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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환상 편의점 #9. 마음 이어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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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계속될 것 같던 더위가 하루아침에 가셨다. 그러자 갑자기 쌀쌀해졌다. 거리의 가로수도 금세 노랗고 빨간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사이를,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고개를 숙인 한 여자가 걷고 있었다.
대학교 3학년인 여린은 얼핏 보기에는 미인이라 하기 어려운, 평범한 외모의 여자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특유의 매력이 있었다. 키는 적당했으며 몸매는 가냘팠다. 쌍꺼풀 없는 눈에 길고 가느다란 목, 긴 팔다리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뤘다.
그러나 구부정한 자세와 어두운 표정이 그런 매력들을 반감시켰다. 머릿결 좋은 긴 생머리는 지나치게 검고 숱이 많아서 되려 음침해 보였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었다. 도톰하고 예뻤을 아랫입술은 계속 뜯어대는 버릇으로 인해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여린은 늦가을 밤거리를 걸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한 번씩 생각난 듯 아랫입술을 뜯었다.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뜯겨 피가 맺혔으나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의 고민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어떤 증상이 원인이었다. 얼마 전, 반찬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랜만에 그녀의 자취방에 찾아온 엄마와 대판 싸운 뒤부터, 그녀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신과를 가봐야 할까?’
 
그때, 엄마는 마치 낯선 뭔가를 보듯 여린을 보면서 말했었다. 너 이상해, 하고.
맞은편에서 한 쌍의 연인이 웃으면서 다가오는 바람에 상념이 깨졌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몸을 더욱 움츠렸다. 반면, 신경은 온통 연인의 대화에 집중한 채였다. 회피와 관심을 동시에 보이는 묘한 행동이었다.
 
“날씨가 – 많이 – 겨울 – 여행갈까?”
 
“온천 – 옷 – 없어.”

 
여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인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와 연말 여행에 대해 얘기하는 듯했다. 그러다 두 사람이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귓가에 똑똑히 들려온 어떤 단어 때문이었다.
 
“촌스러워.”
 
여자가 분명 촌스럽다고 얘기했다. 여린 쪽을 힐끗 쳐다본 것도 같았다. 여린은 얼른 제 매무새를 살폈다. 몸매를 부각시키는 베이지색 니트에 스키니한 청바지, 작은 갈색 가죽 백팩. 딱히 세련된 패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촌스럽다고 할 정도도 아니었다. 화가 나고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야. 내 얘기를 한 게 아니야. 진정해, 이여린. 그때 엄마도, 널 감시하러 온 게 아니었잖아. 냉장고 문 열어보고 방 청소해주는 건 입학했을 때부터 해주셨던 일이잖아.’
 
여린은 걸음을 빨리하며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되뇌었다. 등 뒤로 멀어지는 연인의 웃음소리가 자신을 비웃는 듯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뒷담화를 하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지는 증상. 뭔가 이유 없이 불이익을 가하려는 것 같아서 의심하게 되는 증상. 일종의 피해 망상에 가까웠는데, 특이한 점은 그로 인해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위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내용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거였다.
방금만 해도 연인이 정확히 어떤 얘기를 했는지, 만약 여자가 진짜 자신의 옷을 촌스럽다고 평했다면 어떤 점이 그랬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쫓아가서 여자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저기요, 제 옷이 그렇게 촌스러워요?
 
‘그랬다가는 진짜 미친년 취급받겠지.’
 
처음부터 이랬던 것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증상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여린은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비교적 명확히 알고 있었다.
바로 일 년 전 그날, 과방 문 앞에서 함께 뭉쳐 다니는 제일 친한 친구들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들은 날부터였다. 그전까지의 그녀는 조금 소심하지만 잘 웃고 적당히 수줍어하며 성격도 밝은 편인,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 그런데 여린이 걔, 은근히…….
 
‘그만!’

 
그날의 대화가 또 떠오르려고 하자, 여린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벌써 일 년 넘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때 그녀들이 낄낄대며 나눈 대화 내용과 당시 상황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오히려 점점 더 또렷해졌다. 그 목소리, 말투, 웃음소리, 거기 섞인 이해하기 어려운 악의와 음습함, 반지하에 있던 과방 입구의 축축한 냄새와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담배연기.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여린은 또 시커먼 심연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왜 날 두고 그런 소리들을 하는 거지? 앞에서는 그렇게 웃는 얼굴이었으면서. 그날 이후로 여린은 사람들과 사귀기 어려워졌다. 함께 있을 때는 친절한 척해도 속으로는 자신을 비웃고 다른 곳에서 험담할 것만 같아서였다.
 
