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사람 속으로] 세계 고아 1억5000만 명…잘 키우는 것보다 안 만드는 게 우선

세계 고아의 날 추진 ‘공생재단’ 윤기 명예회장
소년은 ‘쪽바리’라고 놀림을 받았다. 6·25 직후였다. 배가 고팠다. 흙을 먹기도 했다. 고아원 형들과 배 타고 고기잡이 나가는 게 최고의 행복이었다. 야맹증이 걸려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난 고아가 아닌데…, 왜 이런 취급을 받나.” 심통이 난 소년은 구호품으로 끓인 국에다 모래를 풀었다. 고아원 형들이 우물 속에 던지는 벌을 줬지만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무심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에게 특별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기사 이미지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 고아원의 형·동생들과 함께 자란 윤기 회장. “고아들을 위해 유엔이 지원하는 국제적 네트워크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사진 김상선 기자]

소년의 어머니는 윤학자(1912~68·일본명 다우치 지즈코). 7세 때 조선총독부 관료의 딸로 전남 목포에 온 뒤 고아와 부랑자를 돌보고 있던 윤치호(1909~51?) 전도사를 만나 목숨이 다할 때까지 고아 3000명을 키워낸 ‘고아들의 어머니’다. 전쟁 와중에 남편 윤치호가 식량을 구하러 광주로 나갔다 행방불명된 뒤 혼자 몸으로 고아들을 키워냈다. 목포여고 졸업 후 윤치호의 ‘목포 공생원’에 음악 교사로 자원봉사를 하러 간 게 계기였다. 1968년 10월 31일 쉰여섯 이른 나이에 병마로 쓰러지자 목포시는 시 역사상 최초로 시민장(葬)으로 예를 갖췄다. 영결식엔 3만 명이 운집했다.

고아 3000명 돌본 일본인 모친 윤학자
한국·일본 양국서 봉사 훈장 받아
목포시민장으로 치른 장례식 때 3만 명
한국 고아들 세계에서 도와줬으니
이제 우리가 앞장서 지원 나설 때
아베 총리 부인 등도 많은 힘 보태줘

헐벗고 굶주린 시절, 그가 고아들과 구별 없이 키운 아들은 그날 이후 ‘총각 아빠’가 돼 공생원 아이들을 돌봤다. ‘윤학자 공생재단’ 윤기(74) 명예회장이다. 지난 50년간 윤 회장은 공생원을 장애인·노인 복지를 아우르는 재단으로 키워내고, 소년소녀직업훈련원을 열어 기능인력 5만 명을 배출했다. 82년 이후 일본에서 사회복지법인 ‘마음의 가족’을 설립한 뒤 이사장으로 도쿄(10월 17일 개원)와 오사카 등 5곳에 재일동포 고령자 돌봄 시설 ‘고향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주 서울에 온 윤 회장을 만났다. 그는 2006년 호암상(사회복지부문) 수상 때 제안한 이후 10년간 추진해 온 ‘유엔 세계 고아의 날(UN World Orphans Day)’ 제정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윤학자 여사의 생일이자 기일인 10월 31일을 고아의 날로 정하려 한다고 했다. 3만5000명이 청원에 서명했고, 내년 유엔에 정식 청원서를 제출하는 게 목표다.

“공생원도 그랬지만 한국은 전후 고아들을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키워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나서야죠. 내전·질병·자연재해·빈곤으로 부모를 잃거나, 대안적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은 전 세계 1억500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기아와 강제노동, 성매매 등 온갖 위험에 노출돼 있고요. 유엔이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각국 정부와 비정부기구가 연계해 고아를 위한 정책을 공유해야 합니다. 시리아 내전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취약한 이들이 고아입니다.”
 
이미 많은 어린이 관련 유엔 기념일이 있는데.
“세계 청소년의 날 등 5개가 있지만 ‘고아’에게 의미를 둔 날은 없습니다. 고아란 단어가 편견, 오해를 수반하는 단어여서 고민은 했습니다만, 현실은 현실입니다. 제대로 된 고아 통계도 사실 없습니다. 우리가 한때 ‘고아 수출국’이란 오명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한국이 고아의 날 제정에 앞장서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일을 주로 할 생각이신지.
“고아를 잘 키우는 게 목적이 아니라 고아를 안 만드는 게 우선입니다. 그런 점에서 크게는 평화운동이기도 합니다만, 우선은 고아들이 차별과 빈곤·질병·교육기회 박탈 등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국제적인 지원체계를 확립하고 지원하는 일을 할 생각입니다. 고아들을 키우며 절실히 느낀 거지만 아이들은 한 가지 이상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이걸 키워줘야 합니다. 한때 불행했지만 당당히 세금을 내고 사회 일원으로 살 수 있는 시민으로 만들어 줘야 합니다. 세계 고아들 모두에게요.”

