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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예술 - 문학] 진실의 보호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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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어떤 작가가 대화 장면에서 “두말하면 잔소리죠”나 “우리는 결국 여기까지인 거니?”와 같은 부류의 문장을 태연하게 쓰고 있으면 그 소설을 계속 읽어나갈 수가 없다. 이는 단지 관습적인 표현의 남발이라는 미학적 결함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주변의 인간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관찰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윤리학적 결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고투하고 그로부터 얻어낸 진실의 조각들로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널려 있는 저급한 작품들에서 보고 들은 것들로 인물 하나를 대강 조합해내고 있다는 뜻이다.

백수린 소설집 『참담한 빛』


요컨대 소설을 쓰는 기술이란 타자를 대하는 기술과 다른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철학자 레비나스가 한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타자와 만나는 두 가지 유형을 오디세우스와 아브라함을 대조해 얻어낼 수 있다. 둘 다 고향을 떠나 타자에게로 가고 있으되, 오디세우스는 미지(未知)의 것을 기지(旣知)의 것으로 만들며 자기 자신을 확장해 나가는 여행을 하기 때문에 끝까지 자기 자신일 뿐이지만, 난데없는 신의 명령을 받들어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나는 아브라함은 자신이 영원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 있음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다른 존재가 된다.

좋은 소설가는 아브라함처럼 제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타인을 만나되 ‘만나버리는’ 식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로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와 만나고 있는 중이다’와 같은 식으로 만난다. 그렇게 타인을 만나는 소설 속에서 ‘대화’라는 소설적 공간은, 두 인물 사이에만 존재하고 그들도 잘 설명하지 못하는 어떤 진실의 분말이 흩날리는 공간이 된다. 내가 막연히 하던 생각을 이렇게나마 적어볼 수 있게 된 것은 2011년에 등단한 신예 소설가 백수린이 최근 출간한 두 번째 소설집 『참담한 빛』의 여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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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만에 두 번째 소설집을 낸 백수린. 타인의 고통에 대한 속 깊은 사유를 펼쳐 보인다. [사진 신나라]

이번 소설집에 전진 배치돼 있는 세 편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설정을 백수린 소설의 근본 문법 중 하나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낯선 곳에 간/온 사람이 있고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나 모국어가 아닌 말로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그렇게 능숙하지 않은 대화 상황 속에만 열리는 진실의 공간이 있다. 그래서 나는 너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오히려 내 안의 어둠이나 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너와 함께, 바뀐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만난 두 사람, 아니 인생의 어느 순간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드는 두 사람을 목격하게 된다.

그런 불가역적 변화가 발생하는 순간의 내막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백수린의 소설은 결정적인 대목에서 꿈과 같은 어떤 이미지를 펼쳐 놓는다. 그 이미지 속에서 진실은 말로 표현되는 데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로 훼손되지 않는 데 성공한다. 누구도 타인에게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않고 또 타인의 말을 함부로 해석하지 않는 그런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덕분에 이런 진실의 보호구역이 탄생하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발표된 가장 섬세한 한국 소설들의 장점만을 흡수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백수린의 소설은 진지하고 견고하고 아름답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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