그때의 무리들과는 당연히 절교했다. 그녀들은 여린을 빼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니다가, 학년이 바뀌면서 수업이 많이 달라지자 허무할 정도로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여린은 옛 생각에 사로잡혀서 걷다가, 정면에서 배달 오토바이 한 대가 빠르게 달려오는 것을 미처 못 봤다. 좁은 길에서, 어린 배달원은 당연히 상대가 피하리라 생각한 듯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한 발 늦게 알아차렸을 때는 피하기에도 늦은 후였다. 여린이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굳었을 때, 옆의 좁은 골목에서 누군가의 팔이 불쑥 튀어나와 그녀를 잡아당겼다. 덕분에 여린은 아슬아슬하게 오토바이를 피했다. 배달원은 등 뒤로 욕설을 남기고 쏜살같이 가버렸다.
 
“아! 가, 감사…….”
 
정신없는 와중에 감사 인사를 하려던 여린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아름답다. 이렇게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딘가의 직원이거나 코스프레라도 한 건지, 검은 턱시도에 흰 장갑을 낀 채였는데 그게 하나도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 남자라면 뭘 입혀놔도 멋지게 소화해낼 듯했다. 남자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큰일 날 뻔했군요. 조심하셔야죠.”
 
여린은 남자의 눈동자가 짙은 보라색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컬러 렌즈를 낀 거겠지? 그러다 문득, 예의 의심병이 발동했다. 그녀는 이 길을 2년 내내 걸어 다녔다. 하지만 이런 골목이 있다는 사실은 지금 처음 알았다. 게다가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이 좁은 길 안에는 이 남자와 어울릴 어떤 것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혹시, 날 기다린 게 아닐까? 아까 그 오토바이 탄 녀석도 한패인 건 아닐까?’

 
근거도, 논리도 없는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동시에, 지금 이 남자가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지 두려우면서도 궁금해졌다. 그녀를 가만히 보던 남자가 슬쩍 웃었다.
 
“재미있는 분이네요.”
 
“네?”

 
재미있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이지? 놀리는 건가?
검은 턱시토 차림의 남자는, 여린의 손목을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잡고 골목 안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아무래도 여기서 저와 당신이 만난 게 우연은 아닌 모양입니다. 우리 가게에, 당신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있을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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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봐. 역시나. 드디어 올 게 왔다. 다단계였어! 여린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괘, 괜찮아요.”
 
그녀는 발에 힘을 주어 버티려 했다. 이 좁은 골목 안쪽에 그런 가게가 있을 리 없었다. 이젠 다단계가 아니라 납치범이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워졌다. 그러다 남자의 은근한 힘에 못 이겨 골목 안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거기에는 작고 아담한 편의점 하나가 있었다. 환상 편의점. 처음 듣는 이름인 걸 보니 체인점은 아닌 듯했다. 벽면 대부분이 유리로 되어 있고 보라색의 은은한 조명이 새어 나왔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뭐에 홀린 듯, 저절로 걸어 들어가고 싶어지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런 게 언제 생겼지?’
 
멍해진 여린에게, 남자가 물었다.
 
“거봐요. 있죠?”
 
여린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생겼는데 통 손님이 없어요. 잠깐 들어와서 구경이라도 해봐요. 보통 편의점하고는 좀 다르거든요.”
 
여린은 남자를 따라 환상 편의점의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얼핏 보기에는 보통 편의점과 비슷했다. 하지만 잘 보니 큰 차이가 있었다. 남자의 말처럼 좀 다른 정도가 아니었다.
 
‘이게 다 뭐야?’

 
샌드위치와 삼각김밥, 컵라면, 음료수 등 편의점에서 파는 일반적은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진열만 비슷하게 되어있을 뿐. 환상 편의점 안에는 진짜처럼 정교한 해골 모양의 소품, 주먹만 한 수정구슬, 원색의 액체가 들어있는 특이한 모양의 유리병 등 용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것들이 가득했다.
 
‘혹시, 편의점 콘셉트의 골동품점인가?’
 
