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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 요약(67)

고려문신이자 유학자인 김부식 선생의 표준 영정. 작은 사진은 삼국사기. [중앙포토]


 


1123년(인종1) 송나라 사신 서긍은 김부식(金富軾: 1075~1151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남겼다.


“김부식은 풍만한 얼굴과 커다란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나왔다.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해 글을 잘 짓고 예와 지금의 일을 잘 알아, 학사들에게 존경을 받기로는 그보다 앞설 사람이 없다.”(『고려도경』 권8 인물조)


서긍의 눈에 비친 49세의 김부식은 고금(古今)을 꿰뚫는 박람강기(博覽强記: 박식하고 총명함)의 기백을 지닌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러나 묘청(妙淸)의 난이 진압된 지 4년이 지난 1139년(인종17) 김부식의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 ???



?김부식은 부국강병책을 시도한 송나라 왕안석의 신법보다는 기존 질서를 고수하려 한 사마광의 구법(舊法)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는 4년 전 묘청의 난을 진압한 총사령관이었다. 왕안석에 빗대어 금나라 정벌과 서경 천도와 같은 변법(變法: 신법)이 나라를 위기에 빠뜨릴 위험이 있음을 인종에게 알리려는 것이 그의 진심일 것이다.


인종 즉위 초에 최고의 학자인 김부식은 약 20년이 지난 이제 국왕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권력자로 변모했다. 1126년(인종4) 이자겸은 제거되었지만 ‘개경 정치’에 대한 불신은 더 깊어갔다. 그 부담은 인종이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궁궐이 불타고 왕권이 실추된 것은 그 다음의 문제였다.?


인종은 새로운 정치를 모색한다. 정치의 중심 무대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기려 했고, 그에 화답한 세력이 개경 정치에 불만을 가진 서경의 묘청, 백수한(白壽翰), 정지상(鄭知常) 등이다. 그들은 1128년(인종6) 8월 인종이 서경을 방문했을 때 서경에 새 궁궐을 짓고 새 정치를 할 것을 주문한다. 새 궁궐지는 대화세(大華勢), 즉 나무에서 꽃이 피는 대화세(大花勢)로서 풍수지리상 명당이고 길지라는 것이다. 1129년(인종7) 1월 서경에 신궁(新宮)인 대화궁(大華宮)이 완성된다. 다음 달 인종은 서경에 간다. 1131년(인종9) 8월 대화궁의 외성(外城)인 임원궁성(林原宮城)이 완성된다. 이자겸이 제거된 게 1126년(인종4)이니 불과 3∼4년 만에 서경이 정치의 새로운 중심지로 급부상한 것이다. 국왕 인종이 묘청 세력을 끌어안아 이러한 상황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서경 천도가 거의 확정될 무렵 개경 귀족세력이 크게 반발한다. 이자겸과 함께 사대정책을 주도한 김부식과 이자겸 대신 외척이 된 정안(定安: 지금의 전남 장흥) 임씨의 임원애(任元?) 등이 앞장서 반대한다. 묘청을 처벌하자는 임원애의 주장은 개경 문벌귀족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김부식의 제동으로 인종의 서경 행차가 없는 일이 되었다. 서경 천도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안 묘청 일파는 1135년(인종13) 1월 서경에서 마침내 반란을 일으킨다. 난이 일어난 지 두 달 뒤인 이해 3월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토벌할 사령관에 임명된다. 진압 작전에 나선 그는 약 1년 만인 이듬해 2월 난을 진압한다. 국왕은 그에게 ‘충성을 다해 난을 바로잡아 왕조를 안정시켰다’는 공신 칭호(*輸忠定難靖國功臣)를 준다. 이로써 그는 정계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한다.


다섯 임금을 섬겼던 김부식은 곧바로 권력을 휘두른다. 김부식은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정적을 내칠 정도로 냉엄한 권력자로 변모했다. 1142년(인종20) 김부식은 현직에서 사퇴한 후 왕명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시작해 1145년(인종23) 완성한다. 학자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잘 모르고, 내용이 소략하기 때문에 『삼국사기』를 편찬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는 서경 천도운동의 역사의식인 고구려 중심 사관을 수정해 신라 중심의 사관을 확립하려 했다. 또한 묘청의 난 이후 정국 혼란을 수습하고, 유교 정치이념을 확립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이다.?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작용을 낳는다. 권력의 정상에 우뚝 선 그의 발 밑으로 ‘무신정변’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격랑이 밀려오는 조짐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


- 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제346호 2013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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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