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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제8요일의 남자] #20. 당신은 누구세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미모의 여인과 느긋하게 차 한 잔 마실 여유를 안주니 연애사업을 어떻게 하냐고... ”

국회사태가 비상이라더니 문자 한통에 김천수가 급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일어서며 서둘러 명함지갑을 꺼냈다.
 
“미주씨! 이번엔 꼭 번호 세팅 부탁드립니다. 그래야 미주씨 SNS가 제게도 보일 거 아닙니까. 꼭 입니다. 그리고 친구! 내일 의장실로 한 번 알현하러 갈게.”
 
김천수는 아트와 내게 명함 한 장씩을 건네고는 빠르게 식당을 나갔다.
 
“오늘 반가웠어요...”
 
김천수 뒤를 따라 함께 복도로 나온 아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웠습니다...”
 
나는 목례로만 답을 하고 악수는 하지 않았다. 처음 인사하던 때의 알 수 없는 느낌 때문이었다.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그는 멋쩍은 웃음을 웃더니 내민 손을 거두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 짧은 순간,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일었다. 허전하고 쓸쓸한 거기다 아쉽고 안타까운, 말도 안되는 느낌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처음 본 누군가를 향해 이런 감정은 이제껏 처음이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어쩐 일인지 자꾸만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서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라 돌아보지 말아야지, 몇 번이나 생각을 해놓고도 나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하지만 정말 그가, 거기에 서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한껏 미소를 띠며 손을 번쩍 들어주었다. 그의 웃음이 건너오자 알 수 없이 사로잡혀 술렁이던 감정들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제야 다시 돌아서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내 감정이 당황스러우면서도 그의 별명이 왜 아트인지 본명이 뭔지 궁금하단 생각을 하며 의사당을 나왔다.
에프의 친한 후배였다는 사실에 내가 그렇게 마음이 동요되었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우연히 스친 사람일 뿐인데 다시 볼 일도 없는데 도무지 내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국회 마당을 비추는 10월의 햇살은 짱짱했지만 흐르는 바람은 제법 싸늘한 냉기를 품고 자꾸만 옷 사이로 파고 들고 있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에프가 떠났다. 바로 얼마 전의 일이건만 어느새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어떤 해보다 아픈 여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내 앞의 가을은 그 어떤 해보다 힘겨운 느낌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한 켜씩 파고 드는 바람처럼 나는 한 걸음씩 에프의 죽음의 소용돌이로 들어 와 이제는 더 이상 물러 설 수도 돌아갈 수도 없게 돼버린 것만 같았다. 에프의 죽음이 자살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타살이라 한들 범인이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상태지만 내가 에프의 죽음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단 것만은 확실한 일이었다.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희정이 후생관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게 보였다. 희정이 불편할까봐 일부러 다른 방향으로 돌아 서는데 희정이 나를 불렀다.
 
“언니... 할 이야기 있어요....”
 
희정은 전면 유리창 앞의 테이블에 나를 앉혀놓고 커피를 가져왔다. 창밖의 풍경에 눈을 놓고 앉는 내 앞에 희정이 커피를 내려놓았다.
 
“언니가 좋아하는 에스프레소 마끼아또 예요.”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에프의 죽음이후 희정은 이전에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나를 피하려 안간힘을 썼었다.
 
“언니가 에스프레소 전용 잔이라면서 데미타세 잔을 의원 실에 사다 주셨던 거 기억나세요? 저는 그때 그런 게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희정이 커피를 들어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내가 타미타세 세트를 사서 의원 실을 갔던 날은 에프가 초선에 당선되고 처음 그곳 식구들과 저녁을 먹던 날이었다.
 
에스프레소는 양이 적기 때문에 빨리 식어버리는 단점이 있었다. 데미타세는 커피 온도가 내려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두껍게 만들어진 에스프레소 전용 잔이었었다.
 
‘사람의 뜨거운 마음도 빨리 식지 않게 가슴이 두껍게 만들어졌다면 뭔가 달랐을까?’
 
그날 데미타세 잔으로 커피를 마시며 에프가 말했었다. 마음이 가슴 안에 있어요? 내가 묻자, 아닌가? 머리에 있나? 고개를 갸웃하며 에프와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오래 멍들어 있던 상처처럼 무지근하게 가슴을 눌렀다.
 
“제가 제일 힘들었던 건 다른 것보다 언니를 속이는 거였어요.”
 
희정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를 속이는 게 제일 힘들었다면 또 다른 누구도 속였다는 말인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어떤 일들을 벌이고 있다는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르겠어.”
 