이런 것들을 싫어하지 않는 여린은 가게 안을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구경했다. 남자는 안에 들어온 후부터, 카운터 근처에 서서 그녀를 자유롭게 놔두었다. 옆에서 쓸데없이 따라다니지도 않고 구매를 권유하지도 않아서 한결 마음이 편했다. 그러다 문득, 여린의 발걸음이 한 물건 앞에서 멈췄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유독 거기에 시선이 꽂혀 계속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은 매우 특이한 디자인의 이어폰이었다. 귀에 꽂는 부위와 줄로 이뤄진 건 여느 이어폰과 같았다. 단, 스마트폰이나 오디오와 결합할 수 있는 3.5밀리 잭이 아예 없었다. 은은한 유백색의 재질은 플라스틱이 아니라 상아나 도자기 같았는데 매끈하고 차가웠다.
 
‘이건 어떻게 들으라는 걸까? 블루투스인가?’

 
여린이 이어폰을 살펴보며 생각할 때였다. 별안간 어깨너머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호오, 그겁니까? 그 물건이 손님을 부르던가요?”
 
“네? 저, 무슨 말씀인지…….”
 
“그것은 마음 이어폰이라는 상품입니다.”
 
“마음…… 이어폰이요?”
 
“예. 그 이어폰으로는, 보시다시피 음악을 들을 수 없어요. 기계에 꽂는 잭이 달려있지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무선 장치도 아닙니다. 그 이어폰은, 정면에 있는 상대의 마음을 들을 때 쓰는 겁니다.”
 
“마음을, 듣는다고요?”

 
여린은 하마터면 피식 웃을 뻔했다. 감성적인 판매용 멘트라고 치면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그녀의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남자는 말을 계속했다.
 
“네. 그 이어폰을 착용하고 있으면, 정면으로 마주 보는 사람의 마음속 소리를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그게 기본 기능입니다. 도중에 귀에 꽂는 타원형 부분을 한 번 두드리면 좀 더 깊고 자세한 마음이 들리게 됩니다. 두드릴 때마다 점점 더, 깊숙한 내면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되고요.”
 
“…….”

 
여린은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일단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남자의 설명이 재미있기도 했거니와 거기서 묘한 설득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른 상품들에 비해 마음 이어폰은 사용법이 간단한 편이죠. 단, 하나 유의하실 점이 있습니다. 보통 이어폰도 지나치게 큰 소리로 들으면 청력이 상하듯이, 마음 이어폰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볼륨을 올리시면 듣고 싶지 않은 소리까지 듣게 됩니다.”
 
“듣고 싶지 않은…… 소리라뇨?”

 
얘기하던 여린은 조금씩 무서워졌다. 이 남자, 마치 그녀의 불안증과 피해망상 증세를 정확히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여린의 물음에, 점원 남자는 씩 웃었다.
 
“모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소리를 듣는 이어폰으로 고막이 상하듯, 마음 이어폰으로는 마음이 상할 수도 있다는 사실만 알아두세요.”
 
“이건, 얼마죠?”
 
“일단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고, 공짜라고요?”

 
덜컥, 또 의심이 시작되었다. 공짜라고 해놓고 나중에 터무니없는 값을 요구하려는 게 아닐까? 혹은, 도둑으로 몰아서 -
남자는 그녀의 망상을 일축하듯 한 마디로 설명했다.
 
“나중에 감정으로 주시면 됩니다.”
 
“감정이요?”
 
“네. 아무튼 가져가서 잘 사용하세요.”

 
고마운 마음만 가지면 된다는 걸까, 하고 여린은 생각했다.
등 뒤로 점원의 인사를 들으며 편의점을 나온 그녀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분명, 그 자리에 있던 편의점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꿈이나 환각은 아니었다. 그녀의 손안에는, 조금 전 구입한 ‘마음 이어폰’이란 것이 꼭 쥐여 있었으니까.
 
“대체 뭐야…….”
 
여린은 두려움과 불안이 뒤섞인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동시에 작은 기대감도 어려 있었다.
 
마침, 취객 하나가 비틀거리면서 골목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얼른 이어폰을 귀에 꼈다. 이런 자신이 우스우면서도 시험해보고 싶은 호기심을 견디기 어려웠다. 이어폰을 착용한 순간,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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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소개  
    명지대학교 문예 창작학과 졸업
    단행본 <문답 무용>, <파이널 에볼루션> 출간
    <도전!웹 소설 쓰기>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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