을 배려해 우회해서 말을 한다든지 하는 걸 즐기지 않는 부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에프에 관해선 선명하고 명쾌한 답을 피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어쨌든 티켓은 받을 수 없어.”
 
내가 테이블위의 그것을 쥬디 앞으로 밀쳐놓았다.
 
“괜찮아, 받아도 돼. 이 티켓 까지는 내가 사적으로 너한테 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왜? 선배가 왜?”
 
“이 일이 시작되는 시점에 우리가 같이 있었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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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이 시작되는 시점에 함께 있었던 건 맞는 말이지만 파리에서 가져올 에프의 물건을 쥬디와 공유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신분이나 상황을 고려하면 그건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쥬디는 마치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말했다.
 
“네가 파리에서 뭘 가지고 오든 내가 알아야할 이유는 없어. 내가 장현수와 어떤 사이든 간에.”
 
그 말이야 말로 쥬디 다운 말이었다.
 
“그런데 미주야...”
 
좀 전의 목소리에 묻어있던 날카로움을 풀고 쥬디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장현수와 개인 적으로 어떤 관계든 네가 개입된 이상 나로선 기분이 흔쾌하진 않아.”
 
무슨 말인지 알지? 그의 눈빛이 물었다.
 
“짐작했어. 미안해.”
 
빠르게 내가 답했다. 몰랐을 리 없었다. 미안했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기도 한 부분이었다.
 
“지난번에 이미 끝난 이야긴데 다시 하는 건 네가 장현수와 내 관계에 개의치 말았음 좋겠단 이야기야. 내가 너를 돕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 개인 적인 관계의 문제고 대상이 장현수라고 해도 다를 건 없어. 만일 내게 감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면 아마도 처음 알았을 때 멈췄을 거야. 네가 나를 잘 알잖아.”
 
“ .... ”
 
“내 생각엔 가급적 빨리 준비하고 떠났으면 좋겠어. 폴더폰을 찾으려는 무리들이 그 곳에 접근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그걸 가져야하니까.”
 
“우리...?”
 
“우리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면 미주 너... 됐지? ”
 
“내가 파리에서 뭘 받아서 오든 선배는 상관이 없다고 했잖아. ”
 
쥬디는 두 손을 펴서 양쪽으로 팔을 벌렸다.
 
“상관없어.”
 
에프와 쥬디 사이를 짐작할 순 없지만 그 말이 있는 그대로 믿기진 않았다.
 
그 탭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쥬디는 무언가를 짐작하고 있을 수도 있단생각이 든다.
 
목걸이 문제와 오피스텔의 나체 사진문제, 그리고 오비서관이 캐리어에 물건을 싣고 간 일은 한연수가 꾸민 일이라지만 왜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그녀에게 전달된 건지 그리고 오비서관이 어떤 남자와 함께 공항을 빠져나간 건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른다. 폴더폰과 국회 사무실 도청문제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좌석을 뭔가로 두드리는 느낌에 잠에서 깨었다. 뒷좌석의 꼬마였다. 겨우 두 살이 될까 말까한 꼬마는 엄마아빠가 잠이 들자 심심했던 모양인지 발로 내 의자 등받이를 툭툭 차며 놀고 있었다.
이륙한 지 두 시간이 겨우 지나고 있었다. 남은 열 시간을 참을 자신이 없었다.
 
“불편하시면 뒤 쪽의 빈 좌석으로 변경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스튜어디스의 안내를 받아 뒤쪽으로 갔더니 좌석이 드문드문 비어있었다.
 
창가에 빈자리가 있어 거기로 일단 자리를 변경했다. 핸드백을 챙겨 기내 선반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는데 누군가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어? 여기서 다시 뵙네요.”
 
낯익은 한 사람이 내게 인사를 했다. 아는 사람이긴 한데 누군지 갑자기 떠오르질 않았다.
 
“아트... 기억 안 나세요? 김천수씨랑 그날 의사당 식당에서....”
 
바로, 그였다...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를 건네긴 했지만 그를 여기서 만나다니... 갑자기 머릿속으로 뿌연 안개가 몰려들었다.
 
“파리 한국 대사관에 일이 좀 있어서 출장 가는 길입니다. 원래 제 몫의 일이 아닌데 그렇게 됐어요. 미주씨는? 여행가시는 건가요?”
 
아트는 내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뇨, 일이 좀 있어요...”
 
“아, 일 때문에 가시는군요.”
 
그는 작은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그리곤 그 안에 들어있던 체크무늬 남방을 꺼내 베이지색 폴라 티셔츠 위에 껴입었다.
네이비와 버건디가 선명하게 교차돼 있는 체크무늬 남방은 베이지 폴라셔츠와 베이지 면바지에 썩 잘 어울렸다.
 
“곧 추워져요. 위에 카디건이라도 하나 더 입으세요. 좀 있으면 비행기가 영하 70도를 넘나드는 상공을 날게 돼요. 무릎은 이걸로 덮으시면 돼요.”
 
탑승할 때부터 한 좌석 당 하나씩 준비 돼 있던 블랑킷을 들어보였다. 그는 이런 장거리 비행이 익숙해 보였다.
 
“저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내게 준 초콜릿과 똑 같은 걸 꺼내 한 입 베어 물며 그가 말했다.
지난번 그의 이름이 뭔지 알고 싶단 생각을 한 적은 있지만 지금 당장 궁금한 건 없었다.
내 답이 없자 그가 다시 물었다.
 
“진짜 없어요?”
 
비닐에 싸여있던 블랑킷을 꺼내 펼치며 그가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고개를 흔들자 그는 블랑킷을 넓게 펴서 내 무릎에 올려주고는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현수형 사고 나던 날 제가 만났다고 했더니 몹시 궁금해 하셨던 기억이 나서...”
 
그날 의사당 식당에서 김천수와 식사 중에 그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리고 몹시 궁금했던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걸 지금 내게 다시 묻는 이 사람의 정체는 뭘까... 갑자기 머릿속에 한 뭉치의 안개가 더 빨려 들어왔다.
 
‘사람마다 만족하는 지점이 다르지 않을까?’
 
아직 멈출 생각이 없다는 듯 당당하던 한연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장현수의원이랑 친하시니 그 부인과도 가까운 사이셨겠군요...”
 
희정과 오비서관, 한연수의 얼굴이 하나씩 내 머리 속을 지나갔다. 아트는 지난 목요일 쥬디가 그랬던 것처럼 얼굴에서 표정을 다 지워버린 말간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 제8요일의 남자 더 보기
#1. 화요일의 남자, 튜즈
#2. 7분의 1을 넘나드는 남자, 에프

#3. ‘당신의 어둠 속에 나도’
#4. “그날,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것”
#5. 엠, 월요일을 싫어하는 남자
#6. 어떤 고백
#7. 한 잎의 여자
#8. 당신은 어디 있나요?
#9. 그 여자 미주 -내 이름은 튜즈
#10. 이미 시작된 일
#11. 말할 수 없는 비밀
#12. 점점 깊은 곳으로
#13. 기억의 영속
#14. 카메라오브스쿠라
#15. 왜 하필 장현수야?
#16. JEAN이라는 남자.
#17. 미로 속 그물
#18. 이별은 언제나 아프다.
#19. 내가 몰랐던 것
#20. 당신은 누구세요?
#21. 에메랄드 목걸이
#22. 나의 고독

<목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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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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