착해 보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희정을 향해 내가 말했다. 희정은 내 말에 살짝 웃고는 금세 볼 양 쪽으로 늘어졌던 입술을 다시 오므렸다. 휴게실에서 말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던 희정과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희정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예전 그대로라면 희정과 내가 감정을 대치하고 앉아 상대의 표정을 읽고 있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언니는 여전히 그 회사 다니고 계세요? 능력을 인정받는 곳에서 일을 한다는 건 행복한 일 같아요. 매일 출근하는 시스템도 아니고.... 제가 인턴으로 있을 때 용돈 많이 주셨죠... 감사하면서도 언니가 정말 부럽기도 했어요.”
 
희정은 옛 생각에 잠긴 듯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한껏 미소를 지며 말했다.
그녀는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올라와 스스로 벌어 전문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남동생 대학공부를 시키고 있다며 가끔 동생전화에 대고 구성진 경상도 사투리로 공부 열심히 하라고 타박을 하곤 했다.
나는 그 왜소한 체격이 마음에 걸려 그녀를 보면 언제나 무언가를 챙겨주고 싶었다. 한 때는 그녀가 좋아하는 찐만두나 삼겹살을 사다주려고 일부러 마트를 들르기도 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작고 마른, 동생 같은 희정을 향해 내 마음을 도사려야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간의 주고받은 마음은 아랑곳없이 어느 순간 희정은 얼굴을 바꾸고 나를 기만한 채 알 수 없는 거짓말로 혼란을 주었었다. 어떤 이유였다해도 나로선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리가 나눠야 할 이야기는 따로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면 지금 희정씨와 이렇게 앉아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분명 나를 불러 세웠을 때는 이유가 있을 텐데 더 이상 겉돌고 싶지 않았다.
 
“언니... 그냥 이쯤에서 모른 척 하고 놓아 버리면 어때요?”
 
진지한 눈빛으로 보아 일어서는 나를 주저앉히기 위해 일부러 만든 말은 아닐 것이었다.
 
“무엇을?”
 
“요즘 의원님과 관계 된 일들이요...”
 
나는 이제껏 아버지 외의 사람을 향해 적의나 전의 같은 걸 품어 본 적이 없다. 혹 있었다면 아버지의 숨겨놓은 여자 정도였겠지만 그녀는 내게 실체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 외에는 누구와 등을 지거나 특별히 누구에게도 격한 마음을 품어 본 일도 없다. 그래야할 이유가 없었다. 민석오빠가 언젠가 내게 말했듯 내가 운이 좋았던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상대를 향해 먼저 의심을 품거나 말이나 행동의 저의를 따져 고민하며 산 적이 없었다. 상대가 혹 그런 걸 가졌다 해도 나와 부딪힐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 예민함의 주파수는 늘 그런 걸 비껴 다른 곳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모른 척 하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은 희정이 아니었다. 희정을 조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왜 그래야하지?”
 
“의원님과 언니, 친하셨잖아요. 그 대가를 치른다고 생각하시면 안 될까요? 그냥 다 덮고 지나가시면 안 될까요?”
 
그녀의 눈빛이 애절하기도 하고 절박해 보이기도 했지만 ‘대가’라는 말이 내게로 날아와 갈고리처럼 걸렸다.
 
“왜 덮자고 하지? 곧 드러날 텐데... 이미 다 벌어진 일이야. 누가 덮자고 한다고 덮어지지 않아. ”
 
희정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 커졌다. 내 앞에 앉아있는 작고 야윈 한 여자를 향해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 작고 야윈 여자를 조종하고 있는 거대한 누군가를 향해 한 말이었다.
 
“사모님... 만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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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이 영리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폴더폰을 오비서관이 내게 준 이유가 뭔지, 내 집에 사람을 보내 그 폰을 찾으려고 한 이유가 뭔지, 오피스텔 여자사진들은 뭔지, 오비서관이 들고 나간 캐리어에 뭐가 들어있었는지, 희정씨가 다 설명할 수 없다면 만나야겠지.”
 
희정은 마른 침을 삼키며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언니... 제가 아는 건 오비서관님이 오피스텔에서 의원님 물건 챙겨 나간거랑 여자사진이랑 그거 밖에 몰라요. 그건 시켜서 하는 수 없이 한 거니까.”
 
“쪽지며 거짓말들도 시켜서 한 것이고?”
 
“....”
 
“내 집에 사람을 보낸 건? ”
 
“그건 전혀 모르는 일이에요... ”
 
희정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 잊고 돌아서라, 그런 말이지? 의원님이랑 가까웠던 것에 대한 죄 값을 치른 걸로 하고서?”
 