윤 회장은 ‘세계 고아의 날’ 제정 운동을 일본과 협력해 추진하고 있다. “어머니를 매개로 양국이 교류·협력의 손을 잡기도 했고요. 과거사도 있고 이해관계도 있지만 한국도, 일본도 세계 지도국인 만큼 인류 미래를 위해 손잡고 함께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일본 적십자사 총재나 아베 일본 총리 부인 등 많은 이가 고아의 날 제정에 많은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 정부는 63년, 67년 윤학자 여사의 봉사와 희생정신을 기려 훈장을 각각 수여했다. 97년엔 윤학자 여사의 스토리를 담은 최초의 한·일 합작영화 ‘사랑의 묵시록’(감독 김수용)이 제작되기도 했고, 2000년 오부치 게이조(1937~2000) 총리는 공생원에 매화나무 20그루를 보냈다. 수 많은 일본인이 목포의 공생원과 그의 고향인 일본 고치(高知)를 찾는다.

윤학자 여사는 65년 한·일 수교 후 NHK 방송 등 일본 각계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늘 흰 저고리, 검정 통치마 차림이었다. 평생을 ‘한국인’으로, 한국인 고아를 돌보며 살아온 그였다. 하지만 암 투병 마지막 기간, 의식이 혼미해진 이후엔 일본말을 썼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병상에서 ‘우메보시가, 우메보시가 다베타이(매실 장아찌가 먹고 싶다)’라고 하셨어요. 이후엔 한 번도 한국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고향으로 돌아오신 거죠. 제가 나중에 재일동포 고령자 돌봄 시설을 사카이, 오사카, 교토, 고베에 세운 배경이기도 합니다. ”
 
어머니 장례식 때 시민 3만 명이 모였다는데.
“어머니는 말수가 적은 분이셨는데, 조그마한 일화들이 시민들의 마음을 산 것 같습니다. 가수 남진씨의 선친(김문옥)이 당시 국회의원을 지낸 지역 유지였습니다. 어머니가 고생하신다고 식사를 대접했는데, 어머니가 ‘우리 아이들은 이런 것 못 먹고 있다’며 거의 안 드셨다고 해요. 또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후 일본인이라 핍박도 받았는데 그때 신문기자들이 찾아와 ‘도와주겠다. 누가 힘들게 하느냐’고 하면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잘못했는지 내가 알고 있다. 일본 사람인 내가 어떻게 한국 사람을 나쁘다고 얘기하겠나. 심판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할 일이다’라고 하셨어요.”

윤 이사장은 “운명처럼 사회복지에 투신하게 된 게 부모님 덕분”이라며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했다.

“열살 즈음일 거예요. 메뚜기를 잡아왔더니 어머니가 한숨을 쉬면서 말해요. 공생원 아이들이 100명이 안 됐으면 좋겠다고요. 전쟁통이라 원생 수가 500명이 넘었거든요. 아이들이 너무 많아 먹을 것, 입을 것을 제대로 해줄 수 없는 데 대한 한탄이었어요. 공생원에 오자마자 영양실조로 숨진 아기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하룻밤을 함께 보낸 뒤 묻어줬어요. 하루라도 엄마 품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해요. 저도 되뇌며 살아요.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이 학교에 따뜻한 벤토(도시락)를 싸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이 비행기를 타보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요. 그렇게 하면 이뤄지는 일도 많았습니다. 고아의 날 제정도 잘될 거라 믿습니다.”
 
[S BOX] 국제 미망인의 날, 국제 행복의 날…유엔 지정 기념일 129개
유엔은 인류의 삶·역사에서 의미가 있는 이슈를 기리는 기념일(International Days)을 지정한다. 각국 정부가 청원한 내용을 총회 결의를 통해 컨센서스로 결정하고, 유엔이 직접 또는 유네스코 같은 산하 기구를 통해 그날을 기리고 관련 활동을 지원한다.

2016년 10월 현재 유엔 지정 기념일은 129개. 인권·민주주의·건강·복지·문화·기후변화 등 주제도 다양하다. 새해 연휴가 낀 1월엔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도의 날’(27일) 하나만 있지만 6월엔 ‘국제 부모의 날’(1일)을 비롯해 18개 지정일이 있다. 윤학자 공생재단 윤기 이사장이 제정을 추진 중인 ‘세계 고아의 날’ 의 경우 아동 인권 범주에 포함되는데, 여기엔 ‘세계 침략 희생 아동의 날’(6월 4일), ‘세계 아동노동 반대의 날’(6월 12일), ‘세계 청소년의 날’(8월 12일), ‘세계 여성 아동의 날’(10월 11일) 등이 있다. 여성과 장애인·노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의식을 환기하려 만든 기념일은 ‘국제 미망인의 날’(6월 23일), ‘세계 여성 할례 금지의 날’(2월 6일), ‘세계 노인 학대 의식의 날’(6월 15일), ‘세계 원주민의 날’(8월 9일), ‘국제 장애인의 날’(12월 3일) 등이다.

‘세계 전쟁 및 무력 분쟁 중 환경 파괴 방지의 날’(11월 6일)처럼 구체적인 행동을 담아낸 기념일도, ‘국제 행복의 날’(3월 20일)처럼 추상적 목표를 추구하는 기념일도 있다.

글=김수정 국제선임기자 kim.sujeong@joongang.co.kr
사진=김상선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