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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다시 그리는 '태평성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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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논설위원

영상으로 감상하니 눈에 쏙쏙 들어온다. 오밀조밀,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과 가게 사이에서 길을 잃은 듯했는데 디지털 영상으로 매만진 그림을 보니 한결 쉽게 이해된다.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한복판에 설치한 ‘태평한 시절, 어느 하루’다. 18세기 조선의 이상적 도시를 그린 8폭 병풍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를 홍익대 영상대학원에서 동영상으로 만들었다. 200여 년 전 저잣거리가 한가롭고도 활기차게 펼쳐진다.

원본 그림에는 약 2120명이 나온다. 등장인물을 살펴보는 것도 큰일이다. 조선 후기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 일어선 도시의 번잡한 풍경이 생생하다. 대장장이는 쇠를 두들기고, 선비들은 차를 끓여 마신다. 아낙네는 그네를 타고, 남정네는 기와를 올린다. 원숭이가 나무 기둥을 타는 모습을 구경하는 사람도 있다. 온갖 기호품을 갖춘 점포도 눈에 띈다. 농업·상업·공업 등 당대의 일상이 모자이크처럼 담겨 있다.

‘태평성시도’는 사실 가짜 풍경이다.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표현했다. 서양식으로 유토피아다. 먹고 입고 잘 걱정 없는 세상, 새로운 도시에 대한 염원을 집어넣었다. 전시에 함께 나온 중국 그림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고소번화도(姑蘇繁華圖)’의 영향도 받았다. 청나라 때 소주(蘇州)의 살림살이를 파노라마처럼 담은 ‘고소번화도’에는 약 4800명이 등장한다. 확대경이 필요할 정도다.

‘태평성시도’는 18세기 조선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가 조성했던 신도시 ‘화성(華城·수원)’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이 설계했다는 기중기가 보인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좇았던 실학의 기운이 느껴진다. 일례로 정조의 화성 행차를 그린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에는 무려 7349명(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 나온다. 조선시대 회화 중 가장 많은 인물이 담긴 그림이다. 지난 주말 221년 만에 재현된 화성 행차에는 총 3000여 명이 참여했다.

박물관을 나오며 잠시 백일몽에 빠졌다. 지금 ‘태평성시도’를 그린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만인이 자유롭고 평화로운 작품을 남길 수 있을까. 다산이 늘 고민했듯 수탈과 억압의 18세기에도 새 세상에 대한 꿈은 있었는데 말이다. 회사로 오는 502번 시내버스 김광호 기사에게서 실마리를 찾았다. 그는 정거장마다 오르고 내리는 손님의 안전과 행복을 빌었다. “20년 내내 해온 일”이라고 했다. 내가 이 시대 ‘태평성시도’를 그린다면 그부터 초대할 것 같다.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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