희정이 미안한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무언가 내가 더 물을까 겁이라도 나는지 시선은 아래로 떨군 채 식은 찻잔을 들었다.
 
“희정씨가 이러는 덴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을 소중하게 생각했다면 희정씨 선택이 달랐을 거라 생각해. 이젠 걷잡을 수 없어...”
 
나는 일어서 카페 밖으로 나왔다. 희정이 거짓말을 하고 나를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속았다는 어떤 사실보다 나를 정말 힘들게 했던 건 가까웠던 희정과의 관계가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사모님 만나실 거예요?”
 
뒤따라 나온 희정이 다시 내게 물었다.
 
“희정씨가 전화 해. 내가 만나자고 한다고. 시간 장소 정해서 내게 연락 줘.”
 
말을 던져놓고 희정의 표정을 보지 않고 돌아서 곧장 걸었다. 차마 우정을 벗어놓고 희정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는 없었다. 희정은 나와의 관계를 팽개치고 자신이 판단한 유익을 선택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집에 다다를 즈음 희정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저녁 7시 북촌 NY스테이크하우스에서 보자고 하세요.’
 
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우정을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언니. 제 전화가 도청되고 사무실이 도청된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그건 꼭 믿어주셔야 해요.’
 
다시 문자가 왔지만 답하지 않았다. 누구의 말을 믿거나 누구의 생각을 참고하기엔 나는 정말 너무 깊게 들어 와 있었다. 에프의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약속 장소는 찾기 쉬웠다.
2층으로 된 아담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출입구 바로 맞는 편에 카운터가 있고 카운터와 주방이 연결된 색다른 구조였다.
1층 창문 옆에는 자그마한 몇 개의 테이블이 길게 놓여있었고 옆의 계단을 올라가니 예쁘게 꾸며진 2층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6시30분이었다. 거의 저녁 식사 시간이었는데도 레스토랑 내부는 텅텅 비어 있었다. 서빙을 하는 직원조차 없었다.
 
1층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 30분 남아있었다. 책이라도 읽으려 핸드백에서 책을 꺼내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한연수였다.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지만 한 눈에 바로 그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그녀를 보는 건 이번이 네 번째였다. 하지만 앞의 세 번과는 달리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블랙 니트 폴라 원피스에 같은 색의 발맹 케이프 자켓을 입은 그녀는 천천히 다가와 무표정한 얼굴로 내 앞에 앉았다.
 
“정비서 만났다구요....?”
 
전과는 다른 표정, 다른 어조였다.
 
“제가 국회로 갔었어요.”
 
한연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콜 벨을 흔들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주방에서 한 여자가 나왔다. 여자는 한연수에게 인사를 하더니 테이블에 음식과 와인을 가져다 놓았다. 테스팅은 하지 않겠다는 손짓을 하자 잔에 와인을 따라주고는 돌아갔다.
 
“건배해요.”
 
그녀가 잔을 들었다.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잔을 손에 든 채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혼자 들이켰다. 그리곤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 만났을 때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던 바로 그 미소였다.
 
“마시지 않을 건가요? 저번엔 아주 잘 드시던데?”
 
대답 없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같이 마시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려고 왔는데...”
 
연수는 반듯하게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여기 앉아있는 나는, 지난 번 만났던 그 여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어깨에서 힘 빼세요. 내 눈이 그녀의 눈으로 바로 건너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는 충분히 알아차릴 것이었다.
 
그녀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먼저 이걸 보여줘야겠군요.”
 
그녀는 핸드백을 열어 금장으로 장식된 사각 케이스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얹어놓았다.
 
“이게 뭔지 알아요?”
 
그게 뭔지 알 거라 생각한 질문이 아닐 것이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수는 내 눈에 시선을 고정시켜놓고 손으론 박스를 열었다. 마치 그 안에 든 무언가를 발견한 내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겠다는 듯 뚫어지게 내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케이스에 든 건 에메랄드 목걸이였다. 어떤 말로도 표현이 다 안되는 영롱하고 맑고 눈이 부신 푸른 보석 목걸이였다. 나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은 표정으로 목걸이에서 연수 쪽으로 빠르게 시선을 옮겨놓았다. 이번엔 또 어떻게 나를 속일 셈이죠? 내 질문을 그녀가 알아차리길 바라면서....
 
“모든 이야기는 이 목걸이에서부터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연수는 여전히 내 눈에 시선을 둔 채 내 앞으로 그것을 밀쳐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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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월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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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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