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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지휘력 탁월” 힌덴부르크 칭찬 받은 장바이리

1 장바이리는 독일과 인연이 많았다. 1936년 부인과 딸들을 데리고 미국에 있는 첸쉐썬을 만나러 가던 도중, 베를린에서 갓 태어난 호랑이 4마리를 안고 흔적을 남겼다. 오른쪽 첫번째가 셋째 딸 장잉(蔣英). 10년 후 첸쉐썬과 결혼했다.


한동안 장바이리(蔣百里·장백리)는 국민당 육군 상장, 중국 최초의 인공위성 설계자 첸쉐썬(錢學森·전학삼)의 장인, 무협소설의 대가 진융(金庸·김용)의 외삼촌 등으로 통했다.


장바이리는 타고난 군사가였다. 한 유명 언론인의 평가를 소개한다. “장바이리는 중국 역사에 남을 병학가(兵學家)였다. 전쟁을 지휘한 적은 없지만, 문하에서 수많은 장군들을 배출했다. 제자들은, 한결같이 모범적인 장군이었다. 군사학에 관한 저작은 많지 않았다. 대신 한마디 한마디가 경전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충분했다.”


타고난 문인이기도 했다. “병법의 대가 손자(孫子)이래, 중국의 저명한 군인들은 문인 기질이 넘쳤다. 장바이리는 어릴 때부터 고전을 끼고 살았다. 커가며 외국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서법, 문학, 미술, 외교에 관한 식견이 당대의 고수였다. 군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장바이리는 일본 육군 사관학교 생도시절, 군국 민주주의(軍國民主主義)를 제창한 적이 있었다. “전 국민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자. 상무정신으로 가득한 신식 군대를 만들어 제국주의자의 침략에 대항하기를 희망한다.”


동기생 차이어(蔡鍔·채악)는 장바이리의 주장에 동조했다. 스승 량치차오(梁啓超·양계초)가 일본에 오자 장바이리를 소개했다. 장바이리도 량치차오를 스승으로 모셨다. 온갖 예의를 다했다. 정치적 견해는 달랐다. 량치차오가 “중국이 부진한 것은 국민의 공공도덕과 지혜의 결핍 때문”이라고 하자 대놓고 비판했다. 차이어가 말려도 “사사로운 정은 사적인 일”이라며 발끈했다. “중국은 망했다. 그 죄는 지도자의 무지와 무능이 빚어낸 어설픈 독단과, 그것을 알면서도 못 본체 한 정부 탓이다. 국민은 이들을 질책 못한 죄밖에 없다. 누구의 죄가 더 큰지 생각해 봐라.”


장바이리가 사관학교를 졸업할 무렵, 러시아에 승리한 일본 군부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중국 유학생이 수석으로 졸업하자 난감했다. 4기부터 중국생도 반을 따로 만들었다. 장바이리는 3기였다.


귀국한 장바이리에게 동북의 지배자 ‘성경(盛京·지금의 선양)장군’이 손을 내밀었다. 신군(新軍) 훈련을 맡기며 청 황실에 동의를 구했다. “찾아보기 힘든 인재 입니다. 크게 쓸 만 합니다.” 1906년 봄, 장바이리 25세 때였다.


동북은 신군과 구군(舊軍)의 충돌이 그칠 날이 없었다. 장바이리도 속수무책이었다. 보다 못한 성경장군이 장바이리를 불러 뭉칫돈을 쥐어줬다. “독일에 가라. 군사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며 실컷 놀아라.”


4년에 걸친 장바이리의 독일 생활은 다채로웠다. 독일어로 된 서구의 역사와 문학, 예술 관련 저작물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느끼는 바가 많았다. 친구 첸쥔푸(錢均夫·전균부)에게 “국가의 부흥에 문예(文藝)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너나 나나, 자식이 태어나면 문학과 예술 교육에 힘써야 한다”는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춤도 열심히 배웠다. 베를린에서 열린 무도대회에서 멋진 율동을 선보였다. 왈츠 부분 1등상을 받았다.


독일군 연합훈련에도 참가했다. 훗날 독일 대통령이 된, 힌덴부르크 원수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조직과 지휘력이 탁월하다. 예전에 나폴레옹은 장차 동방에 위대한 장군 재목이 출현할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네 어깨가 무겁다.” 독일 생활을 마친 장바이리는 다시 동북신군 훈련에 전념했다. 일본과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국방기지 건설에 밤잠을 설쳤다.


 

2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의 첸쉐썬. 1921년 겨울 베이징. [사진 김명호 제공]


1911년 10월, 혁명이 발발했다. 장바이리는 동북 독립을 책동했다. 성경장군은 안절부절, 구군을 이끌고 입성한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이 신군을 감시해도 관망만 했다. 장바이리는 동북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고향으로 향하던 중 첸쥔푸가 득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위가 태어났다”며 즐거워했다.


베이징의 교육부에 근무하던 루쉰(魯迅·노신)이 항저우의 중학 교장 첸쥔푸를 상급자에게 추천했다. 아버지 따라 베이징에 온 첸쉐썬은 여자 사범대학 부속 소학교에 입학했다.


첸쉐썬은 무슨 과목이건 1등만 했다. 교사 한 명이 “이 애는 공부의 신”이라며 ‘학신(學神)’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별명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꼬리표처럼 붙어 다녔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첸쉐썬은 무슨 학과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했다. 첸쥔푸는 뒤로 빠졌다. “내게는 제일 마지막에 와라. 모두의 의견부터 들어봐라.” 수학 선생은 수학과를 권했다. “너는 수학의 천재다.” 국어 교사는 중문과를 가라고 했다. “네 문장을 읽고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장차 작가가 되라.” 예술을 택하라는 교사도 있었다. “너는 예술에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 회화나 음악을 전공해라. 화가나 작곡가가 네 체질에 맞다.” 모친도 의견을 내놨다. “아버지처럼 교육학을 해라. 난세에는 학교 선생이 제일이다.”


첸쉐썬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끝으로 아버지의 의견을 물었다. 첸쥔푸는 엉뚱한 충고를 했다. “장바이리 장군을 찾아가라. 너를 가장 아끼는 사람이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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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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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